기억력이 좋지는 않다. 그래서 어릴 때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 편이다. 특히 초등~중등의 기억은 거의 없다. 어릴 때 친구와 중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 사건이 있었는지는 물론이고 “그래서 걔가 누구야?”라는 이야기를 하기 일쑤이다. 한 학년에 총 70명이라 서로 모르는 친구가 없었음에도 왜 친구 입에서 나오는 이름들은 다 낯선지 모르겠다.
그런 내게도 선명한 어릴 때의 기억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면 정말 좋아하는 god의 컴백일을 벽에 표시했던 일, 방과 후 도서부 활동을 하면서 책을 정리하던 시간의 고요함, 학교에서 시킨 백일장에서 열심히 글을 쓰던 기억 등. 지금 생각하면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었는데도 왠지 나에게 선명하게 각인이 되어있는 것들이다.
그중에도 특히 선명한 기억 중 하나는 초등학생 때 집 앞의 논둑을 걸어 다니면서 어떤 생각에 골몰했던 기억이다. 봄의 논둑에 핀 노란색 냉이꽃을 들여다보며 나는 진지하게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 순간을 기억할까? 만약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지금의 내가 없어진다는 뜻과 같지 않을까? 그럼 그건 지금의 내가 죽는 것과 같은 것 아닐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순간의 나는 죽은 것일까? 나는 계속 죽는 걸까? 그건 너무 무서우니까 난 꼭 이 순간을 기억해야지.’하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기억이 하나씩 있지 않나 싶다. 나는 그러한 순간들 중 몇 가지를 기억하고 있다.
어릴 때에도 궁금했지만, 어른이 된 지금도 궁금하다. ‘나’라는 자아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나’는 살아온 기억의 누적으로 형성된 현재의 자아관이라고 정의한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그 순간 죽은 것일까? 종종 내가 한참 과거에 쓴 글이나 일기를 보며 ‘내가 이런 생각도 했구나’하고 놀랄 때가 있다. 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사라졌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슬픈 일이다.
‘나’를 이루는 기억들은 퇴적층처럼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확신은 없지만 나무의 나이테처럼 나의 기억이 쌓여 어떤 성숙한 ‘나’를 완성해 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 다이어리에 기록해 둔 ‘Don’t forget 200x.xx.xx’라고 적어둔 기록을 몇 년 뒤에 열어보고 대체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은 일이 있다. 영어로 꾹꾹 눌러쓴 펜 잉크가 눈물 자국으로 번져있는 것을 보면 그때의 나에겐 꽤나 대단한 일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당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렇게 비장한 일기를 작성했는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버렸다. 그날의 비장한 나도 그렇게 없어진 것만 같아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날의 나는 그날을 잊고 싶지 않았을 텐데 어른인 나는 너무나 그날을 쉽게 버렸다.
어른이 되면서 점점 더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몇 년 전이 아니라 어제 뭘 했고 무엇이 기쁜 일이었는지 모르게 되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나’는 이렇게 사라지는 것일까 무서워진다. 인터넷에서 치매 간이검사를 검색해보기도 하고, 건강검진 항목에서 뇌 mri 항목을 진지하게 노려보기도 한다. 마치 무너져가는 젠가와 같다. 나를 이루는 기억은 한 토막을 위에 쌓으면 아래층에서 몇 토막이 없어지는 젠가처럼 흔들거린다. 기억이 빠져나간 구멍이 더 커질수록 균형이 잡히지 않는 느낌이다. 나를 이루는 기억을 나라는 유통기한이 한정적인 저장장치에만 저장하는 것은 너무 불안정하지 않나.
그래서 사람이 가족을 이루고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를 이루는 자아가 기억의 종합이라면 결국 그 기억을 나만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마치 클라우드 저장장치처럼 나누어서 저장해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중학교 시절의 추억을 다른 친구가 기억하여 나에게 말해주는 것처럼. 내가 수명이 다 해 저장장치의 역할을 다 할 수 없더라도 나를 기억하는 나의 가족, 나의 자식으로 나의 기억이 이어진다면 결국 나라는 자아도 계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자아가 확장될 순 없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가족을 이루도 자식을 낳고 부모의 제사를 지내고 친척들과 명절에 모여 둘러앉아 돌아가신 분을 추억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언젠가 다가올 필연적인 ‘나’라는 자아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할 때 즈음 픽사의 코코를 보았다. 코코는 저승과 이승과 가족에 대한 영화이다. 배경이 되는 멕시코의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에 기반을 하는 것인지 단지 코코만의 설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코코에서는 사후 세계에도 죽음이 존재한다. 이승에서 기억해 주는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으면 망자 또한 마지막 죽음 곧 소멸을 맞이하게 된다.
기억이 사라지면 자아도 사라진다는 이야기에서 공감을 느꼈다. 내가 생각해 오던 자아에 대한 생각과 연결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사람의 자아의 영속성은 나의 불완전한 기억과 언젠가 오게 될 필연적 죽음에 의해 끝나게 된다. 하지만 자아를 기억의 종합으로 확장한다면, 그리고 그 기억의 저장소의 개념을 다른 사람으로 확장한다면, 내가 관계를 맺고 가족을 만들고 그들을 기억하고 기리며 나 또한 후대에게 기억될 것이리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 중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면 결국 그것은 나라는 자아의 영원한 종말이 아닌가.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그렇다면 내가 아주 대단한 사람이 아닌 이상 나는 나의 죽음 이후 적어도 50년 이내엔 잊히게 될 것이다.
결국 기억의 소멸과 그로 인한 자아의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한 자아로 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과 그리고 내가 잊었더라도 누군가에게 남겨진 기억들로 충분히 현재의 나라는 자아가 이루어졌음을 믿는다. 앞으로 기억될 날들보다 잊힐 날들이 더 가깝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원한 기억은 없다. 그렇다면 짧게 기억되더라도 멋지게 기억되고 싶다. 멋진 기억으로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