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23
아직 길가의 눈이 녹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 잠시 헤맸다. 입김이 뿜어져 나와 목도리 한켠을 축축이 했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휑한 골목길이 보였다. 부끄럽다거나, 애가 탄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발밑을 고르니 살얼은 빙판이 드러났다. 우리는 이 주 전에 소개팅 자리에서 만났다. 잘 아는 동생의 사촌언니라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 처음보단 두 번째가, 두 번째보다 세 번째가 좀 더 살가웠다. 그리고 오늘이 네 번째. 나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소리 없이 쌓여버린 눈처럼 말들이 뭉쳐졌다. 당신이 좋아요. 행여 미끄러질까 발밑을 보며 걷던 그녀가 멈추어 섰다.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살짝 웃어 보였다. 나도 덩달아 웃었다. 생각해보고 대답 주세요. 그녀가 현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서서 지켜보았다. 그녀도 들어가기 직전 나를 돌아봐 손을 살며시 흔들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렇지가 않았다.
예전이 좋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좋아하고 고백을 한 뒤 터질 것 같이 뛰던 심장과 숨 막히게 밀려오는 후회, 부끄러움 - 이것들이 그립다는 얘기가 아니다. 조급하게 요구했던 확답이라거나 차일 걸 예감한 뒤 오는 자괴감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내 모습은 내가 바라마지 않던 나의 모습이었다. 그녀도 달랐다. 예전에 만나왔던 여자아이들과는 다르게 짧은 시간이지만 조곤조곤 많은 것들을 나누었다. 같은 나이, 가까운 동네에 살았고 우연히 도서관에서 마주치기도 했고, 서로 시간은 달랐지만 외국의 한 도시에 일 년 간을 머물렀다. 지명과 도로와 유명한 레스토랑을 이야기하면서 그 도시의 시큼한 햇살만큼이나 우리는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웃었다. 우리 참 많이 비슷하죠? 잘근, 주름이 잡힐 정도로. 그녀의 콧잔등을 보고 난 뒤 나는 고백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랑할 수 있다. 아는 동생도 내게 말했다. 둘 다 너무 내 눈치 보는 거 아니에요? 둘이 잘 어울려서 소개시켜준 거니까 잘 해봐요. 언니도 오빠 만나서 즐거웠다고 했어요. 그 말이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조심하며 내딛었음에도 나는 빙판에 살짝 삐끗거렸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축축한 목도리를 살짝 끌어내려 입술이 찬바람을 맞았다. 담배연기처럼 한숨을 잔뜩 내뱉었다. 폐 한구석이 깡그리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큰 길이 나오고 지하철역이 보였다. 십 분 정도 지나자 막차가 다가왔다. 선로에 반사되어 열차의 헤드라이트가 푸르스름했다. 팔각의 빛 알갱이들이 흩어졌다. 지하철에 올라타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 버려진 무가지를 훑다 오늘의 운세를 보았다. 스물아홉, 청춘은 아름다운 시절입니다. 하핫, 실없이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다행히 텅 빈 지하철이라 누군가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시간은 열두 시로 바뀌었고, 오늘은 어제가 되었다. 내가 한 고백도 그만큼이나 멀어진 기분이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어야지. 그 한 가지 생각으로 나는 역사 밖을 나왔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