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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Nov 02. 2018

[25] 숨쉬는 모든 것 – 동물, 식물, 미생물.

2부-강원도 속초

불가리아 피린 산맥 골짜기 작은 마을에 집을 사겠다는 꿈을 꿀 당시 미래를 위해서 돈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유로를 모았었다. 미래는 오지 않았고 꿈도 실현되지 않았지만, 유로는 남았다. 따로 떼어둔 그 돈을 들고 조금 긴 겨울 여행을 가기로 했다. 봄, 여름, 가을은 속초에서 보내고 겨울엔 여행을 가자. 18년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한 남편의 퇴직 기념 여행으로 속초 이민과 함께 오래 전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전에는 어디 여행을 가려면 집개를 맡기려고 엄마나 언니에게 조공을 바치며 알랑방구를 떨고는 했다. 개를 키우는 영혼의 친구가 같은 동네 한남동으로 이사오면서 여행은 훨씬 수월해 졌었다. 서울에서 죽전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도 한남동으로 또는 죽전으로 우리는 서로의 개를 맡기러 그 먼 거리를 왕복했었다. 집개가 갔을 때 집개가 갔다고 제일 먼저 알린 사람이 그래서 한남동 친구였다. 엉엉 울면서 그동안 우리 집개 많이 봐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집개 없는 우리는 이제 언제든 어디든 가고 싶을 때 가고 싶은 곳으로 훨훨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4일, 9일. 옆 동네 양양에 오일장이 선다. 매서운 바닷바람이 남대천을 건너 장터의 알록달록한 천막들을 사정없이 흔들어대던 어느 이른 봄날, 오일장 구경을 갔다가 그만 덜컥하고 로즈메리 화분을 사고 말았다. 풀에서 나무가 된 아이. 삼 년 생이라고 나무 장사가 자랑했는데 로즈메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나에게는 나이랑 상관없이 그저 멋지게만 보였다. 검정 비닐봉지에 담긴 화분을 두 다리로 감싸 안고 속초로 돌아오던 길, 덜컹덜컹 차가 흔들릴 때마다 출렁출렁 몸을 털며 로즈메리는 그 좁은 차 안을 신선한 향기로 가득 채웠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들떴다. 예쁜 화분에 옮겨 줄게. 화원에 가서 분갈이라는 것을 했다. 삼 년이나 키운 나무 값이 만 오천 원인데 누런 황토색 토분은 이만 오천 원이나 했다. 토분이 그렇게 비싼지 처음 알았다. 하여간 이리하여 한 철만 살다 죽는, 이를테면 바질이나 깻잎 같은 식물이 아닌 몇 십 년을 사는 나무를 집에 들이고 만 것이다. 물과 바람과 햇빛을 챙기고 병든 곳은 없는지 부족한 것은 없는지 보살피고 돌봐야 하는 생명, 왜 나무를 사기 전에는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비행기표를 산 다음부터 화분 걱정이 시작되었다. 동네 화원에 들러 화분 위탁이 가능한지 물어보기도 하고 인터넷 맘카페에 질문을 올리기도 했다. 아는 사람한테 맡기면 되지 않겠냐는 쓸데없는 댓글만 올라왔다. 아는 사람 있으면 뭐 하러 이런 걸 묻겠어요? 갈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이를 어쩐다, 동탄까지 화분을 싣고 가서 엄마에게 부탁해 볼까? 발을 동동 굴렸다. 만약 누군가가 "화분 돌봐주실 분 계세요? 그냥 가끔 물만 주면 돼요." 라거나 "저희 개 좀 봐 주실 수 있어요? 착하고 순한 아이예요," 라고 도움을 요청한다면, "저요! 저희 집 베란다에 자리 많아요!", "저요! 저 개 좋아해요!" 라고 선뜻 손을 번쩍 들 것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니 분명 다른 누군가도 그럴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지역카페에 글을 올렸어요. "겨우내 화분 맡아주실 분 찾습니다," 라고. 그랬더니 글을 올린 지 채 오 분도 안돼서 "저요!" 하고 정말 어떤 사람이 손을 번쩍 들어 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요? 화분 맡겼냐고요? 네. 로즈메리와 집에서 구운 쿠키를 들고 그분 댁에 찾아갔어요. 동해의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예쁜 집에서 꽃, 나무, 물고기, 강아지와 함께 사시는 분이 활짝 웃으며 우리를 맞아 주었다. 염치없이 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벤자민과 호접란에 대해, 푸들과 치와와에 대해, 속초의 가을과 겨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것은 사워도우 스타터이다. 아침밥으로 빵을 먹는 집이라 쌀밥만큼 빵이 중요한데 삼천리자전거 홈페이지에 있는 자전거타기 동영상을 보고 나이 서른 둘에 자전거 타기를 배운 실력으로 유튜브를 보고 독학으로 빵을 배웠다. 처음에는 시판 이스트로 빵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역시나 유튜브에서 독학으로 공부한 사워도우 스타터로 빵을 만든다. 사워도우 스타터는 살아 있는 효모이다. 시원한 냉장실 안에 있을 땐 더디게 천천히 숨을 쉬고, 냉장고에서 나와 밀가루와 물로 밥을 먹으면 “나 살아 있어!”라고 외치듯 신나게 몸을 부풀린다. 몇 달 동안 정성으로 키운데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빵을 멋지게 만들어내니 이 신통 방통한 스타터를 잘 살아 있게 하고 싶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 정독한 바로는 사워도우 스타터도 겨울잠을 재울 수 있다고 했다. 다람쥐, 뱀, 곰이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나 살아 있어!”라고 외칠 때 병째 얼리라고 하고, 누군가는 “나 살아 있어!”라고 외칠 때 종이에 얇게 펴서 바짝 말리라고 조언했다. 나는 두 가지 방법 모두 해 보려고 한다. 얼리기, 말리기. 우리가 따뜻한 남국에서 겨울을 보내는 동안 잘 얼어 있다가 혹은 잘 말라 있다가 우리가 집에 돌아와 흔들어 깨우면 "잘 갔다 왔어? 나도 잘 있었어."라고 말해 주기를.


설악의 가을.


폐교한 경동대학교 속초캠퍼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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