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강원도 속초
겨울은 태국에서 석 달, 몰디브에서 반 달, 스리랑카에서 한 달을 보냈다. 마지막에 묵은 곳은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북쪽으로 사십 킬로미터 떨어진 네곰보였다. 국제선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스리랑카 유일의 공항이 근처였고 집에 가져갈 홍차도 잔뜩 살 요량으로 관광객 많고 홍차 가게 많은 그곳을 마지막 도시로 골랐다. 홍차를 샀고, 해 질 녘이면 바다에 나가 거친 파도에 몸을 던지는 스리랑카 사람들을 구경했고, 관광객들 입맛에 맞게 변형된 스리랑카 음식도 먹었다. 비행기를 타기 몇 시간 전에는 숙소 근처의 이발소에 들러 남편의 머리를 깎았다. 태국 빠이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은 지 두 달여만, 이번 여행을 통틀어 두 번째였으니 특별한 행사였다. 이발소는 마을의 중심 역할을 하는 세인트 실베스터 성당 맞은편에 있었고, 몇 시에 문을 여냐고 전날 물었을 때 오전 열 시라고 대답했다. 열 시 너머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발소의 문은 닫혀 있었다. 성당 앞 그늘에 차를 세워 놓고 손님을 기다리던 뚝뚝 운전수가 무료한 기다림을 달래며 참견하길, 십오 분만 있으면 이발소 직원들이 올 테니 그늘에 들어와 기다리라 했다. 십오 분이 지났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삼십 분이 지났을 무렵 오토바이를 타고 온 이십 대 청년 둘이 문 닫힌 이발소 앞에 서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우리처럼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하이, 너희 중 누가 머리 자를 거야? 있잖니, 우린 삼십 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게다가 머리 자르자마자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야 해. 우리가 먼저 머리 잘라도 돼지?" 청년들은 이발사가 셋이나 있으니 걱정 말라면서도 자기네들은 미리 예약을 했다는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이발소의 열쇠를 쥔 주인 이발사가 도착하기까지 이십 분이 더 걸렸다. 이발사 셋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미안함과 안도감에 끼륵끼륵 웃으며 이발소 안으로 들어갔고 각자 하나씩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남편의 머리는 주인 이발사가 맡았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거울 속 나를 향해 머리를 어떻게 자르겠냐고 물었다. 남편이 아닌 나에게 남편의 머리에 대해 묻는 것은 서울이나 속초나 네곰보나 똑같았다. 위 아 더 월드. "스리랑카 최신 유행 스따일로 잘라 줘요. 선상님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그는 몹시 기뻐하는 듯 보였고 남편의 머리는 그동안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출중한 모양으로 완성되었다. "십 년은 젊어 보이죠?" "네, 게다가 머리통이 절반쯤 작아졌어요. 아주 훌륭해요." 가격은 오백 루피, 우리 돈으로 삼천 원. 머리를 자르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홍차를 가까스로 배낭 속에 욱여넣었고 평소보다 몇 킬로그램은 늘어난 배낭을 렌터카에 겨우 싣고는 공항으로 출발했다. 렌터카 반납은 너무나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하여 지난 한 달을 우리와 함께한 그 작고 빌빌한 차와의 작별 인사는커녕 어쩐지 차 안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두고 내린 것만 같은 석연찮은 기분이 들게 했다. 우리는 체크인 카운터에 두 번째로 줄을 서 짐가방을 부쳤고 출국 심사대의 공무원과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은 후 면세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늘 느끼는 거지만 공항이란 공간은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면세구역의 그 반질반질한 복도를 미끄러지듯 걷거나, 진열대에 빼곡히 정리된 외국산 초콜릿을 구경하거나, 화장품 매장에서 풍겨 나오는 진한 향수 냄새를 맡다 보면, 공항 밖 세상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지고는 한다. 검은 샌들을 뽀얗게 만들며 발가락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던 모래,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코를 찌르던 어시장의 생선 비린내, 스리랑카 어디에서도 피할 수 없었던 광폭한 버스의 지독한 매연, 가느다란 다리를 절며 다가와 손을 벌리던 늙은 걸인의 이글거리는 눈빛 따위가 죄다 아련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비행기라는 탈것은 또 얼마나 기이한지, 턱 밑에 차려 놓은 밥을 받아먹고 컴컴한 기내에 앉아 거대한 모니터로 최신 영화 세 편을 보았더니 어느새 우리는 인천 공항에 도착해 있었고, 홍차로 미어터질 것 같은 우리의 배낭은 화장실에 들를 시간도 없이 솟아올라 수하물 벨트 위로 굴러 떨어졌다.
인천에서 동탄으로 갔다. 아픈 아빠와 병수발에 팍삭 늙어버린 엄마와 그 둘을 가까이에서 보느라 지친 언니를 만났다. 여행 내내 변비에 걸린 똥개 마냥 쫓기는 기분이 별안간 엄습하고는 했는데 그 불안에서 가장 먼저 해방되고 싶었던 것 같다. 단양에 가서는 시아버지 산소에 제초제를 뿌렸고 단양엄마와 함께 봄동을 무치고 냉잇국을 끓여 먹었다. 맡겨 놓은 로즈메리를 찾았고, 냉동실에 얼려 두었던 사워도우 스타터를 냉장실로 옮겼다. 식탁에 앉아 단양에서 얻어 온 땅콩 껍질을 까는데 우리가 다녀온 지난 넉 달 동안의 여행이, 불과 열흘 전의 네곰보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여행이라는 것은 일상과 전혀 다른 선상에 있어서, 삶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채 다른 범주에 속해 있어서, 열흘 전의 스리랑카가 우리가 했던 여러 여행 중 하나로, 친구와 함께 갔던 이르쿠츠크와 스키를 타러 갔던 불가리아와 비를 쫄딱 맞고 우울했던 오스트리아 등과 함께 그저 옛날 옛적 언젠가의 여행 중 하나로 아득히 기억되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과 같은 옷을 걸치고 작은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땅콩 껍질을 까는 그 순간이, 이렇게 말하면 좀 우습지만, 너무나 진짜의 삶처럼 느껴져서 이럴 바에야 그 많은 돈을 들이고 그렇게 오랫동안 여행할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십 년 전 여행도 열흘 전 여행만큼 생생하지만 반대로 열흘 전 여행이 십 년 전 여행만큼이나 아득하니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