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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Aug 15. 2020

동명동집_3층의 블랙 코미디.

The Other Side.

동명동집 3층은 작년 10월 임씨 아저씨가 이사를 나간 이후 쭉 비어 있었다. 임씨 아저씨는 아내와 함께 살았던 그 집에서 도저히 더는 살 수가 없다며, 죽은 아내 생각에 괴로워 살 수가 없다며 이사를 나가도 되겠냐고 우리에게 물어왔다. 우리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하시라 대답했다. 계약 기간이 일 년 가까이 남아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람이 살고 볼 일이었다. 그이가 나가고 겨우내 비어있던 3층을 수리하기 시작한 게 3월의 일로 공사는 6월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돈이 많다면야 일 잘하는 업체에 맡겨 일주일이면 끝낼 일이었지만 하여간 그리되었고, 그 사이 우리는 강릉으로 이사를 했다. 어느 주말, 우리는 집에서 청소도구를 잔뜩 챙겨 동명동집에 갔다. 바닥을 쓸고 걸레질을 하고 창문을 창틀에서 떼어내 임 씨가 붙여놓은 테이프를 뜯어냈고, 입고 간 치마를 가슴께까지 끌어올리고 욕실에 들어가 물청소를 했다. 공사 중에 나온 쓰레기와 임씨가 남기고 간 쓰레기는 인부를 불러 치웠다. 말끔해진 집안을 둘러보고는 다이소에서 이천 원짜리 실내화 두 짝을 사다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그러고 나서 속초 교차로에 빈 방이 있다는 광고를 냈는데, 집을 보러 오겠다고 했다가 연락이 없는 사람, 보증금이 없다며 월세만 내고 살겠다는 사람, 단기로 몇 달만 살아도 되겠냐는 사람 등을 거쳐 오늘의 주인공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전화 목소리는 정말이지 이상했다. 그녀의 유아적이고 느린 말투와 과한 웃음은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여어보오세여어, 아하하하하, 그러시구나아아아아, 아아아아 그러시구나아아아... 누가 거기에 살려고 그러냐 물으니 부모에게서 독립해 처음으로 혼자 살 계획이라고 하기에, 낡고 오래된 집인데 여자 혼자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괜찮다며 대개 오래된 집이 공간이 더 넓어 그 점이 좋더라고 대답했다. 생활정보지를 통해 세입자를 구하거나 집을 구하면 양쪽 모두 부동산 중개 수수료를 아낄 수 있어 좋다. 국토부에서 배포하는 표준 임차 계약서를 내려받거나 문구점에서 몇백 원에 계약서 양식을 살 수도 있다. 임대인과 임차인이 만나 거기에 도장 몇 군데 찍으면 그것으로 계약 성립이다. 동명동집 3층처럼 세가 싼 집을 구하는 사람에게 있어 부동산 중개료는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일 것이기에, 우리는 인근 부동산에 집을 내놓으면서 속초 교차로에도 광고를 냈던 것이다. 하지만 강릉에서 속초까지는 자동차로 꼬박 한 시간이 걸리고 단지 집을 보여주기 위해 그 거리를 왕복하는 것은 여러모로 비효율적이라, 부동산 중개 수수료는 우리가 다 낼 테니 가까운 부동산 아무 데나 가서 동명동집 3층을 보여달라 해라, 어느 부동산으로 갈지 알려주면 그곳에 미리 전화해 놓으마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가 고른 G부동산이 그녀에게 집을 보여주었다.


"지금 집 봤는데요, 아주 마음에 든대요. 자기가 페인트칠도 하고 예쁘게 꾸민다네요. 보증금을 지금 내겠다는데, 네네, 계약금이 아니라 보증금 전부 다요. 저기 잠깐만요... 응? 월세 깎아달라고? 그건 안돼요, 아가씨. 이 가격이면 거저야 거저. 내가 이 집 얼마나 많이 보여줬는지 알아요? 다 마음에 든다는데 내가 안 줬어. 저기 롯데 캐슬 있지? 거기 공사장 인부들이 몇 달만 달라는 것도 내가 안 줬잖아. 단기로 몇 달 우리 그런 건 안 하거든. 이 주변에 이렇게 위치 좋은 곳에 이만한 집 없어요. 진짜라니까... 아이고 미안해요. 하여간 사무실에 가서 계약서 쓰면서 전화 다시 할게요. 보증금 받을 계좌 번호 문자로 찍어주세요. 네네."


마치 우리의 대리인인 양 집 자랑을 늘어놓으며 놀라운 말재주를 선보인 여사장이 문자로 계약서를 보내왔다. 나는 거기에 수도요금과 관련된 짤막한 특약사항을 덧붙였고, 그것으로 계약이 성사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세입자가 보증금 전액을 현금으로 준비해 온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보증금 역시 큰돈이 아닌지라 현금을 받은 부동산이 대신 우리에게 입금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임씨 아저씨가 나간 지 어언 열 달. 그이가 살던 3층은 이제 다음 주면 어린아이 같은 말투의 1987년생 남다른씨의 집이 될 것이었다.




그녀가 이사 오기 하루 전인 월요일은 마침 남편의 쉬는 날이었다. 우리는 부동산이 가지고 있는 계약서를 받고 3층 열쇠도 맡길 겸, 새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집에 무슨 문제는 없는지 확인도 할 겸 속초에 가기로 했다. 집에 대해 설명할 것이 있어 혹시 시간이 되면 월요일에 부동산으로 올 수 있나 물어보려고 남다른에게 전화를 걸었었는데 받질 않았다. 이틀 동안 연락이 없던 그녀에게서 월요일 아침 문자가 왔다. 속초에 온다고 들었는데 언제쯤 오냐고.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안녕하세요. 그래서 토요일에 전화드렸었는데 연락이 없어 이사 준비로 바쁘신가 했어요. 부동산에 현관 열쇠 맡겨 놓을게요. 점심 지나 도착할 거 같은데 시간 괜찮으시면 뵙고 싶어요."


그녀의 대답은 온다는 건지 안 온다는 건지 애매했다.


"네, 그때쯤 뵙는 걸로 알게요. 근데 죄송하지만 제가 시간을 못 맞출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입주는 오늘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와서 청소도 하고 치수도 재고 그러느라 미리 와 있으려고요."


와서? 벌써 가 있다는 소리인가? 하여간 오늘부터 살겠다면 꼭 만나야 할 일이었다. 계약서 날짜 고치고 도장 찍고 해야 하니까. 우리는 약속 시간 보다 일찍 도착해 동명동집에 먼저 들렀다. 마당에 쓰레기라도 떨어져 있으면 미리 치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 보니 3층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은 없었지만 집안은 청소를 하다 말고 급히 자리를 비웠는지 빗자루와 손걸레 등이 창틀과 방바닥 여저저기에 널려 있는 상태였다.


G부동산 여사장은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 아저씨가 그러는데 알고 보니 그 아가씨가 시청 예산위 간사라잖아요. 무슨 환경운동도 한다는데 하여간 신분 확실한 사람이라서 어제 물어보길래 내가 비밀번호 알려줬어요."


인구 팔만의 소도시 속초에서 일이란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약속시간이 지났는데도 남다른이 나타나지 않자 문자를 보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곧장 남다른에게서 전화가 왔다.


"거의 다 왔는데요, 제가 급하게 나오느라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암튼 빨리 가봐야할 것 같아요."


작고 마른 체구의 남다른이 씩씩거리며 부동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씨, 지갑을 잃어버려서... 아이씨, 급하게 오느라고..."


살 게 있어 다이소에 갔다가 거기서 급하게 오느라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계산대에 흘린 것 같다며 가능한 빨리 다이소에 가봐야겠다는 그녀는 자리에 앉지도 못했다. 지갑에는 오늘 우리에게 줄 월세가 현금으로 들어 있었다고 했다. 아이씨로 시작한 첫 만남이 몹시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초조하게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의 모습에 부동산 사장 내외와 우리 두 사람 모두는 서둘러 계약서를 고치고 도장을 찍었다. 설명할 것이 있으니 가능한 짧게 하겠다는 내 말에 그녀가 물었다.


"뭐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그냥 전화로 하시면 안 돼요? 저 빨리 거기 가봐야 되거든요!"


3층의 전기는 2층 옥탑과 연결되어 있다. 2층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가 전기 요금 복지 할인을 받고 있어 전기 요금이 두 달에 한 번 천 원이 나올까 말까다. 한전에 알아본 바로는 할인 혜택을 다 챙기지 못할 정도로 전기 사용량이 적다고 한다. 할인 요금으로 전기를 사용하게 될 테니 전기 요금이 청구되면 3층에서 전부 내는 것이 계산상 옳다. 보일러는 새로 달았다. 처음 가동할 때 에어를 빼 줘야 한다고 하더라. 속초의 귀뚜라미에서 했고 살 사람이 들어오면 기사가 와서 점검을 해 주겠다고 했으니 준비가 되면 우리에게 연락해라, 귀뚜라미에 전화해 놓으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어보오세여어어어, 아하하하 그러시구나아아아아의 목소리는 어디 가고, 아이씨와 짜증 섞인 속사포 말투에 놀란 나는, 급하다니 어서 가보라고, 전화로 얘기하자고 그녀의 손에 현관 열쇠를 건넸다. 그녀가 황급히 떠난 문 쪽을 바라보며 동그란 탁자에 둘러앉은 우리 네 사람은 한동안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가 사라지길 기다린 다음에야 요즘 동명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전기 요금에 대해서는 강릉으로 오는 차 안에서 남다른에게 설명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돈과 관련된 문제는 가능한 빨리 알리는 게 상책으로 계약 전에 말한다는 걸 그만 내가 깜빡하고 말았다. 나중에 남다른으로부터 사과 문자도 받았다. 경황이 없어 결례를 저질렀다, 월세 받을 계좌번호를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우리의 계좌번호야 임차 계약서에 잘 보이게 적혀 있지만, 어려운 일이 아니니 문자로 알려주었다. 보일러 문제는 설치기사의 연락처를 화요일 아침 일찍 알려주었는데, 보일러 쓰는데 문제는 없나 걱정이 돼서 그날 저녁 문자를 보냈으나 답이 없었다.


"짜증 났을 거야. 페인트칠하고 집도 꾸미고 예쁘게 해 놓고 살겠다고 잔뜩 희망에 부풀어 있었을 텐데, 왜 막상 이사하고 보니 집이 생각했던 거랑 달리 더 낡고 더 후지고 그런 경우 우리도 많이 있었잖아. 비슷하겠지. 창틀 먼지 닦다가 힘들었을 거고, 뭐 좀 해 보려니 뭐이가 없어요. 그럼 어째, 다이소로 달려가야지. 여기까지만 해도 짜증이 나는데 거기에 지갑까지 잃어버렸으니. 어우."




다음날 오후 남다른에게서 문자가 왔다. 보일러 기사의 연락처를 다시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니 또다시 알려주었는데 곧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시냐로 평범하게 시작한 대화는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계단이 미끄러워 넘어졌는데 넘어지면서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 액정이 휘어졌다는 것이다. 보일러도 안 되고 세면대의 물도 제대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기요, 세를 놓으실 거면 기본적인 것은 확인 좀 하고 세를 놓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 기본적인 것은 확인하고 세를 놓으셔야죠!!"


지물포 사장이 장판은 갈 필요가 없다길래 도배만 새로 했다. 전등은 LED 등으로 갈았고, 보일러실 입구와 계단에 센서 등도 달았다. 전기 스위치와 콘센트는 그 집과 어울리지 않는 신식으로 교체했고, 싱크대, 싱크대 벽 수전, 보일러도 새것으로 갈았다. 변기도 갈았고, 세면대는 수리했으며, 욕실 천장은 리빙보드인지 뭔지로 새로 했다. 이번에 손보지 않는 것은 샷시와 문짝뿐이다. 3층의 세는 보증금 이백만 원에 월세 이십오만 원. aka. 200/25. 부동산들마다 보증금이든 세든 더 올리라 조언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당황하면 내가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심장이 빨리 뛰고 손발이 저리고 목소리가 벌벌 떨린다. 따다다다 쏟아내는 그녀의 말에, 보일러 기사 불렀냐고, 내 말 좀 들어보라고 하는데도 멈추지 않는 그녀의 말과 한심하다는 듯 비아냥 조의 그녀의 말투에 나는 나의 경계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욕실 청소는 내가 했다. 내가 청소했을 때 세면대는 아무 문제 없었다. 새 보일러는 어쩔 수 없이 한 번은 에어를 빼야 한다. 이건 새 보일러뿐만 아니라 한동안 보일러를 사용하지 않은 경우에도 그렇다. 그 계단에서 넘어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애를 가지고 있던 3층 아주머니 역시 그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갔다. 네가 부주의했을 가능성은 없나? 그러니 기본적인 것은 확인하고 어쩌고 하는 식으로 말하지 말아라. 왜 어디가 고장 났으니 고쳐달라고 말하지 않고, 나에게 이런 훈계를 늘어놓는가? 안 되면 고치면 될 일이다. 왜 싸움을 걸듯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가?


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벌벌 떠느라 그러지 못하고 흔들리는 목소리로 고작 이딴 소리나 하고 있었다.


"저, 저기, 트래펑 부어 보셨어요?"


남다른은 한심하다는 듯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허, 저기요, 세를 놓으실 거면 기본적인 것은 확인 좀 하고 놓으셔야죠?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들으니 확실히 처음의 충격보다는 덜했고, 그러자 월세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치사하지만 그것을 환기시킬 수밖에 없다. 나를 질책하기 전에 너의 의무부터 다 하라는 의미였다. 그랬더니 계단에서 넘어진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닌가.


"남다른씨가 지갑 잃어버리고 계단에서 넘어진 것은 안 됐지만, 월세를 입금하기로 한 것은 월요일이고, 넘어진 건 화요일이잖아요. 오늘은 수요일이고요."




"아무리 지갑을 잃어버려도 그렇지 그때 그렇게 행동하는 거 보고 알아봤어요. 지가 찾는 집은 월세 팔십만 원이라고 말해주지 그랬어요? 몰랐어요? 하긴 모르겠네. 암튼 그 사람이 그 집에서 살기 싫어서 그러나 봐요. 그러니까요. 안 그럼 왜 그렇게 말하겠어요. 아주 이상한 사람이에요.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보증금이랑 월세를 현금으로 들고 다녀요? 비도 오는데 우리 아저씨가 그거 넣느라고 은행까지 갔다 왔잖아요. 뭐가 문제가 있는지 은행 거래도 못하는 모양인데..."

"그거야 뭐 각자 사정이 있는 거니까 그건 저희랑 상관없어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 살기 싫어 그러냐 물어봐요. 나가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말고요. 환경운동인지 뭔지 하면서 통화는 죄다 녹음하고 아마 그러는 거 같아요. 내가 너 때문에 부동산 중개 수수료 이십만 원 썼는데, 그거 네가 내면 나가게 해 주마하고요. 참, 삼 일 치 월세 제하는 거 알고 있죠?"


벌벌 떨면서 직접 전화하느니 그러지 말고 부동산에 맡기라는 남편의 말에 그러기로 했다. 남다른에게 전화가 두 차례 더 왔지만 받지 않았다. 경험 많은 부동산이 그녀가 원하는 게 뭔지,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지 알아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녀 역시 우리보다 부동산에게 말하는 게 더 편할 것이다. 앞으로 남다른을 상대하는 일은 남편이 맡기로 했다. 이런 일에 있어 그는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대응기제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놈의 벌렁-심장 때문에 뭔 말을 못 한다. 그리고는 해야 할 말을 못 했다고 나중에 두고두고 가슴을 치고 이불을 찬다. 여러모로 남편이 적임자다.


퇴근한 남편이 남다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저희 집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러시는 거면, 이사 나가셔도 됩니다. 보증금 돌려드릴게요. 마음에 안 드는 집에 살면서 마음고생하느니 잘 생각해 보세요. 월세 입금할 계좌번호 또다시 알려달라고 저희 집사람한테 문자를 보내셨다고 들었는데, 계속 사시겠다면 그때 입금하시면 됩니다. 네, 보증금 돌려드릴게요. 어떻게 하고 싶으신지 잘 생각해 보시고 내일 연락 주십시오."


다음날, 남다른은 3층에서 계속 살겠다면서, 본인이 말을 함부로 한 것에 대해 내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이로써 모든 것이 정말로, 다, 잘, 해결된 줄 알았다.




남편은 요즘 토요일에 출근하고 주 중에 하루 쉰다. 지난주 월요일은 남편의 노는 날이었다. 우리는 늦은 아침을 먹고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휴일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내게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여기 속초에요. 저는 남다른 엄마인데요,"


불길했다.


"아니! 이 주 전부터 안방 콘센트가 안 된다는데 고쳐주지도 않고 말이에요! 까쓰도 안 되는데 그것은 왜 안 고쳐줘요? 네? 집주인이면 그렇게 세입자한테 함부로 해도 되는 거예요? 말해 보세요? 내 말이 틀려요? 네?"


전기와 가스가 어떻게 안 된다는 건지, 왜 진작 알려주지 않고 이제야 연락했는지 물었는데 대화가 되지 않았다.


"집주인이면 다예요? 왜 세입자한테 함부로 대해요? 우리 애가 계단에서 미끄러졌는데, 병원도 갔다 왔단 말이에요! 전기도 안 되고, 까쓰도 안 되고 말이야! 세면대 물도 안 내려간다는데 그게 뭐예요? 전기는 다른 집하고 나눠 쓴다면서요? 그리고 우리 애 보고 나가라고 했다는데, 집주인이면 그렇게 세입자를 막 공격해도 되는 거예요! 세입자 내보내려면 법적으로 이사비며 뭐며 다 물어줘야 하는 거 알아요 몰라요! 네? 법으로 그런 거 알아요 몰라요! 왜 대답을 안 해요! 알아요 몰라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기 요금이야 알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우리가 언제 나가라고 했나. 집이 마음에 안 들어 이사 나가고 싶으면 그러라고 했지. 어머님이 따님한테 어떻게 전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전기와 가스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지 본인이 직접 전화를 걸었으면 좋으련만, 남다른의 엄마는 계속 소리만 질렀다.


"아니! 그럼 엄마가 걸지 누가 걸어요? 옆집 여자가 걸어요? 집주인이면 그렇게 세입자한테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거예요! 네? 내 말이 틀려요?"


그녀의 윽박지름과 소리 지름은 십 분 넘게 이어졌고,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전화기를 남편에게 넘겼다. 전화를 넘겨받고도 남편이 몇 마디 하지도 못할 만큼 그녀는 말을 끊지 않았고, 말을 듣지도 않았다. 참다못한 남편이 큰소리로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는데, 전화기 밖으로 넘쳐나오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녀 역시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집주인-함부로를 계속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뭘 어떻게 해드리면 됩니까? 그걸 말씀하세요! 전기요? 네, 사람을 보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라 하겠습니다. 세면대요? 네, 그거 뚫어 드릴게요. 가스요? 네, 가스 업체 어디서 안 된다고 하던가요? 모르신다고요? 남다른씨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됐습니까?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평화로운 휴일 아침 그녀의 전화는, 남의 집에 난데없이 쳐들어 와 세간 살림을 부수며 깽판을 치고 행패를 부리는 동네 건달의 그것이었다. 공포와 불안, 불쾌가 뒤엉킨 무언가.




하루가 다 지나도록 남다른에게서 답이 없었다. 남편은 바빴고, 가스든 세면대든 사람을 보내기 전에 남다른으로부터 답을 들어야 했다. 용기를 내 전화를 걸었다. 그랬다. 용기가 필요했다. 통화 괜찮냐 물으니 남다른은 한껏 포장한 목소리(나 화났다, 혹은 너 재수 없다)로 대답했다. 연기 못하는 이십대의 여자 배우가 세상사에 닳고 닳은 오십대의 술집 마담 역할을 할 때 낼 법한 그런 말투였다. 네에. 네를 올리고 에를 질질 끄는. 나는 자기 필요에 따라 목소리를 꾸미고 바꾸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데 이것은 순전히 경험에서 온 개인적 통계 비슷한 것에 바탕한다. 그 네에, 네를 올리고 에를 질질 끄는 그 대답을 들었을 때, 나는 이제 더 이상 쫄지 않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계속 사실 건지, 이사를 나가고 싶으신 건지 알고 싶어 전화드렸어요."

"왜요? 제가 계속 살겠다고 하면 고쳐주고, 아니면 안 고쳐주려고요?"

"세면대 뚫는 사람, 가스 배관 설치하는 사람, 참, 창문 말씀도 하셨다는데, 그거 남편에게 이야기 들으셨죠? 옆집 복숭아나무요. 하여간 원한다면 그것도 사람 보내 열어드릴게요. 그런데 일하는 사람이 다 다르잖아요? 가스는 가스업체고, 세면대는 욕실업체고 등등. 거기서 계속 사시겠다면, 남다른씨 스케줄에 맞춰야 하니까요. 한꺼번에 가면 좋겠지만 그게 저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요."

"제가 이사 나가겠다고 하면 계약 파기해 주실 건가요?"

"계약 파기요? 그게 무슨 말씀인지... 남다른씨 말씀은 이사 나가고 싶다는 건가요?"

"그러니까요, 계약 파기해 주겠냐고요?"

"그럴 때 쓰는 말이 계약 파기는 아니지만, 남다른씨가 원하는 게 이사 나가는 거라면, 그렇게 하세요. 보증금 돌려드릴게요."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녀는 우리가 순순히, 옙, 이사 가십쇼! 보증금 여기 있습죠!라고 나올지 몰랐던 것 같다. 예상과 다른 상대의 반응에 당황했는지 억지 공격이 시작되었다.


"저기요, 제가 이 주 동안 전기도 안 되고 가스도 안 되고 얼마나 불편했는지 아세요? 세면대 물도 안 내려가고. 세를 놓을 거면 기본적인 것은 확인하고 놓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 주 동안 전기와 가스가 안 됐는데 왜 어제야 연락했나 물으니, 대답은 안 하고 이 주 동안 자기가 당한 고통을 어떻게 보상할 거냐고 소리쳤다. 어제 남다른씨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오늘 전기기사가 가지 않았냐. 어디가 안 되면 전화를 하면 될 것을 왜 연락을 안 했냐 다시 물으니, 남자한테 이 주 전에 말했단다. 부동산에도 가스랑 전기가 안 된다고 말했단다. 그 남자가 누구냐, 내 남편에게 말했다는 거냐? 부동산으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고 전화하마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연락처에서 부동산 전화번호를 찾고 있는데 곧바로 남다른에게 전화가 왔다.


"저기요!! 집주인이면 다예요!! 왜 자기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요!! 집주인이면 이렇게 사람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거예요!!!"


두 모녀가 마주 앉아 '집주인이면 다냐'를 그들 작전의 캐치프레이즈로 삼고 전략을 짜는 모습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통화 다 끝난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었다니 미안해요, 남다른씨가 더 할말이 있는지 몰랐어요. 오해하지 말아요. 미안해요."

"저기요!! 그쪽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고, 그쪽 나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지만, 왜 자꾸 남다른씨 남다른씨 그렇게 불러요? 집주인이면 세입자를 그렇게 막 함부로 불러도 되는 거예요? 네??"


누구씨의 -씨는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거나 이르는 의존 명사다. 속초 지역 신문에 기사도 쓴다고 들었는데...


"그럼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남다른씨?"


내 이름이랑 내 나이는 계약서를 보면 큰 글씨로 잘 보이게 쓰여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집주인-다냐-함부로는 그 뒤로 계속되었다. 레퍼토리는 똑같았다. 전기-가스-세면대, 창문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 그러니까, 우리가 첫 번째로 그녀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을 때, 그 기회를 거절하고, 동명동집 3층에서 계속 살기로 결정함으로써 그녀 스스로 무마시킨 그 모든 문제들을 끄집어내 들먹였다. 알았다. 일단 알았으니, 부동산과 통화 좀 하게 전화 좀 끊자, 무슨 이유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에게 전달하지 않았는지 알아야겠다. 그건 부동산의 잘못이다. 내가 바로 전화를 거마라고.


전화를 끊고 다시 부동산의 연락처를 찾고 있는데 또다시 남다른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한 이유는, 생각해 보니 부동산에 가스 이야기는 하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다. 전기 이야기는 했는데, 뭘 그런 걸 가지고 연락을 했냐고 그러길래, 무서워서 가스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면서, 이 또한 집주인과 부동산이 악독해서, 세입자를 함부로 대해서라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사실 이것을 그녀의 '주장'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정제된 표현이다. 그녀는 그저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고, 나의 말은 전혀 듣지 않았다.


"제가 이 주 동안 전기도 못 쓰고 가스도 못 쓰고 세면대도 못 쓰면서 당한 고통은 어떻게 보상해주실 건데요! 네? 집주인이면 그렇게 사람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거예요!!!"


하여간 이쯤 되면 남다른은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대화를 통해 이해받고 이해시킬 수 없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사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피해망상이었다. 그것이 부모로부터 학습된 것이든 뭐든 간에 그녀 머릿속에 프로그램된 고정관념이, 즉, 집주인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뿌리 깊이 고착된 그 잘못된 이해와 해석이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을 적대적인 것으로 뒤바꿔 놓았다. 그녀는 계약일에 지갑을 잃어버린 것을 두고도 우리를 탓했는데, 우리가 약속을 급하게 잡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남다른씨 편한 시간에 저희가 맞추겠습니다."라는 우리의 말을, "당장 나와!"로 받아들인 것이 망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면 이것은 일종의 패배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었다. 핍박받는 세입자 입장에서 표독스럽고 욕심 많은 집주인에게 말해 봤자 어차피 별 소용도 없을 테니까 아예 말을 꺼내지도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지금 살고 있는 강릉집으로 이사하고 나도 힘들었다. 전등은 수명을 다해 간신히 침침한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결국 안정기 네 개가 하나씩 차례차례 나가고 말았다. 안정기는 우리가 전파사에서 사다 놓으면 아파트 관리 사무소의 전기기사가 와서 갈아주는 시스템으로, 금요일 밤에 안정기가 나가버리면 전기기사가 출근하는 월요일까지 꼼짝없이 불을 켜지 못하고 지내야 했다. 하필 재수 없게도 두 번이나 금요일 밤에 안정기가 나가는 바람에 가뜩이나 눈 나쁘고 침침한 것을 싫어하는 나는 주말 내내 부글부글 속을 끓였다. 처음으로 세탁기를 돌리려고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물이 샜다. 빨래고 자시고 일단 내버려두고 철물점으로 달려가 집에 맞는 수전을 찾아야 했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전등 안정기가 그랬듯이 수전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몇 군데를 돌아다니고 나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또다시 관리사무소 기사 예약, 방문 등의 순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에어컨을 달려고 설치 기사를 불렀는데 전에 살던 사람이 마룻바닥에 박아놓은 에어컨 호수와 우리의 에어컨이 맞지 않아 설치를 할 수 없다며 그냥 돌아가기도 했다. 마룻바닥 밑 호수는 한 번 박아놓으면 어지간해서는 뽑히지 않는다며 호수에 맞는 에어컨을 새로 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호수에 맞는 에어컨을 산다는 것이 웃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거금 백오십만 원을 들여 우리집 평수에 불필요하게 큰 에어컨을 사 달았다.


이랬다고 해서 우리가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악을 쓰고 발악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것도 확인하지 않고 세를 놓았다고, 앞으로는 똑바로 살라고 훈계하지도, 세입자를 무시하는 거냐고 따져 묻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일이 하나하나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전등과 안정기는 전에 살던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제 곧 이사 나갈 집이니 어둡고 깜빡거려도 참고 버텼을 것이다. 안정기 하나에 팔천 원이고 전등 하나에 사천 원이다. 다 더하면 오만 원 정도 된다. 오만 원 아껴 아이들과 치킨 한 번 더 시켜 먹었을 지도 모른다. 동해로 이사 갔다는 그들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동해의 친정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했다. 그러니 더욱 이해가 되었다. 세탁기도 많이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수전에서 물이 새는 정도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집주인으로서도 이 집에서 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전등부터 에어컨까지 모두 그렇다. 누가 말해주지 않는 이상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아! 세입자가 이사 오기 전 예행연습 삼아 한 일주일 정도 그 집에서 살아보기가 있겠다. 그것 말고 달리 좋은 묘안은 떠오르지 않는다.


마침 남편이 돌아왔다. 전기가 안 된다고 남편에게 말했다는데 언제 말했냐 물으니 또 딴소리를 했다. 그럼 좋다, 알았으니 이제 답을 해라,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제가 이사 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계속 살겠다고 남자분한테 말씀드렸는데요?"


그런 말 한 적 없었다. 우리는 오늘 하루 종일 답을 기다렸고, 그 답을 들으러 지금까지 이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통화를 계속하고 있었단 말이다. 스피커폰으로 우리 부부가 함께 듣고 있다고 알린 다음, 남편이 언제 나한테 그런 말을 했냐고 물었더니 또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지쳤다. 진작에 지쳤지만 정말이지 더 이상은 못 해먹겠다. 그럼 계속 살겠다는 걸로 알겠다고 하니,


"저기요, 요즘 원룸 이사도 십만 원 하는 거 아시죠?"

"몰라요. 그런데요?"

"그럼 제가 이 주 동안 전기 가스 세면대 못 쓴 피해 보상해 주세요. 그럼 이사 나갈게요."

"얼마요, 십만 원 드리면 되겠어요?"

".... 아니요, 십오만 원이요. 십오만 원 주세요."


이거였다. 십오만 원 때문에 서울의 지하철 안이라는 그녀는 전화기에 대고 소리 치고 고함을 질렀다. 십오만 원이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나는 분노와 좌절감을 넘어 어떤 슬픔을 느꼈다. 이 모든 게 십오만 원이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십오만 원으로 그녀에게서 해방될 수 있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돈을 쓸 것이다.


"네, 그러세요. 십오만 원 드릴게요. 언제 나가실래요?"

"이달 월세 냈으니까 그때까지 살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맞아요. 이제 다 됐죠? 정확한 이사 날짜 정해지면 부동산 통해 연락주세요."




"며칠 전에 나한테도 걔 엄마라는 사람이 전화를 해서는 얼마나 뭐라 그랬는지 몰라요. 걔 엄마가 뭔 복지사인지 그런데, 네네, 제 전화에 저장이 되어있더라고요. 암튼, 뭐라더라? 중개 과실로 보상을 해달라나 뭐라나. 그래서 제가, 무슨 소리냐고, 교차로 보고 자기들끼리 와서 계약서만 써 준 건데 나한테 무슨 과실이 있냐고 그랬더니, 그 엄마는 그것도 모르더라고요. 자기는 몰랐대요. 그러면서도 책임을 지라는 둥. 그래서 내가, 아니 금치산자도 아니고 성인이 말이야 왜 엄마를 시켜 전화를 거냐고, 할말 있으면 본인이 하지 왜 엄마를 시키냐고 그랬더니, 그럼 엄마가 걸지 누가 거냐고 막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계약자 본인 아니면 할말 없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남다른씨는 중개 수수료도 안 냈다고, 남다른씨 몫까지 집주인이 다 냈는데, 왜 나한테 난리냐고 그랬어요. 아후, 진짜. 내가 수수료 이십만 원 받고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그 사람들 진짜 아주 나쁜 사람들이에요. 집주인이랑 부동산이랑 짜고 집에서 내쫓으려 한다는 둥 진짜 별의별 소리를 다 하더라고요.


"뭐라고요? 세상에 그렇게 말해요? 안방 전기 콘센트가 안 된다길래, 내가 남다른씨한테 이렇게 문자를 보냈어요. '콘센트는 두꺼비집 버튼 내려졌나 확인 후 문자로 알려주시면, 위험한 계단 사정과 함게 전달하겠습니다.' 이렇게요. 그랬는데, 답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 저야 당연히 다 해결이 된 줄 알았죠. 그래 놓고는 뭐요? 진짜 우끼네! 아마 저한테 전화 못 할걸요? 자기가 그랬으니 어떻게 저한테 전화를 걸겠어요?"


덧붙이자면 전기 콘센트는 정상이었다. 콘센트 커버가 새 거라 빡빡했던 모양이었다. 그냥 푹 쑤셔 꽂으면 되는 거였다.


"손해배상 좋아하네, 그거 받고 싶으면 소송하라 그러세요. 아니 그걸 왜 줘요! 그건 그래요. 그냥 빨리 해결하는 게. 그래요, 진짜 고약한 사람들이야. 하여간 나한테 전화 안 할 거 같기는 한데, 전화 오면 연락할게요. 네네. 잘했어요."




이사 나가야 하는 날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는데, 언제 이사를 가겠다는 연락이 없었다. 이사 날짜를 알려달라고 문자는 보냈는데 또 답이 없길래, 그 다음날 다시 문자를 보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보증금은 언제 돌려주시는 건가요?"


으으으응?


"이사 나가시는 날 확인하고 드릴게요."


당연하잖아.


"들리신다고요? 계약서가 아직 있기에 보증금과 이사비를 먼저 돌려받는 게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십오만 원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시 시작이다.


"집에서 짐 빼면 보증금과 이사비 드립니다. 잘 모르시겠으면 부동산에 확인해 보세요."


"그쪽도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상식 선에서 해주시죠. 월세 날짜가 12일까지니까 10일이나 11일에는 보증금을 돌려주셔야 이사를 나갈 수 있습니다. 보증금도 없이 이삿짐을 꾸리란 말씀이신가요? ㅎㅎ"


그쪽. 보증금이 뭔지도 모르는 무식쟁이가 상식 따위 운운하며 남편을 그쪽이라고 불렀다. ㅎㅎ 비웃음과 함께.


"보증금이라는 것은 임차인의 월세 등 계약상의 채무에 대한 보증으로 받는 것이니 이삿짐이 나가는 것과 동시에 돌려드립니다. 이사 전에는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법입니다. 부동산에 확인해 보세요.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의 2(보증금의 회수) 3항 임차인은 임차주택을 양수인에게 인도하지 아니하면 제2항에 따른 보증금을 받을 수 없다."


"그런 경우는 계약서 상으로 임차인의 권리가 보장되는 경우 아닌가요?"


으으으응?


"못 믿겠으면 아무 부동산이나 전문가에게 확인해 보세요."


사실 전문가를 소환할 필요도 없다.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도 답을 알게 될 것이다.




네 시간의 침묵 후,


"제가 시간이 없어서 이사를 월요일에 할지 수요일에 할지 모르겠어요. 이사하면서 연락드릴 테니 보증금이랑 이사비 십오만 원 그날 꼭 입금해 주세요."


그 사이 누구 멀쩡한 사람에게 물어본 모양이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회사에 휴가를 내야 하기 때문에 이사하시면서 연락 주시면 안 됩니다. 제가 직접 가서 집 확인 후 열쇠 등 돌려받고 보증금과 이사비 드립니다. 월요일인지 수요일인지 확실히 알려주세요."


"그럼 수요일로 해야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수요일 몇 시쯤 뵐까요?"




사흘의 침묵 후,


"지금 바빠서 수요일 저녁은 돼야 할 것 같습니다."


"저녁 몇 시에 하실 건지 시간 알려주세요."




하루 뒤,


"답이 없어 다시 보냅니다. 정확한 시간 알려주세요. 이삿짐 차 예약하셨을 거 아닙니까? 몇 시에 불렀나요? 정확한 시간을 알아야 저희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날짜 안에만 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와서 보시는 건 저녁 이후에 하시면 됩니다. 그쪽이 저희 사정에 못 맞추듯 저도 그쪽 사정에 못 맞춥니다. 비가 천재지변급으로 오는데 제가 그쪽 사정에 어떻게 맞춥니까."


알았다. 피해망상이 맞았다. 상대의 모든 행동이 자기에게 해가 되고, 자신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강릉과 속초는 날이 갰다. 약속한 날인 다음날도 햇님이 방실.


"왜 이러시죠? 남다른씨 사정과 시간에 맞추겠다고 몇 시에 하실 건지 물었습니다. 저희가 저희 시간에 맞추라고 했나요? 남다른씨의 시간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남다른씨 말대로라면, 저희가 몇 시에 가든 갈 때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집 확인하고 공과금 정산해야 보증금 돌려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못 믿겠으면 아무 부동산에게나 물어보십시오, 시청에도 담당 부서가 있습니다."


"지난번에 굳이 열쇠 주러 온다 그럴 때도 그러더니 계속 그러시네요. 문의는 제가 알아서 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구요."


이럴 수가! 우리는 도대체 그동안 어떤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단 말인가! 열쇠는 부동산에 맡겨 두겠다고 했고, 시간이 나면 보자 했는데, 자기가 이사하겠다던 날보다 하루 일찍 들어가겠다고 해서, 그러면 계약서를 반드시 고쳐야 하니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것을, 저런 식으로 기억을 뒤틀고 배배 꼬아 독기를 품고 있는 것이다. 대한항공 세 모녀의 폭력과 발악을 뉴스에서 보았을 때, 그들을 감옥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 병원에 보내 병을 치료해 줘야 한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아픈 사람은 병을 낫게 해야 한다. 남다른도 그런가? 얼마 후,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내일 오후 한 시에 이사를 시작한다는 문자가 왔다.




D-day,


지난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잊고 오전에 걸려온 남다른의 전화를 받았다가 또 언성이 높아졌다. 이번엔 기름값 이슈. 보일러 기름을 십오만 원치 넣었다면서 십만 원을 돌려달라길래, 부동산의 조언대로 영수증과 잔량 확인서를 가져오면 그 잔량만큼 돈으로 돌려주마 대답했었다. 기름값은 보통 이사 나가는 사람과 이사 들어오는 사람이 서로 합의하에 주고받는데, 그 기름이 얼마치인지 알 수가 없으니 기름 넣은 곳에서 잔량 확인서를 떼어주는 모양이었다. 합당한 방법이다. 알겠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잔량 확인서를 받을 수가 없다며 기름값 십만 원을 내놓으라고 떼를 썼다. 기름을 퍼 가기도 한다고 하는데 그럼 그렇게 해라, 네가 덜 받을 이유도 없지만 내가 더 줄 이유도 없다. 내가 그 기름을 쓸 게 아닌 건 너도 알지 않냐, 이사 올 사람에게 받아야 하는데 확인서 없이 무슨 근거로 돈을 받는단 말이냐라고 했더니, 어쩜 지독하게 십 원 한 장도 손해를 안 보려 하냐고, 또 그 '집주인이면 다냐', '세면대-전기-가스'를 들먹이며 악을 썼다. 십 원 한 장이라는 말에 나는 속된 말로 빡이 돌고 말았고 (부동산 중개 수수료 이십만 원과 억지 주장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남다른에게 주기로 한 십오만 원의 합은 십 원보다 크다) 남편이 전화기를 뺏어갔다.


"그 기름 얼마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십오만 원치 넣으셨다니 그거 믿고 절반 칠만오천 원 드리겠습니다."

"그럼 다 해서 삼십만 원 주세요! 제가 손해를 얼마나 많이 봤는지 아세요? 삼십만 원 주세요!"


엥? 십오만 원 외에 기름값으로 내놓으라던 금액은 십만 원이었다. 15 더하기 10은 25. 개그인가?


"칠만오천 원 받으실지 말지 생각해 보신 다음에, 전화하지 마시고 문자로 알려주세요. 끊습니다."




한 시부터 이사한다며 세 시에 만나자고 해 놓고는, 막 출발하려는데 문자가 왔다.


"이사 미뤘습니다. 이사비 삼십만원, 기름값, 월세 이십오만원 돌려주세요."


비정상이다. 이 사람은 정말이지 비정상이다. 나는 누군가 정상적인 사람과 대화하고 싶었다. 관공서 사람이라면 이런 비정상인 사람들을 많이 다뤄봤을 것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속초 시청에 전화를 걸었다.


"어휴, 어휴, 네, 네, 세상에! 그래서 그걸 주기로 하셨어요? 에고. 저... 제가 비록 공무원이지만 그냥 일반인으로서 말씀드리면요, 그 사람 정말 이상한 사람 같아요. 그러지 마시고, 주택 임대차 분쟁 조정위원회라는 곳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직접 상대하지 마시고 거기 통해 알아보세요. 속초에는 없고 서울에 있는데 132번으로 전화하면 전화 상담도 가능해요. 네네. 도움이 되지 못해 정말 미안해요.


"저 좀 전에 통화했던 속초 시청 건축과 아무개인데요, 알아보니 속초에 출장소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전화드렸어요. 전화번호 불러드릴 테니 거기랑 통화해 보세요. 꼭이요."


알려준 전화번호는 속초 법률구조공단이었다. 업무가 비슷할 테니 아마 그곳에서 같이 상담하는 모양이었다. 전화 연결음의 안내로는 상담은 반드시 전화나 온라인을 통해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길래, 내가 전화가 연결되길 기다리는 동안 남편이 온라인으로 예약을 시도했다. 마침 경포에 있는 강릉 법률구조공단에 세 시에 빈자리가 있었다.


"임대인에게 수선유지 의무가 있다면, 임차인에게는 주의 의무가 있습니다. 가스가 배관이 아닌 호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임차인이 계약 전 집을 봤을 때 알았어야 했다는 얘기예요. 현 상태로 임대차한다고 되어 있잖아요. 가스 배관을 해야 한다면 임대인에게 그걸 해 달라고 요구했어야 했는데 요구하지도 않았고요. 안방에서 전기를 사용하지 못했으니 보상을 하라는 것도, 그 피해를 입증하기 쉽지 않고, 임차인이 수선을 요구한 바로 다음날 수리도 해 주셨잖아요. 세면대는 사실 이것은 논쟁거리도 되지 않아요. 그러니 그 십오만 원은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의무가 없지만 호의로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쪽에 꼭 알리세요. 그런 사람과는 직접 상대하기보다는 내용증명이나 문자 등을 이용하시고요. 지금 상황에서는 임대인에게 과실이 없고, 그러니 계약이 유지됩니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도 방법이에요. 내일이 월세일이잖아요? 2기 동안 월세가 연체되면 명도소송을 하실 수 있습니다. 집에서 내쫓을 수 있는 거죠. 이상한 사람 만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보통의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인지 말 그대로 새삼스레 깨달았다.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그에 대한 의견을 또박또박 조리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과의 대화 말이다.


가스 배관 기사가 네다섯 시 사이에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사를 미뤘다니 배관 기사의 방문에 협조 부탁한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랬더니,


"대답 없으셔서 지금 이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우리를 가지고 놀고 싶은 모양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안 놀아주면 된다.


이십만 원짜리 이사비 간이영수증 사진과 함께 또 문자가 왔다.


"이사할때 엘레베이터 비용 십만원도 내기 때문에 사실 삼십만원도 적습니다."


엘리베이터 비용? 그게 뭐든 우리랑 전혀 상관없다는 사실을 이 서른네 살의 여자는 정녕 모른단 말인가?




현관문은 활짝 열린 채 문이 닫히지 않도록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삿짐 사람들이 그렇게 해 놓은 모양이었다. 남다른이 남기고 간 세탁기와 벤치가 덩그러니 놓인 동명동집 3층 마당에서 배관 기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관은 여기 여기 벽을 두 군데 뚫고 이렇게 저렇게 지나간다, 이쪽보다는 저쪽이 좋을 것 같다. 복도보다는 외부가 더 낫겠다. 응, 걱정 마라, 구멍은 실리콘으로 막아주마. 배관 기사와의 대화, 지극히 평범한 이 대화마저도 너무나 즐겁게 느껴졌다. 우리는 오래 알고 지내온 사람들처럼 서로 감사 인사를 건네며 헤어졌고, 계단에서 마주친 이빨이 다 빠진 2층 할아버지와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반가워했다. 살 것 같았다.


미리 양해를 구했다지만 이런 상황에서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불편했음에도 집을 나서기 전에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바로 세면대! 세면대는 뿌연 오물로 가득 차 찰랑찰랑 넘칠 판이었다.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기는 죽도록 싫었지만 손을 넣고 배수구캡을 눌렀다. 차라라 차라라 차라라 차라라 경쾌한 소리를 내며 더러운 물이 허무하리만치 순식간에 내려갔다. 맙소사! 바보다! 그동안 배수캡을 닫아 놓고 썼다! 누르면 닫힘, 또 누르면 열림, 닫힘, 열림, 닫힘, 열림. 매뉴얼이라도 만들어 비치해 놓았어야 했단 말인가? 우리는 지금 양성자부터 우라늄까지의 다양한 중이온을 빛의 절반 속도로 가속, 충돌시키는 중이온가속기 사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면대 말이다, 세면대! 누르면 닫힘, 누르면 열림. 닫힘, 열림, 닫힘, 열림!! 세면대에서 물이 즐거운 소리를 내며 내려갈 때 나의 분노도 어느 정도 함께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사람은 세면대조차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여러분, 이것으로부터 교훈을 얻길 바란다. 당신을 괴롭히는 그 사람이, 당신의 복장을 북북 긁고, 당신을 달달 볶아, 당신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든 그 사람이, 세면대 배구수 캡을 눌러 볼 생각도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상상해보라. 세상이 얼마나 힘들고 복잡하고 고달프겠는가?




남다른과는 집 밖 골목에서 만났다. 임씨 아저씨가 담배를 피며 동명동집을 올려다보곤 했던 그 골목.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던 그 목소리는 어디 가고, 여어보오세여어어어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견줄만한 여린 목소리로 돌아온 그녀는 엄마가 곧 이리로 오는데 오면 큰소리가 날 거라고 그전에 해결을 하자고 했다. 기름값 칠만오천 원을 받겠다는 것이다. 수도, 전기 요금을 계산하고 있을 무렵, 남다른의 엄마가 저 멀리서부터 기차 화통 같은 목소리로 쌍욕과 삿대질을 동시에 하며 우당탕탕 등장했다. 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나 보던 삿대질이라는 것을 이날 처음으로 직접 눈앞에서 보았는데, 그것은 정말로 드라마에서 보았던 삿대질이랑 똑같았다. 검지 손가락을 편 손을 휙 휙 얼굴 높이에서 위로 아래로 이렇게 이렇게 흔들어댔다. 그녀의 등장이 얼마나 요란했던지 길 가던 사람들이 구경꾼이 되었다. 남다른 엄마의 등장과 함께 나의 심장-벌렁, 손-덜덜이 시작되었지만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남편은 자기가 상대할 테니 너는 돈 계산에 집중하라며, 그 여편네의 쌍욕에 내가 불쑥불쑥 그녀 앞에 끼어들 때마다 나를 떼어내 내가 손에 들고 있던 노란색 옥스퍼드 노트로 돌려보냈다. 나는 그 여자의 천둥 같은 괴성 속에서 숫자를 곱하고 나누고 빼고 더했다. 남다른 모녀는 수도요금과 전기 요금 갖고도 시비를 걸었는데, 한 달 전기 요금 구천 원이 말도 안 되는 금액이라는 것이었다. 그게 많다면 한전에 따질 일이다. 왜 나한테 지랄인가? 저잣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도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다.


남편이 남다른의 엄마를 상대하는 방법은 실로 놀라웠다. 눈을 똑바로 뜨고 한마디도 하지 않기. 남다른 엄마의 쌍욕과 삿대질과 행패는, 만약 그 동영상을 어딘가에 올린다면 조회 수 백만은 거뜬히 돌파하고,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린다면 이십만 명을 보장받을 몰상식의 극치이자 폭력 그 자체였다. 그 행패 앞에서 남편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여편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34도의 오후 땡볕 아래에서, 등을 꼿꼿이 펴고, 장렬하게 서 있었다. 그 여편네가 목이 다 쉬고 갈라져서 물 좀 사 마셔야겠다며 스스로 나가떨어질 때까지.


아, 남편이 딱 한마디하긴 했는데 나중에 우린 그걸로 몇 번이나 깔깔대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주머니, 술 드시고 오셨어요?"


입에서 술 냄새가 풀풀 나더란다. 그 여편네는 자기는 술은 단 한 방울도 못 마신다면서도 남편 코앞까지 들이밀었던 얼굴을 떼내 은근슬쩍 남편과 거리를 두었다.




"자기야."

"응?"

"언어폭력도 폭력이지?

"그치."

"분해서 잠이 안 와."

"생각하지 말고 자."

"경찰에 신고해서 폭력죄로 수갑을 채웠어야 했는데 그 아줌마. 모욕죄, 명예훼손죄. 이런 거 다 형사처벌 받잖아."

"수갑 안 채워."

"그럼 머리를 막 눌러서 경찰차 뒷자리에 욱여넣는 거, 그거라도 봤어야 했는데..."

"그거 봐서 뭐 하게?"

"그 아줌마 망신 당하라고."

"바보야, 그게 망신이라고 생각하면 백주대낮에 거기서 그렇게 난리를 쳤겠냐?"

"맞네."

"자."


"자기야."

"응."

"그 아줌마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 줄 알아? 우리 엄마들이 그 아줌마 같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했어. 우리 엄마가 그 아줌마 같은 사람이었다면 나는 평생 엄마를 증오하거나,"

"아니면 똑같은 사람이 되었겠지."

"맞아, 길바닥에서 생사람 잡고 다니는 그런 사람. 근데 있잖아. 자긴 어떻게 그렇게 잘 버텼어? 나는 그 미친 아줌마 얼굴을 손톱으로 확 긁어버리고 머리끄덩이 잡고 다 뽑아 놓고 싶었는데."

"그 아줌마가 원하는 게 뭐였겠어. 작정하고 온 거잖아. 같이 싸우면 말리는 거야. 상대를 안 하는 게 이기는 거고."

"그래?"

"응, 그래."

"15만원을 줄 게 아니라 우리가 받았어야 했어. 어떻게 새 싱크대를 그렇게 해 놓고 나갈 수가 있어? 그 얼룩들 암만해도 안 지워져. 주방서랍에 개사료를 쏟아놓고 나가질 않아. 진짜 너무해."

"자."


"자기야."

"왜 또."

"내일 아침에 마스크 새 거 쓰고 가."

"왜?"

"둘 다 마스크도 안 쓰고 있었잖아. 침이 얼마나 많이 튀었겠어?"

"맞네."




이리하여 동명동집 다섯 세입자 중 가장 젊고,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좋은 직업을 가진 남다른이 한 달만에 이사를 나갔다.

동명동집에서.



동명동집 이야기,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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