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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Feb 26. 2020

Let them free.

이번에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로, 롯데월드 할인 입장권을 인터넷에서 살 때 내국인은 내국인 표를, 외국인은 외국인 표를 사야 한다는 거예요. klook 등 구글에서 검색되는 사이트에서 판매하는 표는 한국인인 저는 사용할 수 없어요. 반대로 지마켓 등에서 파는 표로 친구가 입장할 수 없고요. 하여간 그렇게 표를 사서 롯데월드에 갔고, 셋 다 쫄보인 저희들은 기구 몇 개 타 보지도 못하고 너덜너덜 넋이 나가서는, 하루 온종일 그곳에서 놀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포기하고 롯데월드를 나와, 표를 살 때 패키지로 구입한 아쿠아리움으로 향했지요. 잠실역에 있는 아쿠아리움은 동물을 좋아하는 저희 모두에게 꽤나 볼만했지만, 어쨌거나 그곳에 갇혀 사는 동물들이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이내 씁쓸한 기분이 되어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열 살.


이 열 살 꼬마가 실은 한국에 있는 내내 아팠어요. 하루 꼬박 비행기를 타고 와, 온갖 낯선 소리, 풍경, 사람, 음식에 둘러싸인다는 것은 건강한 아이에게도 벅찬 일이었나 봐요. 기침을 하고 열이 나고, 괜찮다 말다, 괜찮다 말다 그러면서 저희 애를 태웠지요. 아이는 어디서 배웠는지 시키지 않아도 옷소매로 입을 가리고 콜록콜록 기침을 했지만,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거나 상점들을 구경할 때면 주변의 사람들이 슬금슬금 저희를 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그 모습이 웃픈 건 말하지 않아도 아실 거예요. 급기야 속초에 와서는 한국의 소아과라는 곳에 저희 넷 다 난생처음 가 보게 되는데, 아이가 이렇다 보니 쉬엄쉬엄, 이것도 안 하고, 저것도 안 하고 그랬습니다.

독일어 더빙 만화 영화를 보느라 친구가 바빴어요. 저희에게 통역해줘야 하니까.


비가 왔던 토요일엔 늦잠을 자고 일어나 영화를 한 편 본 후 점심 무렵 속초 중앙 시장에 구경을 갔어요. 저희끼리 갔다 오라며, 자기 혼자 집에 남아 (닌텐도 게임을 하며) '몸조리'하겠다는 맹랑한 녀석에게, 시장에 가면 아쿠아리움 뺨치게 멋진 곳이 있다고 꼬셨지요. 예상대로 아이는 시장 지하 횟집들의 수족관 속 광어, 우럭, 곰치, 전복, 문어, 킹크랩, 오징어 등에 매료되었고, 저희는 그 질퍽한 시장을 몇 바퀴나 돌게 되었어요. 참,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 개불이 영어로 뭔지 아세요? chinese penis fish 혹은 chinses penis worm. 개불을 처음 보고 화들짝 놀라, 도대체 저 징그러운 게 뭐냐고, 대체 저게 뭐냐고 친구가 묻는데, 개불이 영어로 뭔지 알 리가 있나요. 다 함께 사전을 찾아보았지요. 그랬더니 이름이 저래. 정말이지 딱하게도 중국은 여러모로 수난이에요. 하여간 개불의 영어 이름은 저희 머릿속을 한동안 장악하게 되어, 바닐라킵플이라는 향기롭고 달콤한 독일 크리스마스 쿠키를 구워 먹을 때조차 chinese penis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게 됩니다.


암튼, 우리들은 수족관을 들여다보며, 문어가 얼마나 똑똑한 지 몇 년이나 사는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수족관 밖으로 몸을 날려 탈출을 시도한 오징어가 시멘트 바닥에서 몸을 뒤틀고 있는 것을 주워 다시 물속에 넣어주기도 했지요. 그러는 와중에 아이가 엄마에게 오징어 한 마리를 사달라고 했어요. 어쩌려고 그러냐 물으니, 쓰담쓰담 예뻐해 주고 싶다네요. "그건 안돼, 강아지나 고양이랑 다른 건 너도 알잖아." 그럼 독일 집에 데려가재요. "그것도 안돼, 공항에서 걸려서 뺏길 거야." 그랬더니 아이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바다에 풀어 주재요. 그 이야기를 친구가 전했을 때, 저는 농담인 줄 알았어요. "그래, 망치가 있다면 수족관을 다 깨부수고 모두를 해방시킨 다음 우리는 영웅이 되는 거지."라고 웃으면서 답하니, 친구가 심각한 얼굴로 "농담 아냐, 진짜야. 우리 한 마리 사서 바다에 풀어 주자. 응?" 그럽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몹시 충격을 받았어요. 이 년 전 서울에서 남편 친구가 놀러 왔을 때, 꼭, 반드시, 쥐치회를 먹어야겠다는 그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그를 따라 시장 지하 횟집에 갔다가, 살아있는 쥐치의 머리를 몽둥이로 때려 기절시키고 껍질을 벗기고 살을 뜨는 그 모든 과정이 지켜보기 버거워서, 그 후로 시장 지하에 내려간 적이 없었어요. 외면하고 모른 체하면 속은 편하니까요.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친구와 아이가 그러는 거예요. 사서 바다에 풀어 주자고. 비건이 되겠다는 것은 저희이지 친구 모자가 아니에요. 고기를 안 먹는 것도 저희고요. 근데 친구가 그러는 거예요. 바다에 풀어 주자고. 응. 그런 방법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희는 바다에 돌아가서도 다시 잡히지 않고 씩씩하게 잘 살 것 같은 건강한 오징어를 찾아 또다시 시장을 뱅글뱅글 돌았습니다. 수 백 수 천의 오징어들 가운데서 하나를 고르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드디어 아이가 한 녀석을 골랐고, 그곳은 하필이면 바가지를 씌우려 했는지 다른 가게들보다 비싼 값을 불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한 놈 콕 집어 비닐봉지에 물과 함께 담아 달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상인 아줌마가 하는 말이, 그렇게 가져가봤자 오 분도 안 돼 죽을 거라네요. 산소가 없어서요. 그 말에, 가까운 바다까지 가는 길을 머릿속에 그리며 오징어를 들고 뛸 궁리를 했지만, 그 거리를 가늠해 보니 오 분 안에는 어림도 없어요. 글렀다. 횟집 수족관 앞에 서서 실망감에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저희 넷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친구의 한국 여행이 이렇게 웃펐던 것만은 아니에요. 다행히 소아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고 아이 컨디션이 나아진 데다 마지막 날에는 날씨까지 끝내주게 좋았어요. 이번 여행에서 아이가 유일하게 바랬던 것이 바로 눈싸움이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눈싸움 실컷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해요. 한국 여행 통틀어 단 하루였지만, 완벽한 날이었고 모두 다 행복했습니다.

용평리조트 발왕산 정상.



마지막으로,

독일의 크리마스 쿠키 중 하나라는 바닐라킵플.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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