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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Jan 29. 2020

돈에 대한 발칸식 대화에서.

The Other Side.


"그래서, 한 달에 얼마나 벌어?"

누군가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 사람이 속물이거나 무례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궁금해도 묻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그 사람이 타는 차로, 사는 동네로 짐작만 할 뿐이다. 반면 발칸에서는 나와 너의 '벌이'에 대해 누구와도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날씨 한번 정말 지랄 같네. 그런데 말야, 날씨보다 더 지랄 같은 게 뭔지 아나? 바로 내 월급이라고. 한 달에 200유로가 뭔가 글쎄. 버스 요금도 올랐는데 말이야.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헌데 자네는 좀 어떤가. 한 달에 얼마나 번다고 했지?"

이것이 발칸식 대화였다.

전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호텔 앞 벤치에 앉아 말동무 란코 아저씨와 시간을 보냈다. 피라미드를 보러 가던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어찌하여 차를 얻어 타고 로젠에서 돌아왔는지, 혹시 전기가 밤새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지, 그렇다면 이 주린 배를 어떻게 달랠 것인지. 볼 때마다 싱글벙글 웃는 란코는 이래서 힘들고 저래서 걱정스러운 나의 하소연을 항시 웃는 사람 특유의 긍정적인 어조로 되받았다. 이내 내가 누그러져 그처럼 싱글벙글 웃게 되자, 그는 내가 여행을 시작한 이래 숱하게 받았던 그 질문을 했다.

"한국에서는 월급이 보통 얼마야?"

발칸 여행을 다 마친 후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그 질문의 본질에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곤혹스러워할 때라 우리의 대화는 이런 꼴이었다.

"그럼, 좋아. 한국에서 담배 한 갑에 얼마야?"
"2유로요."
"그럼, 코카콜라 한 병은?"
"1유로."
"그래,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보통 한 달에 월급을 얼마나 받냐고."
"아저씨가 무슨 일을 하냐에 따라 다르다니까요."
"그냥 보통 회사에 다니면?"
"보통 회사라... 그 보통 회사에서 아저씨가 무슨 일을 하는데요?"
"아무거나. 그냥 책상에 앉아서 일한다 치고."
"그 책상에 몇 년 동안 앉아 있었는데요?"
"글쎄, 한 십 년?"
"십 년 동안 그 책상에 앉아서 아저씨가 무슨 일을 했는데요?"
"그냥 아무 일이나!!"
"보통 회사에서 십 년 동안 책상에 앉아 아무 일이나 했다... 흠..."
"좋아, 그럼 처음부터 다시. 그러니까..."

불가리아 코프리브쉬띠짜의 작은 호텔에서 주방과 청소를 도맡아 보는 50대 아주머니의 월급이 150유로였다. 마케도니아 비톨라에서 창문에 블라인드를 설치하는 로드의 월급도 150유로였다.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마케도니아 스코페의 한 영자신문사에서 에디터로 일하는 리나의 월급은 300유로였다. 마케도니아의 대학에서 정년을 앞둔 노장 교수가 받는 월급은 500유로를 넘지 않는다고 헝가리안 리타가 알려줬다. 그런 그녀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대학에서 불교학을 가르치고 받는 월급은 600유로이다. 언젠가 리타로부터 이런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내 딸 카르마가 무용을 하잖니. 걔가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하고 싶어 해. 댄스 테라피라는 것이 있는데 춤으로 다른 사람들의 치유를 돕는 거야. 네덜란드에 꽤 좋은 프로그램이 있기는 한데 말이지, 우리 형편으로는 감당이 안 돼. 서유럽 사람들한테야 일 년에 고작 2,000유로이지만 헝가리 사람들한테는 어마어마한 돈이잖니. 3년이나 공부를 해야 하는데 내 월급의 대부분은 집세로 나가서 모아놓은 돈이 없다. 너는 이쪽 사정을 잘 아니까 이해하지? 아아, 딸년이 공부 더 하고 싶다는데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암튼 마음이 그렇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얼마 전에 한국 정부 초청 교환학생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 목록에 있는 학교들을 보면 무용학과가 있는 곳도 제법 있더라? 한국에도 댄스 테라피라는 것이 있을까?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정보를 좀 찾아봐 줄 수 있어?"

'그치, 이만 유로면 이천만 원이 넘으니 크지. 에구...'

리타의 부탁을 읽으며 안타까움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푹 나왔다. 혀를 차고 고개를  끄떡이며 리타가 얼마나 속상해하고 있을까 생각하다가... 어라? 내가 이천 유로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만 유로로 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 년 학비 이천 유로. 우리나라 돈으로 일 년에 이백육십만 원. 유러피안 시티즌 헝가리안 리타에게는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고 일 년 학비가 천만 원인 한국에 사는 나에게는 그저 부럽기만 한 숫자.

서구 사대주의에 얼마간 물들어 있었던 나는 발칸 여행을 통해 그 얼마간을 씻어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처음엔 그들이 동남아시아의 노동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돈을 받는다는 사실에 몹시 놀랐다. 그 놀람과 동시에 내가 왜 이것에 놀라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볼 수밖에 없었다. 왜 놀랐는가? 그들이 백인이라서? 그들이 유럽 사람이라서?

그러고 보면 돈만큼 상대적인 것도 없다. 누구와 비교하고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돈은 그 가치가 달라진다. 발칸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과 타인의 소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고만고만 비슷비슷하게 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이면 모두 다 함께 풍족하게 벌어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할 수 있는 그런 사회면 더 좋겠지만, 하여간  나는 너 나 할 것 없이 비슷하게 버는 그 사회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발칸에 가서 살 궁리를 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발칸 여행에서 돌아온 그다음 해, 한 달에 백만 원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사실 백만 원은 내가 했던 노동에 비하면 정말이지 과분한 것이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느지막이 출근해서 유쾌한 사람들과 맛있는 점심을 먹고는 부른 배로 마당에 앉아 햇볕을 실컷 쬔 다음 오후 시간에 집중적으로 업무를 보고 퇴근 러시아워를 피해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일을 했던 열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베트남과 불가리아와 시베리아를 여행했고, 그럴 때면 한 달에 한두 번 출근한 것이 고작이었다. 고용주는 월급을 조금 밖에 주지 못해 미안하다 했지만, 발칸 이후의 나에게는 순전히 無, 제로에서 백만을 생산해 내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발칸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도 과분한 돈이었다. 이런 이유로 기쁘고 감사한 마음과 함께 죄책감 또한 들었다. 풀타임으로 근무하는 로드의 다섯 달 치 월급이었고, 리타의 석 달 치 월세가 아닌가.

내가 이렇게 많이 받을 이유도 네가 그렇게 적게 받을 이유도 없다. 너와 내가 다름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거기서 태어났고 나는 여기서 태어났다. 멀리 발칸까지 갈 필요도 없다. 북한 동포가 그렇고 이웃 중국이 그렇다. 나라를 따질 필요도 없다. 너는 부자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나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너'와 '나'의 다름은 그 어디에도 없다.

불가리아, 루쎄.
몬테네그로, 쟈블락.
마케도니아, 스코페.
코소보, 프리즈렌.
코소보, 프리슈티나.
알바니아, 발보나.
알바니아, 떼띠.
보스니아 앤 헤르체고비나, 루꼬미르.


#중국짜요 #우한짜요 #발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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