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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Nov 19. 2019

속초 파스토랄 판타지.

The Other Side.


열 평 남짓한 마당이 있다. 마당 끝에는 파란색 고무호스가 삐죽 끼워진 수도꼭지가 시멘트로 미장한 사각형의 수돗가 한쪽에 기우뚱 서 있다. 그 앞에는 비닐 장판을 깐 평상이 있고 평상 위를 빨래집게가 대롱거리는 빨랫줄이 지나간다. 그리고, 물론, 이 모든 것의 배경에 짙고 푸른 동해바다와 그보다 조금은 연한 빛의 파른 하늘이 펼쳐진다. 바다와 하늘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슷한 넓이의 이웃집 마당과 초록색 방수 페인트를 칠한 그들의 옥상이 동해바다로 흘러내리듯 우리 아래에 놓여 있을 뿐이다. 바닷가에 산다면 우리 집은 이런 모습일 거라고 막연히 상상했다. 내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는 cliché. 누군가는 통유리창을 통해 집안 어디에서나 바다가 보이는 육십몇 층짜리 초고층 아파트를 상상할 것이고, 누군가는 바닷가 절벽 위 난공불락의 거대한 현대식 주택을 머릿속에 그릴 테지만, 돈 없이 자란 내가 꿈꾸던 바닷가 우리 집이란 하여간 저런 모습이었다. 우리는 현재 59제곱미터, 국민주택 이하 18평 소형 아파트에 산다. 방이 하나 더 있고 없고의 차이만 있을 뿐, 2004년부터 쭈욱.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1997년에 지어졌다. 속초시는 땅이 작아 downtown이라는 개념의 그 경계가 모호해서 설악산이 있는 설악동과 대포항이 있는 대포동 등 몇몇 외곽 지역을 제외하고는 집에서부터 어디든 걸어서 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집 역시 속초 '시내'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 속초에서는 걸어서 1시간 걸리는 곳에 가려고 버스를 타면 59분이 걸린다. 진짜다. 대중교통 시스템이 몹쓸 지경이라 그렇다), 시장, 관공서, 병원, 스타벅스와 롯데리아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아파트 중 하나라는 이유로 '시내'에 있다고 할 수 없기도 하다. 속초에 있는 대부분의 아파트는 1990년대 중후반에 지어졌다. 최근 이삼 년 사이 새 아파트들을 우후죽순 짓고 있는 것처럼 20여 년 전에도 아파트 건설 붐이 일었던 모양이다. 주변과의 어울림을 생각하지 않고 아파트를 짓는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인 듯 한데, 근래에 입주한 새 아파트의 담벼락을 따라 보도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이 뚝 끊어져 어이없게도 차도로 내려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 주변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할 필요도 없다.


작년 봄 속초로 이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주변을 탐색하다 아파트 뒤 야트막한 야산을 넘으면 영랑호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우리는 몹시 기뻤다. 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갈 수 있는 곳에, 한남동에는 한강이 있었고, 죽전에는 탄천이 있었으니, 속초에는 영랑호가, 마치 우리를 위해 그곳에 있는 것처럼, 뗏장이 떨어지고 벗겨진 이름 없는 무덤들이 밤나무와 소나무 사이에 납작 엎드려 그 볼품없는 모습을 숨기고 있는 야산 너머에서, 잔잔한 은빛 수면 위에 설악산과 금강산을 담은 채 부서진 태양빛을 반짝이며 우리를 맞이한 것이다. 우리는 정말 몹시 기뻤다. 도피처는 필요하다. 그것은 열대우림 섬 어느 구석에 위치한 에어컨 풀가동되는 카페일 수 있고, 시끄럽고 매캐한 도심 한가운데 나무 울창한 공원일 수 있고,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뿐인 숨 막히는 사무실 밖 복도 끝 화장실의 제일 마지막 칸일 수도 있다. 우리에겐 과분할 정도로 아름다운 영랑호가 주어졌다.


그런 영랑호로 가는 길에 집이 한 채 있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과 폐현수막이나 살이 부러진 철망 등으로 너저분하게 구획을 나눈 조각보 텃밭들 사이에, 마치 섬처럼 혹은 성처럼 집 둘레를 탱자나무 울타리로 꼼꼼하게 두른 빨간 지붕 집. 그 집을 지나야 만 고개를 넘어 영랑호에 갈 수 있으니 호숫가 산책길로 운동 가는 동네 주민들이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그 집을 지난다. 올해 봄까지 그 집 마당에 백구가 있었다. 우스깡스러울 정도로 슬프게 생긴 못난이 백구는 짧은 줄에 묶여 볼 때마다 가만히 누워 있거나 등을 돌리고 앉아 텅 빈 개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개는 사람 소리가 나도 짖지 않았고 내가 울타리 너머 마당을 들여다 보아도 짖지 않았다. 탁하고 초점 없는 눈을 간신히 들어 올려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짧은 목줄을 본 적이 없었다. 채 일 미터도 되지 않는 쇠줄을 목에 걸고 밥그릇 옆에 똥을 싸고 똥 옆에 누워 백구는 그렇게 살았다. 주인집으로부터 이십 여 미터 떨어진 마당 초입에 지 혼자 덩그러니 묶여서. 속초 고성 산불에 대피소로 피난을 갔다 돌아온 그날, 쪽잠을 자고 일어나 제일 먼저 한 일이 백구를 보러 간 것이었다. 개가 없어졌을까 봐, 아니면 시커멓게 탄 채로 그 말도 안 되게 짧은 목줄에 묶여 숯덩이가 되어 있을까 봐 집을 나설 때부터 가슴이 벌렁거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탱자나무 울타리만 불에 탔고, 백구는 예의 그 못생기고 슬픈 얼굴을 바닥에 괸 채 누워 있었다.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 백구가 사라졌다. 남편은 잡아 먹혔을 거라 했고 나는 우울증에 죽었을 거라 했다. 잡아먹기에 너무 작은 덩치였기 때문이다. 빈 개집을 보며 나는 다시는 그들이 다른 어떤 개도 키우지 않게 해달라고 속으로 빌었지만 미처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새로운 개가 왔다. 검은색과 갈색이 섞인 어린 똥개는 백구가 묶였던 그 목줄에 묶여 신나게 꼬리를 흔들었다. 발랄한 얼굴로 혓바닥을 조금 내밀고서 말이다. 우리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멀리 떨어진 주인집 건물을 향해, 주인도 아니고 주인집 건물을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우리를 볼 때마다 꼬리를 흔들던 똥개는 시간을 거듭할수록 꼬리 치는 강도와 횟수가 줄어들더니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자 이제는 사라진 백구처럼 누구를 보고도 꼬리를 치지 않게 되었다. 집주인 남자가 마당에 나와 장작을 패도, 집주인 여자가 플라스틱 의자를 끌고 나와 개집 가까이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있어도, 똥개는 백구가 그랬던 것처럼 턱을 괴고 누워 지 코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자유롭게 살던 개를 잡아다 그렇게 묶어 놓으면 정신이 나갈 텐가? 지 살이 뜯겨져 나가는 한이 있어도 목줄을 끊고 도망치려 할 텐가? 어린 똥개는 이제 만족스러울 정도로 길들여졌다. 본성을 잃고 짧은 줄에 묶여 담요 한 장 깔려 있지 않은 플라스틱 개집 앞에 앉아 짖지도 않고 밥을 더 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고 배를 긁어 달라 몸을 뒤집지도 않는다. 죽어야 끝나는 고문, 죽어야만 비로소 끝낼 수 있는 고문. 그 현장을 지나야 만 갈 수 있는 나의 도피처 영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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