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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Jan 08. 2016

조용한 목격자_벨리코 터르노보,불가리아.

서쪽이고 싶은 동쪽,발칸_[40]

벨리코 터르노보행 미니버스에 탄 승객 중 절반이 배낭 여행자였다. 플로브디브를 출발할 때부터 미국, 캐나다, 스위스, 대만, 한국에서 온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일행이 되어 버스 맨 뒷자리에 모여 앉았고, 벨리코 터르노보의 터미널에 내렸을 때는 택시 기사와 택시 값을 놓고 다 함께 실랑이를 벌이게 되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의 숙소가 불가리아 주요 여행지에 지점을 둔 '호스텔모스텔' 이었기 때문에 나는 내심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택시 값을 조금이라도 더 잘게 나누어 십 원이라도 아낄 수 있는 기회를 그들 역시 놓치지 않았다. 다섯 명이 한 차에 탈 수가 없어 두 대에 나누어 타게 되었는데, 나와 같은 택시를 탄 두 명의 여행자 중 캐나다 아가씨가 나눗셈을 얄밉게 하여, 이에 질 수 없었던 나는 휴대폰의 계산기 앱을 꺼내기에 이르렀다. 1/n로 정확히 차비를 나눈 후 흔들리는 택시 안에서 토시 하나 틀리지 않게 동전을 세어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택시에서 내리니 말 그대로 만감이 교차했다. 


론리플래닛이 추천한 숙소 중 한 곳을 미리 예약해 두었다. 숙소에 대한 론리의 설명은 이러했다. 

‘현지인 커플이 운영하는 전통 방식으로 꾸며진 작고 쾌활한 게스트하우스, 식당을 위해 채소를 직접 재배함.’


한 토막 짧은 글이었지만 이것을 읽은 나는, 건물에 둘러싸인 소담한 안뜰과 마당 한구석의 작은 텃밭, 텃밭을 가꾸는 활기찬 젊은 커플, 그들이 야외 식탁에 정성스레 차려 낸 신선하고 풍성한 밥상, 밥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불가리아 전통 무늬의 식탁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안뜰의 푸르름을 상상했다.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감상할 때, 보여지는 것 혹은 들리는 것 이외의 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상하는 일은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얻게 되는 공감에 더하여 그것들을 향유하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지만, 론리플래닛과 같은 실용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가는 '즐거움’은 고사하고 곤란한 상황에 처하거나 눈 앞에 놓인 현실에 실망을 하게 된다. 쓸데없는 공상에 빠지기 좋아하는 나는 여러 번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기는커녕, 그동안 보아 왔던 불가리아의 가장 멋진 부분만을 짜집기하여 제멋대로 남의 집 모습을 꾸며놓고 말았다. 그리하여 썰렁하고 음울하며 전혀 ‘쾌활’하지 않은 게스트하우스의 분위기와, 불가리아 전통 방식이라고 하기에는 시댁이 있는 충북 단양의 포목점과 지물포에서도 본 듯한 꽃무늬 벽지와 이불,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당이 없다는 치명적인 사실에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침울한 기분으로 짐을 풀며 론리플래닛을 다시 읽어보니, 이럴 수가, ‘마당’이나 ‘텃밭’이라는 단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여간 론리플래닛은 쾌활하다거나 점잖다거나 다정하다거나 친절하다는 류의 형용사의 사용에 있어 각별한 주의를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손님을 맞는 일에서부터 청소까지 모든 잡무를 도맡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누가 숙소의 주인인지 알지 못한다. 그녀에게 빨래방의 위치를 물어 빨래를 맡긴 다음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오니 어느새 해가 져 있었다.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날은 정말이지 하루가 순식간에 지난다. 시골에서보다 도시에서 상대적으로 더 바쁜 이유는, 복잡한 거리 때문에 헤매는 시간이 많고, 그동안 보지 봇한 '볼일'을 봐야 하며, '가라'고 혹은 '보라'고 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밤 산책에 나섰다. 구불구불 리본 모양으로 휘감아 흐르는 얀트라강을 아래에 두고 고갯마루에 흘러내리듯 형성된 벨리코 터르노보는 12~14세기 제2불가리아제국의 수도였다. 도시의 동쪽 끝에는 벨리코 터르노보의 자랑 차레베츠 요새가 있는데 서늘한 밤 공기에도 아랑곳없이 요새 앞 광장의 식당 야외 식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찬 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향해 보란 듯이 솟은 요새의 탑을 배경으로 코발트색으로 번지고 있는 하늘 아래 친구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어 보였다. 얀트라강 건너 반대편 계곡 너머에는 또 다른 성이 노랗게 불을 밝히고 있었고, 차레베츠 요새를 아래에서부터 비추는 수많은 조명은 그것의 자태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하늘빛이 완전히 검게 변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댕댕댕 커다란 종소리가 들리더니 요새를 비추던 조명이 일순 꺼졌다. 그리고는 그 유명한 레이저 쇼가 시작되었다.  



설레지 않는 아침은 없다. 집에 있을 때도 그러니 여행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공기는 차고 가벼우며 햇빛은 부드럽고 따사롭다. 그 속에 서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좋고, 그 사람들 속에 내가 속해 있어도 좋다. 회사를 다닐 때도 출근길이 싫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출근해서가 싫었지. 플로브디브의 구시가, 마치 섬처럼 주변으로부터 동떨어진 언덕 위에 묵었을 때, 발이 묶인 듯한 기분이 들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하여 벨리코 터르노보의 첫 아침은 복잡복잡 시끌시끌 시장 구경이었다. 시장은 '쾌활한' 숙소가 있는 ‘기념품 골목’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곳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시장 중심에 있는 상가들은 채 문을 열지 않았지만 상가를 둘러싸고 형성된 채소와 과일 노점들은 이미 좌판을 벌려 놓고 한창 장사를 하고 있었다. 발칸의 채소값과 과일값은 거의 축복에 가까웠다. 그 해 풍작으로 헐값이 된 복숭아는 벨리코 터르노보의 시장에서 1kg에 1레바(650원)였고, 자두는 1kg에 0.8레바(520원)였다. 생수 0.5리터의 가격이 보통 0.6레바였기에, 나는 과일가게가 보일 때마다 물 대신 과일을 사 먹었는데, 과일도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는 사실을 발칸 여행을 통해 체감하게 되었다. 분주하고 활기차고 향긋한 시장은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플로브디브에서와 ‘마당 없는’ 숙소에서의 답답했던 마음을 털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시장을 둘러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가지 몇 개 펼쳐 놓고 하루를 시작한 아저씨가 있었고, 하필이면 시장에서 장사가 가장 잘 되고 가장 예쁜 가게 옆에서 파리만 쫓는 가게도 있었다. 꽃 몇 양동이를 앞에 놓고 팔던 할머니들은 “아이고, 우리 시장에 동양아이가 다 왔네.” 라며 꽃처럼 흐드러지게 웃어 주었다. 



플로브디브에서 산 무릎 보호대는 참으로 신통했다. 그것만 무릎에 끼워져 있으면 걷기 한결 수월했다. 다 나은 줄 알고 보호대를 벗으면 곧바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에 무슨 옷을 입든 상관없이 보호대와 함께 해야 했다. 스포티하고 활동적인 사람이 된 것만 같아 기분이 좀 우쭐하기도 했지만 지난밤에 이어 또 다시 이것을 보고 길에서 웬 사람이 말을 걸어 왔기 때문에 빨래방에 맡겨 놓은 긴바지가 몹시 아쉬웠다. 시장에서 산 과일 봉지를 잔뜩 들고 빨래를 찾으러 갔다. 중심가 대로변의 커다란 쇼핑몰 지하에 있는 빨래방의 아줌마는 중간 계단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나를 보고는 서둘러 담배를 눌러 껐다. 그녀의 휴식 시간을 방해한 것이 미안해 빨래를 찾으며 시장에서 산 복숭아 하나를 아줌마에게 건네니, 그녀는 손사래를 치고는 세탁실 안으로 사라졌다가 커다란 오이 하나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받아요. 우리 엄마가 농사지으신 거야.”



와삭와삭 오이를 씹으며 길을 걸었다. 한 손에는 무거운 과일 봉지와 그보다 더 무거운 빨래 봉지가 들려 있었다. 비닐 봉지들이 자기들끼리 부딪힐 때면 이따금 달콤한 복숭아 냄새와 함께 향긋한 세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 향기에, 오이를 건네며 그녀가 지었던 환한 미소가 떠올라 가슴에 무언가 따뜻한 것이 번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손은 무겁지만 그 즐거운 간질거림과 오전의 따스한 햇빛을 더 오래 즐기고 싶어 숙소로 이어지는 큰길에서 벗어나 한적한 돌림길로 들어갔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가 남의 집 갓돌에 앉아 부스럭 봉지를 뒤져 가장 잘 익은 자두 하나를 골랐다. 한입 크게 베어물자 달콤하고 새콤한 즙이 한꺼번에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맛있어!"라고 혼자 외치는 소리를 들었는지 어디선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내 눈치를 살피며 멀찍이서 울어 댔다. 자두를 조금 떼내어 고양이 앞에 던져 보았지만 녀석은 냄새만 맡고 먹지는 않았다. 가방에서 비스켓을 꺼내 그것을 잘게 부셔 다시 던졌다. 집으로 돌아가던 한 아주머니는 열쇠를 손에 쥐고 서서 한참이고 우리를 지켜보았고, 그 어린 녀석은 몸을 납작 땅에 붙이고는 앞발로 기어와 비스켓 조각을 물더니 꽁지 빠지게 달아났다. 여행에서 돌아와 지난 여행을 회상할 때면 꼭 이런 순간들이 먼저 떠오른다. 압도적인 자연 풍경이나 입이 떠억 벌어지는 건축물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나고, 좁은 골목길, 그 골목에서 마주친 얼굴들, 그 냄새, 그 공기, 그 빛이.  



‘쾌활한’ 숙소에 들러 짐을 내려 놓고 차레베츠 요새로 갔다. 요새는 트라키아인과 로마인들의 방어 기지로 처음 사용되었고, 비잔틴 시대인 5~7세기 무렵 성벽이 세워졌다. 8~10세기, 슬라브와 불가리아인에 의해 재건축 되었고, 다시 비잔틴으로 주인이 바뀌며 부셔지고 보수되기를 반복했다. 제2불가리아제국과 오스만에 의해 번영과 파괴를 또 다시 되풀이한 끝에 현재는 언덕 꼭대기의 교회 건물 만이 복원되었고, 수 백 채의 건물, 십여 개의 교회와 수도원, 상점, 성문, 탑 등의 흔적들은 돌무더기의 형태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15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언덕 위에서 벨리코 터르노보의 모든 역사를 지켜보았을 요새는, 내가 폐허 사이를 누비며 한때 누구네 집의 담벼락이었던 자갈과 어느 교회의 제단이었던 돌무덤을 밟고 있을 때에도, 지난 수 세기 동안 그랬던 것처럼 사정없이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를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성을 나와 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아랫마을로 향했다. 위에서 볼 때는 꽤 가까워 보였지만 구불구불 찻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했다. 마을에는 가볼 만한 세 개의 교회가 있다고 지도에 표시되어 있어 그 교회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보기로 했다. 마을 이름은 아쎄노바. 내리막길을 거진 내려오니 세 교회 중 첫 번째인 ‘40인의 순교자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강변의 교회는 꽤 넓은 터를 가지고 있었고 마당은 정성을 다해 꾸며져 있었다. 비잔틴을 물리친 황제 아쎈2세를 위해 1230년에 지어졌는데 왕가의 무덤으로 쓰이다가 오토만 시대에는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건물이 온전히 남아있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었다. 두 번째 교회인 ‘성 페트르, 파벨 교회’는 마을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예쁘게 손질된 길쭉한 정원 안 깊숙이 교회가 있어 이제 막 문간을 넘어 정원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정원의 화단에 물을 주고 있던 심술궂게 생긴 아줌마가 나를 보자마자 "입장료!"라고 외치는 바람에 그냥 돌아서고 나왔다. 아무리 신심이 없다 해도 신과의 만남에 있어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다. 강 건너에 있는 세 번째 교회를 찾아 다리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무로 지어진 다리는 어떤 사정인지 강가와 면한 두 채의 집 사이에 놓여 있어 그 집들의 벽과 다리의 난간이 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 집들이 살림을 사는 곳인지 알 수 없었지만 두 중 집 한 곳의 대문에는 발칸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듯이 부고장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처음 발칸에 왔을 때 한 집 건너 하나 꼴로 대문에 붙어 있는 부고장에 적잖이 놀랐다. 마을에 무슨 사단이라도 나서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은 것일까, 전염병이라도 돌았나, 전쟁은 옛날에 끝났는데... 마케도니아 오흐리드의 숙소 마리얀네 집에도 부고장이 붙어 있어, 그것을 보고 하루는 마리얀에게, 

“귀하에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라고 말했다가, 마리얀으로부터 이런 대답을 들었다. 

“고마워, 울 엄니는 6년 전에 돌아가셨어. 이제는 뭐 괜찮아!” 

어쩐지 그는 어머니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치고는 과하게 밝고 웃음이 많았다. 집의 대문에, 마을 광장 알림판에, 전봇대에, 혹은 아무 벽에 셀 수도 없이 붙어 있는 부고장 중 많은 수가 몇 년 전 돌아가신 분에 대한 것이었다. 금방 인쇄한 듯 선명한 글씨로, 빗물에 젖지 않게 비닐에 씌워져, 혹은 색이 바래고 귀퉁이가 돌돌 말려서는. 아마도 망자를 기억하려는 그들만의 방식이리라. 


다리 건너 마을 가장 안쪽 구석에 자리한 ‘성 디미트리 교회’를 찾았다. 여행 안내서의 설명을 보면 비잔틴에 대한 봉기와 제2불가리아제국의 건립을 선언한 해에 지어진, 벨리코 터르노보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고 했는데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비록 허탕을 치기는 했지만 성 미디트리 교회에서 올려다 보는 요새의 모습은 매우 근사했다. 강이 나누어 놓은 마을을 연결한 나무로 만든 인도교와 그 위로 마천루같은 차레베츠 요새, 요새를 머리에 이고 어느 중년의 남자는 낡은 차의 보닛을 열고 머리통을 밀어 넣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오르막이라 죽을 맛이었다. 절뚝거리며 몇 킬로미터씩 걸어 지도의 아이콘을 악착같이 찾아가는 나는, 집에서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밖에 나가지 않아도 답답한지 모른다. 이러면 오타쿠라고 누가 그랬는데... 도심과 요새를 잇는 큰길은 밤이고 낮이고 한산하기만 했다. 그 길 중간에 ‘DEAWOO’ 간판을 단 가게가 있었다. 아마도 예전에는 자동차를 팔았을 그 가게는 지금은 조악한 기념품 등을 몇 개 매달아 놓은 문방구점이었다. 17조원의 추징금을 여전히 내지 않고 있는 김우중이 '아직도 세계는 넓다'며 강연을 하고 돌아다니던데 '새로운 도전' 따위의 제목으로 기사를 퍼 나르는 언론이나 회장님은 나의 롤모델이라는 젊은이들이나 참 답이 없어 답답하다. 



기념품 골목과 숙소를 지나 동네 깊숙이 들어가 보았다. 조금 선선해진 공기에 할머니 둘이 작은 여자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대문 앞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들의 추레한 복장과 달리 아이의 옷은 빳빳하게 풀을 먹인 화사한 꽃무늬 원피스였다. 그 모습이 정겨워 그들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사진을 인화해 그들에게 보낼 생각으로 주소를 물으니 그 중 젊은 할머니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주소를 적어 주었다. 헌데 이것을 도저히 알아 볼 방법이 없었다. 마침 젊은 커플이 장본 비닐 봉지를 한아름 들고 우리 앞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부탁해 (불가리아의 젊은이들은 대개 영어를 아주 잘한다.) 할머니네 주소를 영어 버젼으로 받을 수 있었다. 할머니의 사진과 빨래방 아줌마의 사진은 기타 몇 명의 다른 사람의 사진과 함께 그다음 해 불가리아를 다시 찾았을 때 소피아의 우체국에서 보냈다. 


그들과 헤어져 동네 더 깊숙이 들어갔다. 예쁜 꽃으로 창가를 꾸며놓은 집이 있는가하면 벽의 페인트가 더 떨어져 내린 곳도 있었다. 어느 집 앞을 지날 때는 고소한 음식 냄새가 났고, 어느 집 마당에서는 어린 아이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그 중 유독 한 집에 여러 마리의 고양이들이 몰려 있어 가까이 가 보았다. 고양이를 쓰다듬으로 이런저런 의미없는 말을 건네는데, 그런 나를 보았는지 집주인 아주머니가 창문을 열었다.   

“이 동네에도 고양이 싫어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내가 길고양이에게 밥을 준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다 생명인데.”

고양이에게 밥을 준다고 눈총을 받는 것은 우리나라나 불가리아나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 듯 같은 듯. 이런 순간을 좋아한다. 



어쨌거나 불가리아 여행도 끝을 향하고 있었다. 며칠 후면 남편이 올 터였다. 불가리아에서 충분히 즐거웠지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벨리코 터르노보의 마지막 저녁은 차레베츠 요새에서 보내기로 했다. 도시마다 저녁을 맞기 좋은 장소들이 있는데 벨리코 터르노보에서는 단연 요새였다. 요새는 근사한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요새의 난간에 걸터앉아 요새와 사람과 마을과 강을 둘러보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내 등을 스치고 성벽 위를 걸어갔다. 고양이는 내가 아무리 불러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는 수백 번은 해본 듯 닫힌 성문의 쇠창살 사이로 우아하게 사라졌다. 하늘과 구름이 그 아름다운 색을 더 아름답게 바꿀 때는 어쩐 일인지 나의 외로움이 최고조에 달했다. 



루마니아와 국경을 마주한 도시 루쎄로 가는 버스는 오후 3시 부근에 세 대나 몰려 있었다. 그 전에 출발하는 버스는 11시. 3시 버스를 타기로 했다. 하여 버스를 탈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또 다시 도시를 걸었다. 어느 골목을 걷고 있을 때 한 할머니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우리 집 사진 좀 찍어서 한국에 돌아가면 인터넷에 좀 올려 줘.” 

민박집 할머니의 요청이었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의 사진을 찍고 헤어져 골목을 나오다 보니 골목 끝 벽에 한글로 ‘민박’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처럼 그녀의 부탁으로 벽에 글을 썼을 누군가가 생각나 웃음이 났다.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불가리아를 해방시킨 아센왕조 기념비는 강 건너편 언덕에 등대처럼 솟아 골목을 꺾을 때마다 눈에 들어왔는데 그 기념탑이 세워져 있는 아쎄노브치 공원은 Hristo Botev거리의 여행자센터를 오른쪽에 끼고 내리막길을 내려가 길 끝에 있는 다리를 건넌 다음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리본 모양의 도시는 길을 헤매기 딱 좋았다. 공원에서 보니 벨리코 터르노보의 집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집들은 그 크기와 상관없이 햇빛도 바라보는 경치도 공평해 보였다. Rafael Mihaylav거리의 언덕 위 산동네는 벨리코 터르노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곳이었다. 창틀에 매달린 화분들과 한 뼘 마당에 자란 키 작은 꽃나무들이 담장 밖까지 그 향기를 풍기는 곳이었는데, 산동네는 보기에만 예쁘다는 것을, 사는 사람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지금 살고 있는 산동네 금호동으로 이사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맡겨놓은 배낭을 찾으러 호텔로 가고 있을 때 어디선가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퉁퉁퉁 북을 두드리고 신나게 피리를 부는 소리는 발칸에서 잔치가 있을 때 흔히 들을 수 있는 그것이다. 나는 조금 돌아갈 생각으로 소리를 따라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밑 좁은 골목에서 결혼 축하가 한창이었다. 예복을 입은 신랑 신부를 둘러싸고 악단과 하객들이 한데 엉켜 흥겨운 분위기였다. 정신이 쏙 빠질 정도로 떠들썩한 그곳에서 화려한 복장의 하객들 사이에 나처럼 추레한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나를 보고 웃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한참을 생각한 뒤에야 그녀가 호텔에서 일하는 아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이곳이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나란히 창턱에 걸터앉아 말없이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내 음악이 멈추었고, 자리를 옮긴다며 신랑 신부와 하객들이 떠나자 진한 향수 냄새와 함께 그녀와 나 둘만이 남겨졌다. 버스 시간이 다 되어 그녀를 혼자 두고 그곳을 나왔을 때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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