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이고 싶은 동쪽,발칸_[39]
'호스텔에 별거 다 있네.'
라는 생각을 하며 숙박 카드의 빈칸을 채우고 있을 때 마리아가 물었다.
“그래서, 어디서 오는 길이야? 소피아? 벨리코 터르노보?”
“아니, 코프리브쉬띠쨔.”
“뭐? 어디? 코프리브쉬띠쨔?”
쓰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니 가뜩이나 큰 눈이 더 커져 있었다.
“그 전에는?"
"코피리브쉬띠쨔 전에? 멜닉.”
“우와! 대단해. 그럼 그 전에는?”
“좋아. 마케도니아에서 소피아로 왔고, 싸빠레바 반야에서 릴라에 갔다가 멜닉, 코프리브쉬띠쨔, 그리고 지금 여기.”
“진짜 대단해! 있잖아, 여기서 일하면서 너 같은 여행자들을 볼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나는 한번도 가본 적 없고, 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우리나라를 여행하려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온다는 거야. 유럽뿐만 아니라 남미에서도 오고 너처럼 저 멀리 아시아에서도 온다고. 대단하지 않아? 정말이지 압도적이야. 우리나라가 막 좋아지려고까지 한다니까. 그래서 말인데 언젠가는 나도 우리나라 곳곳을 여행하고 싶어. 아, 정말이지 대단해!"
기름 냄새와 인파로 일렁이는 광장시장의 먹자골목, 그 복잡한 시장통에 보란 듯이 자리 잡고 앉아 엑스 자 모양으로 젓가락을 움직이며 빈대떡을 입으로 넣고 있던 검은 얼굴의 여행자를 보았을 때, 금빛으로 물든 첨성대를 등지고 서서 역광에 어렴풋이 실루엣을 드러낸 고분을 바라보고 있던 노란 머리의 여행자를 보았을 때,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마리아가 호스텔에서 일을 시작한지 이제 열흘째라고 했다.
여행자 수에 있어서 터키와 비교되지 않지만, 불가리아에도 나름의 '대한 국민 루트'라는 것이 있다. 소피아-플로브디브-(벨리코 터르노보/바르나). 그 루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으니 플로브디브는 내가 지난 며칠을 보낸 시골과 달리 말 그대로 유명 관광 도시로, 발칸의 몇몇 도시들처럼 관광객을 위한 무료 워킹 투어가 있었다. 여섯 시에 시작하는 투어에 참여했다. 플로브디브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구시가와 그 아래에 있는 신시가로 나뉘는데, 19세기 중반 대대적으로 재건된 구시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기원전 4천 년 무렵부터 사람이 살았다. 워킹 투어는 신시가의 우체국 앞에서 출발해 구시가의 네벳 언덕까지 걸으며 도시 곳곳의 명소들을 둘러보고 그것들에 얽힌 에피소드와 역사에 대해 듣는 프로그램이었다. 신시가에는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보행자 거리가 그 중심에 있었다. 선글라스 가게, 아이스크림 가게, 옷가게, 액세서리 가게, 화장품 가게, 은행, 환전소, 카페, 식당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모습은 여타 도시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지하에는 놀랍게도 고대 로마 시대에 지어진 거대한 경기장이 묻혀 있었다. 플로브디브는 고대 로마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그 당시 지어진 경기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용도-검투사와 맹수의 전투-로 사용되었고, 올림픽 경기의 전신인 피시아와 비슷한 경기가 열리기도 하였다. 총 240미터 길이,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경기장은, 현재 보행자 거리의 한복판에 자신의 일부분만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오가는 보행자 거리 아래 크고 오래된 몸통을 숨기고서 말이다. 그 앞에는 발칸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 중 하나라는 쥬마야 모스크가 빼꼼히 이마를 드러낸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오후의 햇빛을 받아 분홍색 광채를 내고 있었다. 이십 대 초반의 가이드는 모스크 외벽에 걸린 해시계에 대해 설명하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저들'은 '우리'가 안에 들어가는 것을 전혀 반기지 않아."
그녀의 말에 참가자 무리에서 이미 모스크 안에 들어가 보았다는 이야기가 웅성웅성 들려왔다. 가이드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운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고정관념이 어떤 작용을 한 것인지 그녀와 함께 방문한 한 교회에서는 그만 쫓겨나고 말았다. 투어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문 닫힌 교회나 모스크 안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인데 개방된 교회에서 쫓겨나다니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상상해 보세요. 교회를 지키고 있는 자그마한 노파에게 혼쭐이 난 각국의 여행자들이 우르르 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광경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민망한 표정의 가이드를 따라 신시가와 구시가를 연결하는 계단을 올라 구시가 남쪽 끝자락에 있는 고대 로마 극장으로 갔다. 극장에 서자 플로브디브 도심이 한 눈에 들어왔다. 평평한 도시 사이사이에 불쑥 솟은 언덕들, 그 언덕 사이사이에 빼곡히 자리 잡은 건물들이 기세가 한풀 꺾인 햇빛을 받아 부드러운 빛을 내고 있었다. 그 풍경에 한참 감탄을 하고 시선을 가까이 돌리니 놀랍게도 극장은 왕복 4차선의 터널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이었다. 극장을 받치고 있는 터널 속으로 수많은 차들이 빨려들어가듯 사라지는 모습이 꽤나 흥미로웠다. 극장을 떠나 다시 구시가 골목을 줄지어 걸었다. 구시가 안의 건물들은 모두 민족 부흥기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지금 막 새롭게 짓는 건물들도 그 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시대를 넘어 하나로 섞이겠지.
마지막 목적지인 네벳 언덕으로 향할 무렵 갑자기 무릎이 아파왔다. 투어에 참여하기 전 혼자서 도시를 둘러보며 구시가의 계단과 돌길을 너무 오래 걸은 탓인지, 아니면 머리에 꽃을 꽂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코프리브쉬띠쨔의 언덕을 뛰어다닌 탓인지, 이제 막 시작된 통증 치고는 몹시 고통스러웠다. 불행히도 네벳 언덕의 요새에 도착했을 때는 간신히 걸을 수 있을 정도여서 절뚝거리까지 했는데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그 무시한 통증이 온몸에 전해졌다.
해가 진 후의 구시가는 오래전에 폐쇄된 놀이공원처럼 썰렁하고 적막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울퉁불퉁한 돌바닥에, 문 닫은 기념품 가게에, 그리고 이따금 걸어오는 행인의 얼굴에 어른어른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느 도시를 가든 구시가 안에 묵기 좋아하는 나는, 이번에도 구시가에 있는 호스텔에 짐을 풀었지만 아픈 무릎을 가지고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호스텔 직원에게 가까운 약국을 물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며 열심히 알아보았지만 저녁 시간까지 문을 열고 장사를 하는 약국은 몇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한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통증과 이 와중에도 연신 꼬로륵 소리를 내고 있는 위장, 그리고 득달같이 달려가 약을 사다 줄 사람이 곁에 없다는 설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랐다.
호스텔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 침대 바로 옆 침대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지하실 방이라 침대와 침대 사이에 놓인 작은 조명을 켜고 짐을 풀고 있는데 그 남자가 다 죽어가는 소리로 '불 좀 꺼달라.'고 부탁했다. 침대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짐을 보면 여행자 같은데 어찌 이 시간에 자고 있나 싶어 마리아에게 물으니, 황당하게도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나서 며칠째 저러고 누워 있다고.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건 너무 심하게 맛있는 불가리아 음식 때문이라고. 나도 저렇게 될지 모르는 걸?"
이라고 말하고는 둘이 깔깔 웃고 말았지만, 아픈 무릎을 해서 침통한 기분으로 몸져눕기 위해 절뚝절뚝 걸어 삐걱삐걱 요란한 소리를 내는 나무 계단을 딛고 지하실 도미토리 방에 내려가 보니, 그는 그때까지도 아까와 같은 형체-백색의 시트를 뒤집어쓴 거대 새우-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여름철 가장 좋은 저녁 시간, 밖에서는 하하호호 즐겁게 모여 마시고 먹고 떠들 이 시간에 쿰쿰한 지하실 방, 그것도 하루 종일 누워 있는 병자 옆에 나란히 누울 나를 생각하니, 그리고 그가 내는 끙끙 앓는 소리와 엇박자로 내 배에서 날 꼬르륵 소리를 상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리아에게 물어 가장 가까운 식당을 찾아가 가능한 오랫동안 저녁을 먹고 다른 침대의 주인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식당에서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하루치 방값보다 더 많은 돈을 내고 약국에서 연고와 무릎 보호대를 샀다. 약국 한쪽 구석, 약사가 내준 의자에 앉아 종아리에 쫀쫀한 보호대를 억지로 밀어 넣고 있으니 '별거 다 해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어쨌거나 무릎에 물파스 냄새가 나는 연고를 마르고 보호대도 차니 다 나은 기분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절룩거리며 걷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호스텔로 가는 길, 신축 공사가 한창인 예쁜 건물 앞에서 열심히 삽질을 하고 있던 한 노인이 하던 삽질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내 무릎을 가리키며 뭐라고 물었다. 어디 다쳤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한국말로 대답했다.
“너무 많이 걸었나 봐요."
툭하면 잘 놀래고 뻑하면 잘 ‘쪼는’ 나는,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이 몸을 쉬게 해 줄 시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스텔로 돌아가 보니 옆 침대의 환자 동무가 이번에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천장을 노려보며 차렷 자세로 바르게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독방을 구하는 건데... 침대가 있어도 누울 곳이 없었던 나는 호스텔 뒷마당과 리셉션의 소파를 오가다 다리를 질질 끌고 다시 밖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하릴없이 구시가를 배회하다 한 갤러리에 들어갔다. Zlatyu Boyadzhiev라는 화가의 작품만이 전시되는 화가의 이름을 딴 갤러리였다. 20세기에 태어나 죽은 불가리아 태생의 그는 주로 플로브디브의 풍경과 사람을 그렸는데, 뇌졸중으로 반신이 마비되기 전까지 오른손으로 그린 그림과 그 후에 왼손으로 그린 그림이 어떻게 다른지 자세히 보라는 큐레이터의 말을 듣고도 구분해내지 못한 까막눈이지만, 현재의 빼곡한 도시가 아닌 지금의 코프리브쉬띠쨔와 비슷한 시골스러운 모습의, 불과 몇십 년 전의 플로브디브를 감상할 수 있어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어느덧 해 질 녘이었다. 숙소로 돌아가 그 친구가 일어났나 싶어 방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요가 매트라도 있다면 햇빛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돌바닥에 깔고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쨌거나 하루를 마감하기에 네벳 언덕만큼 좋은 곳도 없었다. 언덕에는 어제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간을 좋아한다. 해변에서든, 산에서든, 도시에서든 우리는 마치 의식을 치르듯 엄숙한 표정으로 같은 곳을 바라본다. 하늘이 붉어지고 구름이 흩어진다. 절정의 순간을 맞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탄성을 지르거나, 분주히 사진을 찍거나, 혹은 말없이 그저 바라만 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석양에 물든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는 것을 좋아하는 쪽이다. 매일 같지만 매일 다르다. 그렇게 의식이 끝나면 사람들은 놀라운 속도로 순식간에 흩어진다. 진심으로 이 시간을 좋아한다. 사람들이 떠난 언덕에는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몇몇 젊은 커플들만이 남아 서로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무릎이 삐꺽대지 않았다면, 그럼에도 마음이 쪼그라들지 않았다면 플로브디브에서 즐거웠을까.
하루 일과를 마친 마리아가 호스텔 마당에 앉아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맥주에 젖은 촉촉한 눈망울로 이렇게 말했다.
"기억나? 처음으로 배 속에 나비가 들어왔을 때? 부르르르르 그 떨림 말이야. 너무 오래되서 기억도 안 나는 거 아니지?"
잇몸까지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그녀는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