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_아멧, 발리.

발리에서 베트남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by 호텔마릴린

숙소에 짐을 내리고 해변에 어떻게 가냐고 물으니 남자아이 하나가 말 없이 앞장섰다. 숙소 아래 우리가 닿은 곳은 싸롱 한 장 펼수 없는 좁은 해변에 온통 굵은 자갈 밭이었다. 자갈에 닿은 파도가 무섭게 부서지며 거대한 소리를 냈다. 아이를 보내고 숙소로 오던 길에 보았던 잔잔하고 투명한 바다를 찾아 길을 걸었다. 많이 걸어야 한다는 각오는 했지만 얼마나 걸어야 할지를 모르니 괜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 분쯤 걸었을 때 구멍가게가 하나 나타났다. 그 앞을 지나자 가게에 앉아 있던 이십 대 초반의 한량들이 내게 소리를 질렀다.


"야, 어디가? 이리 와서 같이 놀아!"

"그러지 말고 나 좀 태워줘."

"얼마 줄껀데? 5천원?"

"아니. 3천원에 내가 원하는 만큼."

"OK!!"


"내 이름은 싸무라이. 보여? 나의 이 멋진 문신이? 이게 다 싸무라이 문신이야. 그리고 니가 지금 타고 있는 건 스쿠터가 아니고 바이크! 스쿠터는 할머니들이나 코흘리개들이 타는 거라고. 내가 키가 좀 크거든? 176. 열라 크지? 완전 크지?? 키 큰 사람들만 이런 멋진 바이크를 탈 수 있는 거야! 나 쫌 짱이지? 응? 응?"


싸무라이의 '바이크'에 앉아 해안 도로를 달렸다. 얼굴을 간지럽히는 그의 머리카락에서 기분 좋은 샴푸 냄새가 났다. 아멧이 끝나는 곳까지 가 보았다. 중심가에 있는 다른 숙소를 알아볼 생각이었지만, 아멧에는 '중심가'라는 곳이 없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 가던 길에 보았던 전망대에서 내려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괜찮겠어, 뷰티풀? 여기서부터 니네 숙소까지 엄청 걸어야 하는데? 나야 뭐 상관없지만!"



전망대에서, 싸무라이에게 돈을 건네고 돌아서자 분홍색 얼굴의 중년 남자가 나를 맞았다. 싸무라이와 나의 거래를 줄곧 지켜보고 있었던 그의 첫 말은 이러했다.


"여기 정말 아름답지 않니? 근데 나 좀 도와줘!"


그가 나에게 건넨 것은 조그마한 카메라.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서 카메라를 바위 위에 올려 놓고 셀프타이머를 맞춰 보았지만 뜻대로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혼자 여행하다 보면 자연스레 혼자 여행 온 사람을 찾게 된다. 나 말고 또 누가 심심한지, 나처럼 또 누가 외로운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바다를 보고 있자니 물 속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스노쿨링을 해야겠어요. 장비 빌리는데 알아요?"


그가 대답했다.


"나한테 두 개 있지롱."

우리는 내가 묵는 숙소에 들러 그의 짐을 내려놓았다. 꼭 필요한 것만 챙기라는 그의 말에 썬크림과 수건, 물을 비닐 봉지에 담아 전망대 위에서 내려보았던 그 해변으로 갔다. 바닷가에는 작은 와룽이 두 개 있었다. 오토바이 헬멧과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그 중 한 곳에 맡겼다. 오후의 태양에 한껏 달궈진 검은 자갈을 까치발로 걸었다. 껍질이 벗겨질 것 같았던 발바닥을 바다물에 담그니 물은 놀랍게도 차가웠다.


"너는 내 오른쪽에서 따라와"
"왼쪽에 있을래요. 나는 그게 익숙해"


그에게서 건네받은 고글에 침을 퉷! 하고 뱉었다.


"으에에에엑"
"미안해요."

쉬익 쉬익. 들리는 소리라고는 나의 숨소리 뿐이었다. 바다는, 바다라는 이름만으로도 무섭고 아름답다. 두렵지 않다고, 일 분만 헤엄치면 닿을 거리에 해변이 있다고 머릿속으로 되뇌다가, 처음 만난 어르신을 따라 이렇게 물고기를 쫓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생각이 미쳤다. 빨갛고 노란 물고기들이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기다란 물고기가 은빛 몸을 번쩍이더니 이내 저 멀리 사라졌다. 과자 부스러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호주 퍼스에서 왔다고 했다. 14살 짜리 아들이 있고, 이혼한 마누라는 몇 해 전에 독일 남자와 재혼했다고. 퍼스 이야기, 호주 이야기, 호주에 있는 한국 사람 이야기, 그가 하는 일 이야기, 여행 이야기, 아들과 함께 한 마지막 여행 이야기...


"어디가 좋던가요? 나는 가 본 데가 별로 없어요."
"베트남."
"으응? 베트남에 사기꾼 엄청 많다고 하던데요?"


베트남 여행을 계획하다가 여기저기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기꾼 이야기에 마음을 접었던 나는 의아했다.


"베트남 어느 해변에서 놀고 있는데 십 대 여자아이 둘이 파인애플을 팔러 왔어. 아침 먹은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라 우린 별로 먹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는데, 다른 데 가지 않고 계속 말을 거는 거야. "두 유 원 썸 파인애플?" 그러더니 그냥 우리 앞에 앉더라? 우리는 그 다음날 오토바이를 타고 다른 도시로 가려고 했는데 지도도 뭐도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서 그 아이들한테 거기 어떻게 가냐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그 중 한 아이가 자기 가방에서 지도를 하나 꺼내는데, 그 지도가, 왜, 서점에서 파는 여행지도 있지? 그 정도로 좋은 지도였어. 그래서 "이거 얼마야? 내가 살께." 라고 말하니, 아이가 하는 말이, "그냥 가져. 나는 그거 필요없어." 라고 하지 뭐겠어? 그냥 가질만한 그런 지도가 아니여서 지갑을 꺼내서는 "지도 값 얼마줄까?" 계속 물었다? 그런데도 무심하게 자기는 지도 필요 없다고. 그냥 가지래. 그러더니 하는 말이 뭔 줄 알아?"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새를 못 참고 내가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뭐라 그랬냐면... "두 유 원 썸 파인애플?""

"맙소사!"

"그들은 한 번도 여행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들에게 지도는 그저 종이에 불과했던 거야. 너무 슬프지 않니? 여행객들에게 파인애플을 팔면서 걔네들은 한 번도 여행이라는 걸 해 본적이 없다는 게. 그래서 우리는 그 다음날 아이들 가족을 다 데리고 소풍을 갔어. 얼마나 잼있었는지 몰라."


아궁산 가까이 해가 내려왔다.


"또 한 번은..호텔 밖, 길에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방에 돌아왔어. 내가 방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어. 프론트였는데, 혹시 지갑 잃어버리지 않았냐고 묻더라? 지갑을 찾아보니 정말 지갑이 없는 거야. 그래서 프론트에 급하게 내려갔지. 지갑에 돈이 꽤 많았거든. 거의 700불 정도. 나는 고마운 마음에 호텔 직원에게 팁을 주려고 했는데 그가 두 손을 모으며 하는 말이, 자기가 지갑을 찾은게 아니라고, 저기 지금 나가고 있는 사람이 찾아다 준 거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그 사람들을 쫓아가서 불렀어. 정말 고맙다고, 사례하고 싶다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데 젊은 청년이 웃으면서 손사레를 치네. 그는 영어를 전혀 못했고 그 옆에 있는 여자친구가 영어를 조금 하길래, "남자친구한테 전해줘요. 감사의 표시니까 받아 달라고. 이걸로 여자친구 예쁜 옷 하나 사주라고요." 라고 말했지만 소용없었어. 그들도 역시 두 손을 모아 인사하고는 가버렸지 뭐야."

이제 그의 얼굴은 주황색이 되었다.

맡겨둔 헬멧과 슬리퍼를 찾으러 와룽에 갔다. 와룽의 젊은 여자는 주방에서 커다란 물고기를 들고 나와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아까 바닷속에서 나를 지나 저 멀리로 사라진 그 은빛 찬란했던 물고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