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이고 싶은 서쪽, 발칸_[29]
코소보. 한 나라의 이름으로서 이보다 더 다양한 반응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유럽 안에 또 있을까. 인도 자이푸르에서 공장 감독관으로 일하다 인도인에게 질려 회사를 때려치우고 여행길에 나선 일본인 여행자는 그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곳이냐고 도시 이름이냐고 나라 이름이냐고 물었다. 석사 학위를 위해 아일랜드에서 공부했다는 한국인 과학도는 아직도 전쟁 중이지 않냐며 화들짝 놀랐다. 유치원에서 부잣집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영국인 교사는 흥, 무슬림 거지들이나 사는 나라라며 비아냥거렸다. 몬테네그로에 사는 세르비아계 택시 기사는 거짓말쟁이와 사기꾼의 나라라고 말하며 허공에 대고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마케도니아 스코페의 채소 시장에서 토마토를 파는 무슬림 상인은 여행하기 안전하고 볼 것 많은 곳이라 추켜세웠다. 마케도니아 카바다르치의 드라가나 가족은 매우 위험한 곳이니 항상 조심 또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여전히 세르비아와 대치 중인 코소보의 미트로비챠를 구경하고 돌아온 미국인 여행자는 탱크를 배경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군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며 100% 안전한 곳이라고 거들먹거렸다. 호스텔에서 만난 대부분의 젊은-백인-여자-여행자들은 코소보에 간다는 나를 무슨 대단한 모험가 보듯 했다. 코소보에 대한 가지각색의 의견과 반응이 조금씩 쌓일수록 그곳에 대한 나의 기대 역시 점점 커져갔다.
코소보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마케도니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고 그 중 세르비아와의 국경이 거의 절반에 이른다.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세르비아는 국경 통과에 대해 조금 이상한 규정을 가지고 있어서, 세르비아→코소보→세르비아의 출입국은 허용되나, 마케도니아에서 코소보로 이동한 나의 경우와 같이 제3국→코소보→세르비아의 입국은 금지하고 있다. 몬테네그로-코소보 간의 국경은 그 길이도 짧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험난한 산들이 가로막고 있어 이동이 쉽지 않고, 알바니아-코소보의 경우는 알바니아의 주요 관광 도시들이 남서쪽에 몰려 있기 때문에 북동쪽에 위치한 국경까지의 거리가 멀다. 하여 코소보를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가 코소보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스코페 출발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 행 버스는 삼십 분마다 출발, 한 시간 반이 걸리고, 코소보 제 2의 도시 프리즈렌 행 버스는 한 시간마다 출발, 두 시간 반이 걸린다.
스코페에서 출발한 버스가 코소보 국경에 도착하기까지 채 이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국경이었으니 시내버스로 다녀왔던 마트카 계곡보다도 더 가까운 거리였다. 국경 검문소에서는 다른 국경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버스 기사가 한꺼번에 여권을 걷어 갔다가 돌려주는 식이었다. 코소보 땅에 들어섰다고 해서 무언가 드라마틱한 풍경이 창 밖으로 펼쳐진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 지구적으로 유명한 발칸 여행 전문 미국인 블로거는 '코소보로 가는 길 어렵지 않아요.'식의 제목을 단 글에서, 스코페에서 프리즈렌으로 가는 길이 비록 구불구불하고 험하지만 환상적인 경치를 볼 수 있다며 잔뜩 기대를 갖게 했는데, 막상 그 길은 그저 소박하고 평범한 시골 도로였다. 하여 도대체 환상적인 경치는 언제 나타나 주는지, 행여나 내가 깜빡 잠든 사이에 잠깐 등장했다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닌지 싶어 코소보에 들어 온 이후 내내 눈을 부라리며 한순간도 한눈팔지 않고 창 밖을 노려보았지만, 역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그녀는 아마도 굉장히 호들갑스러운 성격이거나 긍정적인 사고를 즐기는 성품이란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녀 옆자리에 앉은 향기롭고 잘생긴 코소보 남자가 프리즈렌으로 가는 내내 그녀의 귀를 핥아줬던가.
21세기에 전쟁을 치른 나라, 남수단 이전 가장 최근에 생긴 독립국, 전쟁의 흔적을 여전히 안고 사는 나라, 발칸의 최빈국 등등 코소보를 수식하는 모든 말들이 무색하게 도로의 상태는 매우 훌륭했다. 특히 프리슈티나와 스코페를 연결하는 M2번 고속도로를 달릴 때는 버스 타이어와 아스팔트의 마찰음이 얼마나 고르고 부드럽던지 나도 모르게 오! 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버젓이 보이는 주요 도로와 그 주변만 놓고 본다면 코소보가 발칸의 최부국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코소보의 도시 외곽 풍경은 알바니아의 그것과 같았다. 넓은 초지 한가운데 갓 지어 올린 파스텔 톤의 예쁜 집들이 점처럼 박혀 있었는데 대부분이 소박한 크기의 이층집이었으나 열 중 셋은 꽤나 웅장한 크기에 울타리, 마당, 조경까지 신경 쓴 모습이었다. 코소보는 알바니아와 참 많이도 닮은 모습이었다. 그것은 비단 파란색의 코소보 국기보다 더 자주 볼 수 있었던 빨간색의 알바니아 국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절반쯤 왔을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둑 후두두둑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내리던 비는 이내 하늘을 찢고 땅을 뚫을 듯한 기세로 쏟아졌다. 그러다 순간 정적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렇지, 그 정도면 충분하지, 바닥이 났겠지 싶었다. 하지만 불안한 고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쏟아지고 삼켜지고의 끝 모를 반복 속에 버스가 프리즈렌의 버스터미널로 이제 막 머리를 들이밀었을 때는 재수가 없게도 쏟아지기의 차례였다.
비는 날이 캄캄해진 뒤에야 그쳤고 밤새 꽤나 추웠다. 해가 막 떠오를 무렵에는 아침 공기가 조금은 상쾌했지만, 사람들이 하루 일과를 시작함과 동시에 매캐한 자동차 매연이 도시를 뒤덮었다. 나는 대니 드 비토를 꼭 닮은 중년의 스페인 여행자로부터 물려받은 지도를 들고 산책을 시작했다. 지도는 툭하면 문이 잠겨 있던 여행자센터에서 그가 운 좋게 얻어 온 것이었다. 지도에 따르면 구시가와 그 주변 지역에 스무 개의 모스크와 열한 개의 교회가 있었다. 나는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돌다리에서 성채가 있는 구시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돌다리는 15세기 오토만 시대의 것을 복원한 것이라고 했다. 다리를 건너 돌길을 따라 걸으면 하늘로 솟은 거대한 미나렛 때문에 멀리서도 절대 놓칠 수 없는 시난 파샤 모스크가 그 웅장함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사방으로 길이 난 작은 광장이 탐스럽게 우거진 가로수 아래 그늘져 있었다. 광장의 카페와 레스토랑들은 차이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로 이미 북적였다. 나는 피자 가게와 아이스크림 가게, 선글라스 가게, 중국 식당을 지나 오래 되거나 혹은 새로 단장한 교회와 모스크 몇 군데를 둘러본 다음 성채로 이어지는 골목에 접어들었다. 골목의 초입을 조금 벗어나자 길바닥의 상태는 엉망이 되었는데 돌부리에 걸려 앞니가 깨지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온 신경을 발끝에 집중해야 했다. 그렇게 오르막길을 걷다 고개를 들어 보면 주변의 건물은 거의 폐허에 가까운 처참한 모습이었다. 길에는 쓰레기 천지였고 무너진 건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11세기에 지어졌다는 오래된 성채와 연결된 길이 이 정도니 성채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짐작이 되었지만, 다리가 후들거리고 발바닥이 쿡쿡 쑤시고 개처럼 땀을 흘리며 헐떡거리면서도 나는 걷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일상생활에서와 여행지에서의 근성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다. 그 성채로 향하던 길에 비하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금호동 산동네는 금실로 짠 융단이 깔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디든 나가려면 오르막을 적어도 한 번은 올라야 한다는 사실이 몹시 귀찮게 여겨져 길게는 일 주일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적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흙무더기에 돌덩어리들이 박혀 있는 성채에 오르고 나서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오토만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에 대해서 터키에 가 본 적이 없는 여행자가 내린 평가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구시가 관광지에서 벗어나 주택가를 걸었다. 좌로 우로 아무렇게나 꺾여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골목에서 한 아저씨는 집 앞에 세워 둔 차를 정성스레 닦고 있었고, 동네 꼬맹이들은 떼 지어 이해할 수 없는 놀이에 빠져 있었다. 잡기 놀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숨기 놀이도 아닌 알 수 없는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곧 나를 발견하고는 내 꼬리에 붙어 브루스 리와 재키 찬의 흉내를 거칠게 내기 시작했다. 나는 일고여덟 살쯤 되는 나이의 사내아이들을 매우 무서워하는데 그들은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그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바보 짓인지도조차 모르고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간 고맙게도 내 꼬리에 붙은 수많은 브루스 리와 재키 찬은 동네 아저씨가 떼어냈다.
보라색 하늘에 한쪽이 찌그러진 달이 뜨자 도시는 제법 아름다운 모습이 되었다. 언덕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성채는 조명을 받아 꽤 근사해 보였고, 도시를 가르는 비스트리챠강에 둥둥 떠 있던 수천 개의 플라스틱 쓰레기도 어둠이 숨겨 주었다. 강변 산책로를 따라 조잡한 기념품이나 옥수수를 파는 장사꾼들이 좌판을 펼쳤고, 집시 아이들은 텅텅텅 공허한 소리가 나는 북을 치며, 저녁 산책 시간을 맞아 한껏 멋을 낸 채 강변을 왔다 갔다 걸으며 서로를 힐끔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돌아다녔다. 나는 짧은 밤 산책을 마친 후 갓 개업한 가게에서 2유로짜리 쿰피르로 저녁을 먹었다. 중년의 부부가 운영하는 그 작은 가게에서 나는 유일한 손님이었다. 야외 탁자에 앉아 바람에 실려오는 나뭇잎 냄새를 맡으며 포크로 감자를 으깼다. 내가 내 머리통만큼 커다란 쿰피르를 먹는 내내 부부는 가게 안에서 유리창 너머로 한순간도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