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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Mar 02. 2016

유럽의 놀림감이 된 사연_스코페,마케도니아

구글의 자동 완성 검색어 중에 이런 것이 있다.

'how many statues in Skopje'


스코페를 여행한, 혹은 스코페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나 역시 물었다.

“도대체 몇 개나 있는 거야?”

혀를 끌끌 차고 고개를 저으며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걸 누가 알겠어?”


1963년 대지진으로 도시의 80%가 무너졌고 도심부의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 역시 대부분 파괴되었다. 스코페는 일본 히로미사 원폭 이후 도시 계획을 맡아 진행했던 일본인 건축가에게 도시의 재건을 맡겼는데, 그는 그 당시의 유행에 따라 거대한 콘크리트나 철재 블록 등이 고스란히 드러난 학교와 기하학적 외관의 건물들을 결과물로 내놓았다. 유고 연방이 해제되고 스코페가 독립국 마케도니아의 수도가 되면서 유고 시절 한낱 지방 도시 중 하나에 불과했던 이곳은 한물간 유행의 겉모습을 벗고 한 나라의 수도로써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그들의 존재를 확실히 알릴 '무언가'가 절실했다. 하여 정치인들, 그들과 돈독한 관계에 있었을 것이 분명한 건축가들, 역사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끝에 스코페는 새 단장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름하야 'Skopje 2014' 프로젝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2014년 완료가 목표인 프로젝트는 4년 전 시작되었다. 프로젝트의 모토는 대강 이러했다.


'단번'에 모든 이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기똥차게 멋지고, '유서 깊고', '전통 있는' 건축물을 '단시간'에 만들어 우리 도시와 찬란했던 우리의 역사를 온 세상에 알리세!

 

프로젝트 구상 당시 스코페가 롤 모델로 삼은 도시는 두 곳이었다. 하나는 1997년 문을 연 '구겐하임 미술관' 덕에 환골탈태한 스페인의 빌바오이고, 다른 하나는 다수의 신고전주의 건물의 아름다운 조화로 '2008년 유럽 문화 도시'로 선정된 영국의 리버풀이었다. 애초의  총예산은 우리 돈으로 1,100억 원에서 7,000억 원이었다고 한다. 무슨 나라 예산을 저렇게 광범위하게 잡는지 잘 이해는 되지 않으나 암튼 그랬다고 한다. 2013년 봄까지 공사에 투입된 돈은 2,700억 원이라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으나,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야당에 의하면 실제로 정부가 쏟아부은 돈은 10억 유로, 우리 돈으로 1조 4천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유럽뿐 아니라 전 지구에서 봤을 때도 가난한 나라, 높은 실업률에 허덕이는 나라가 단순히 몸치장을 위해 쓰기에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이다. 기억나나요. 마케도니아의 최저 임금이.


어쨌거나 돈을 확실히 쓴 덕분인지 스코페 도심에는 온갖 크기의 조각품들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로 산재해 있었고 도심을 가르며 흐르는 바다르 강변에는 신고전주의 혹은 바로크 양식이라고 토시를 단 뮤지엄, 정부 청사, 국립극장 등이 2014년 여름 현재 지어졌거나 한창 지어지고 있었다.


이제부터 왜 공무원 나으리들과 건설업자들이 '짜웅'하면  안 되는지, 어쩌다가 스코페가 유럽의 놀림감이 되었는지를 보시어요.

   

경고



강이라고 부르지만 강이라고 하기에는 물도 없고 좁은 개천에 이런 거대한 배가 네 척이나 있었는데 우스꽝스럽게도 해적선 모양으로 완성된 배는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있자니 오세훈 서울 시장 시절의 한강 세빛둥둥섬이 머릿속에 떠올라 스코페 시민들과 마케도니아 국민들에게 애틋한 동지애가 느껴졌다.



지금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모두 다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지난 4년 동안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이렇게 생긴 다리가 한 개 더 있다. 하나의 다리 난간 위에는 현대 예술가들의 동상이 촘촘히 세워져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역사 속 혹은 신화 속 영웅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거대한 동상 뒤에 또 다른 동상.



거대한 크기는 왼쪽 아래 참새를 보고 짐작해 보세요. 뒷걸음질을 치며 그것들을  올려다보느라 눈을 하도 치켜뜨고 고개를 있는 힘껏 젖혔더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프로젝트로부터 자유로운 구시가 안으로  들어갔다.



오토만 시대의 모습을,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구시가 시장통에는 검은 그을음이 잔뜩 낀 케밥 집의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아이스크림 가게 한편에는 곡물 음료 보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넘칠 듯 찰랑거리는 차를 쟁반에 담아 맵시 좋은 몸놀림으로 골목을 누비는 차 배달원들은 한가히 가게 문간에 기대어 길가는 행인들을 구경하다 아무나 붙잡고 차이를 권하며 호객을 하는 상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당연히 빠지지 않는, 한 집 건너 하나 꼴의 남성 전용 뷰티 쌀롱까지.



구시가 끝자락 큰길에 면하고 있는 채소시장은 파장 준비를 하고 있었다. 큰길을 가르는 육교에 올라가 보았다. 한쪽으로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큰 규모의 시장이 양철 지붕 아래 천막을 늘어트렸고, 길 건너편에는 이쑤시개를 꽂은 시식 코너의 맛보기 음식들처럼 올망졸망한 집들 사이로 크고 작은 미나렛이 솟아 있었다. 시장 구경을 하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200원짜리 아이스크림 하나로 달래며 육교를 건너 가장 높고 굵은 마나렛을 향해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름도 거창한 신고전주의와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있는 강가 도심에서 불과 15분 거리의 이 거주 구역은 도심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좁고 낡고 닳고 여기저기 기워진 동네. 나를 보고 골목에서 놀던 꼬맹이 하나가 다가와 살갑게 인사를 했다.

 


멀리서 봤을 때 유난히 돋보였던 벽돌색 시계탑 미나렛은 가까이 가서 보니 놀랍게도 아랫부분이 콘크리트로 덧발라져 있었다. 아이들의 안내로 모스크 안 마당까지는 들어갔으나 동네의 모습처럼 추레하기  그지없었다. 모스크의 이름은 '술탄 무랏'으로 15세기에 지어진 것. 초록색 바지를 입은 여자아이가 영어를 굉장히 잘 했는데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꺄악 소리를 지르며 소녀시대와 씨스터인지 씨스타인지에 대해 열을 내며 조잘거렸다. 소녀시대든 씨 뭐든 간에 마케도니아 스코페의 가난한 동네에도 그들의 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길 바란다. 며칠 전에 포경수술을 하고 이제는 좀 살만 했는지 저 꼴로 놀러 나온 남자아이를 대하는 여자아이들의 반응이 담담하고 자연스러워 인상적이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이던 내 어린 시절에  남자아이들과의 관계가 저랬다면 쓸데없이 남자 혹은 왕자에 대한 몽상 따위를 하느라 아까운 소녀 시절을 허비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호스텔 스탭이 건넨 스코페 지도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어서 왠지 구경하러 가지 않았다가는 중대한 볼거리를 놓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악착같은 마음으로 요새에 올랐다.



하지만 짓밟혀 땅바닥에 납작 붙어 있는 잡초 위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돌 무더기 사이로 난 흙길을 먼지 폴폴 일으키며 한참을 걸은 후에야 요새의 가장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언덕에 자리한 요새의 안쪽에는 피로연 전문으로 보이는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들어왔던 입구 외에는 나가는 길이 없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나와야 했다. 요새는 6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시장으로 돌아와 이른 저녁을 먹었다. '마케도니안 콩'이란 이름의 이것은  토마토소스에 강낭콩 류의 퍽퍽한 콩을 넣고 끓인 것으로 어느 가게에나 있었고 매번 이렇게 뜨거운 토기에 담아 주었다. 1,600원.




"뭐니 뭐니 해도 스코페는 야경이지!"

호스텔 스탭의 말에 해 질 녘에 시작된 비가 그치길 기다렸으나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관광객의 신분에 맞게 우산을 쓰고 밤 산책에 나섰다.

  


독립국 마케도니아의 첫 번째 국기는 빨간 바탕에 16개의 햇살 줄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90년대 중반에 지금의 8개 햇살 줄기로 바뀌었다. 이유는 그리스의 강력한 반발 때문이었는데, 16개의 햇살 줄기가 지금까지도 국적 시비가 있는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과 관련된 문양이란 이유에서였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라는 국명 역시 마케도니아에서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하여간, 스코페 한 대학의 도시설계학 교수이자 현재의 마케도니아 국기를 디자인한 그르체브 교수는 '스코페 2014' 프로젝트가 공공장소와 문화, 도시계획과 예술, 그리고 시민들에 대한 '범죄'라고 주장하는 다수의 반대자 중 하나로, 괴기스럽고 해괴망측하게 변하고 있는 스코페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스코페 도심에는 가지 않아요. 내가 그 괴물 같고, 죄스러운 돌기둥들과  '조각품'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것들 앞을 어쩔 수 없이 지나가야만 할 때는 고개를 떨구고 내 신발 앞 코만 보고 걸어요. 죽은 사람이 걷는 것처럼요."

  


근현대의 작가, 화가, 음악가 등이 총망라된 다리 1번. 이 다리에만 무려 29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대머리 아저씨와 한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가 이 무리에 끼지 못했다면 접시에 코 박고 싶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머리에 월계수 관을 쓰고 흘러내리는 듯한 주름의 천을 어깨에 두르고 가죽 샌들을 신은 우리가 흔히 아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과 비슷한 복장의 역사 속 영웅들이 다리 2번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바이올린이나 빨래뜨, 펜 등을 들고 있는 예술가들의 다리 1번에서는 이보다 더 기이한 다리가 있을까 싶었는데,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 사는 모습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 맞다. 정치인들, 공무원들 하는 짓만 봐도 어쩜 이리 닮았는지.

 


현 외교부 장관의 말에 의하면, 지난 십 년에 걸쳐 외국 관광객이 세 배로 증가했고 그것은 다 도시가 이렇게 아름답게 변했기 때문이라고 하니 손님 없어 애타는 속을 담배로 달래는 이 상인도 내일은 신나게 말을 돌리기를.

 


오토만 다리라고 불리는 돌다리에 서면 스코페에서 가장 큰 동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 프로젝트 초기 공모전을 통해 선발된 무명의 여자 조각가의 작품이다.

  


동상이 하도 커서 막상 동상 가까이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동상 밑 분수 주변을 아무리 뱅뱅  돌아보았자 보이는 것이라고는 말 발바닥과 말 궁둥이가 전부.

 

  

개선문과 닮은 저 작품의 이름은 '마케도니아의 문'.


  

이것 또한 공모전에서 우승한 그녀의 작품. 알렉산더와 말에서 불과  몇십 미터 떨어져 있다. 풍문에 의하면 이 두 작품에 들어간 돈만 이백억 원이라고.

 


나를 질리게 한 것은 이랬다. 커다란 가슴, 잘록한 허리에 빵빵한 엉덩이를 짧은 팬츠로 아슬아슬하게 가린 채 도도히 걷고 있는 동상을 보고 돌아서면, 갑옷을 입은 근육질 전사들을 호위하듯 지키고 서 있는 사자의 거대한 불알에 그만 코를 박고 마는 것이다. 스코페는 마치 100세 할머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초 100개를 꽂아 놓은 초코파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난립한 동상들에게서 벗어나 잠시라도 호젓이 '스테츄-프리' 거리를 산책하나 싶었으나

  


이내 거대한 스탠드가 나타났고, 이것을 보자 그만 숙소로 돌아가 침대에 눕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시 외곽 터미널 근처의 호스텔로 향했다. 오늘 밤에 만난 가장 정상적인 풍경.



마트카 계곡에서 하루를 보내고 스코페를 떠나던 날, 구시가 골목길을 이리저리 걷다가 채소 시장에 갔다. 차가운 구리에 박제되어 곧 산화될 운명의 유령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곳. 시장은 쿰쿰한 악취를 풍기다 이내 싱그러운 향기가 났고, 소리 높여 언쟁을 벌이다 금세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장을 보러 온 사람들에 발이 밟히고 좁은 통로를 지나느라 팔꿈치에 옆구리가 찔려도 펄떡펄떡 뛰는 살아있는 사람들 속에 있으니 스코페가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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