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가 벌어진 곳, 1876년 강화도 조약 부록에 의한 조선 최초의 근대 개항장, 일제 강점기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한 거점으로 삼은 도시, 한국전쟁 당시 임시 수도, 1970~80년대 대한민국 경제와 함께 성장한 항구 도시, 2002년 아시안 게임 개최지, 2005년 APEC 정상 회의 개최지, 2011년 세계 개발 원조 총회 개최지.
이 모든 수식어가 가리키는 곳은 단 한 곳, ‘부산’이다. 이렇듯 부산은 대한민국 역사의 많은 중요한 순간의 배경이 되어 왔다. 구호 물품을 조달받던 곳에서 개발 원조를 위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국제회의의 개최지가 되기까지, 부산은 그야말로 역동적인 역사의 길을 걸어왔다.
그를 대변하듯 도시 브랜드 슬로건 또한 ‘Dynamic Busan’이지만, 부산을 여행하는 이들 중 곳곳에 녹아든 역사의 흔적을 찾는 여행자는 흔치 않다. 그래서 준비해봤다. 맛집도 볼 것도 많은 이 도시에서 대한민국과 부산의 ‘역동적인’ 과거와 현재를 엿볼 수 있는 장소들. 지금 바로 떠나보자. 단디 잘 따라오이소.
부산에는 구석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이 조각들을 모두 보고 느낄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짧은 시간에 모두 돌아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빠듯한 1박 2일의 여행 일정, 임진왜란 이후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큼직한 역사의 조각들만 모아 보았다. 추천 path는 여행의 편의를 위해 부산역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나누었다.
부산역에 도착해서 역사(驛舍)로 나오면 많은 상점이 눈에 띈다. 그중 최근 여행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가게는 단연 ‘삼진 어묵’. 대전역에 튀김 소보로가, 경주역에 찰보리빵이 있다면 부산역에는 삼진 어묵이 있달까?
삼진 어묵은 1953년부터 부산 영도에 본사를 두고 운영되고 있는 삼진 식품에서 새롭게 선보인 신개념 어묵 베이커리다.
다시 말해 가게는 새로 생겼지만, 어묵 맛은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이곳에서는 그날 만든 빵이 아닌 어묵을 종류별로 골라서 구입할 수 있다. 추천 메뉴는 다양한 종류의 어묵 고로케.
부산 어묵은 부산항의 개항과 함께 일본인들이 부산에 대거 정착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일본인에게 어묵 제조법을 전수받아 시작된 부산의 어묵 사업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많은 피난민이 유입되면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삼진 식품이나 영진 식품과 같은 기업들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많은 어묵 공장이 들어섰다. 1970년대 경제 발전기에 이르러서는 설비도 상당 부분 자동화되면서 부산 어묵 업계는 호황기를 누리게 되었다.
어묵으로 배도 채웠겠다 소화도 시킬 겸 자성대공원으로 향하자. 지하철보다는 부산역 앞에서 바로 버스를 타면 훨씬 편하게 갈 수 있다.
부산진지성을 부르는 ‘자성대’라는 이름은 부산진성을 모(母)성이라 부르고, 이곳의 성을 자(子)성이라 이름 붙인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지금의 공원 부지는 도로와 건물에 둘러싸여 있지만, 과거에는 해안가였기 때문에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외적에 가장 먼저 대응하는 곳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1592년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인 ‘부산진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부산진전투는 조선군의 완패로 돌아갔지만, 병력, 식량, 무기가 모두 부족한 상황이었음에도 결사 항쟁했던 정발 장군의 임전무퇴 정신이 빛나고 있다.
진지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일부를 헐고 일본식 성을 쌓아 지휘소로 사용되었고, 후에 일본으로 조선통신사를 파견했을 때에는 그들을 위한 제를 올리거나 연회를 여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모든 건물이 철거되었지만 1974년부터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1975년 지금과 같은 공원이 조성되었다.
공원은 그야말로 수많은 역사의 흔적이 가득하다. 장군의 지휘소로 쓰였던 장대(將臺)인 진남대(鎭南臺)와 임진왜란에 참가한 명나라 장수 천만리를 기리는 천장군 기념비, 최영 장군의 사당인 최영 장군 비각이 모두 공원 안에 있다.
부산진성 근처에 있던 유적을 복원해둔 영가대(永嘉臺)까지 구경하고 나면 뒤편으로 조선통신사 역사관을 볼 수 있다. 역사관은 임진왜란 이후 12차례 일본으로 파견된 조선통신사에 대한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가득해 아이와 함께 둘러보기에도 좋다.
조선통신사 역사관에서 나와서 ‘조방 앞’으로 향해 본다. ‘조방’이라는 이름은 1917년 일제가 설립해 1968년까지 이곳에 있었던 동양 최대 규모의 면방직 회사 ‘조선 방직’의 줄임말이다. 조선 방직은 식민지 시대 일제의 가혹한 노동 탄압으로 악명을 떨쳤다.
저임금, 장시간의 열악한 노동 조건에 반발해 노동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고, 1943년 조선 방직 파괴를 시도하다 체포된 독립 운동가 이광우의 아들이 1인 시위를 하며 명칭 변경을 요구했지만 그 이름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광복 이후에는 조선 방직이 사라지고 원목을 수입하여 가공하는 회사들의 원목 창고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부산진시장, 자유시장, 평화시장, 중앙시장 등 다양한 재래시장이 모여있고 귀금속 가게들이 밀집한 ‘귀금속 거리’도 형성되어 있다.
범일동에서 문현동에 이르는 이 지역은 개발이 되지 않아 여전히 7·80년대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영화 ‘친구’의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 구경도 잠시, 조방 앞에 왔으니 꼭 먹고 가야 할 음식이 있다. 바로 ‘조방 낙지’로 통하는 낙지 볶음.
낙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조방낙지의 ‘조방’이 바로 이곳, 범일동 조방 앞이다.
골목골목 많은 낙지 볶음 음식점이 보이지만 부산 토박이들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한 곳 ‘원조 할매 낙지’. 간판에서부터 자부심이 느껴진다.
전골이나 볶음류는 보통 2인 이상부터 주문이 가능하지만 이곳은 1인 주문도 가능하다. 가격도 저렴한 편. 음식이 나올 때 아주머니께 김을 달라고 하면 밥과 함께 비벼 먹을 수 있는 김을 공짜로 주신다.
매콤한 낙지 볶음으로 든든하게 식사를 해결하고 향하게 될 다음 장소는 유엔기념공원이다.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로 세계 평화와 자유의 대의를 위해 산화(散花)한 유엔군 장병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년 1월에 전사자 매장을 위해 유엔군 사령부가 조성했으며, 같은 해 4월에 완공되어 전국 각지에 임시매장되어 있던 전사자들이 이곳에 안장되기 시작했다.
1955년 11월 대한민국 국회는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 토지를 영구히 유엔에 기증하고 묘지를 성지로 지정할 것을 결의한다.
재한 유엔 기념 묘지라는 명칭으로 출발하였으나, 친숙한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2001년 3월 재한 유엔 기념 공원으로 한국어 명칭을 변경하였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많은 지역 주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이미 유엔 기념 공원에 방문한 경험이 있다면 2014년에 새로이 개장한 부산 시민 공원으로 가보자. 유엔 기념 공원 못지않게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장소다. 일제 강점기 이곳에는 일본 유력 자본가에 의해 경마장이 세워졌고 광복 이후부터 2006년까지 주한 미군의 기지로 사용되며 ‘캠프 하야리아’라는 이름으로 주한 미군의 역사를 함께 해왔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주한미군 사령부는 서울 용산으로 옮겨갔으나, 하야리아 캠프는 주한미군의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보급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 수행하였다.
지정학적으로도 부산항은 군병력과 물자 수송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하야리아 캠프의 역할은 그만큼 컸다.
하지만 1995년 즈음 캠프 하야리아 이전 및 부지 반환을 위한 각종 시민·사회단체가 결성되면서 시민 공원 조성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한·미 간 관련 협정을 상호 타결함으로써 2006년 부지를 폐쇄했고, 2014년 5월 1일에 부산 시민 공원으로 새롭게 개장하였다. 공원 내부에 있는 역사관에서는 공원 부지의 변천사와 인근 주민의 생활사가 상세하게 전시되어 있으므로 관심이 있다면 방문해보자.
부산에 왔으니 바다 구경은 필수. 부산에는 많은 해수욕장이 있지만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해운대 해수욕장’일 것이다. 필자의 추천 여행지는 그 유명한 해운대 해수욕장 옆에 위치한 동백섬이다.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에서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이라는 가사의 동백섬이 바로 이곳.
‘해운대’라는 지명의 유래는 통일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유학자였던 최치원 선생이 낙향하는 길에 이곳의 뛰어난 해안 절경에 반하여 동백섬의 바위에 글을 새겼다고 한다.
자신의 자(字)인 '해운(海雲)’을 따서 새긴 글이 바로 해운대(海雲臺).
지금까지도 동백섬에는 최치원 선생의 동상과 시비(詩碑), 그리고 최치원 선생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해운대 석각이 존재한다. 해운대 석각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5호로도 지정되어 있다.
인어 나라 미란다국에서 무궁 나라 은혜 왕에게 시집온 황옥 공주가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황옥(黃玉)에 비친 고국을 보며 그리움을 달랬다는 황옥 공주 설화가 담겨있다.
일부 향토사학자는 황옥 공주가 바로 대가야국 김수로왕에게 시집왔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후라고 보기도 한다.
인어상을 지나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걷다 보면 등대가 보인다. 등대 바로 옆의 출입구는 APEC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던 누리마루로 이어진다.
APEC 이후 부산시는 회의 당시 정상들이 모여 앉아 회의를 진행한 미팅룸과 관련 전시실 등 내부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게 개방했다. 정상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했던 공식 포토존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국가별로 국가원수가 어디에 서서, 누구 옆에서 사진을 찍었는지 구경하고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광안리 해수욕장과 이어지는 민락 수변 공원에서 첫날 일정을 마무리해보자. 민락 수변 공원은 바다에 접한 국내 최초의 수변 공원으로 해운대와 광안리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 원래는 바다였으나 지역 개발 촉진과 주민의 편의를 위해 부산시에서 공원으로 조성했다.
밤이 되면 화려한 불빛이 들어오는 광안대교를 끼고 있어, 부산의 야경을 보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광안대교뿐 아니라 해운대 신시가지 쪽의 마천루 역시 밤이 되면 화려한 불빛을 뿜어내어 미래 도시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여름에는 많은 시민이 돗자리를 들고나와 배달음식을 시켜먹으며 더위를 식히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