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여름이 제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날이었다. 사진을 찍어보겠다는 마음에 찾아 나선 북촌이었으나 들려오는 이야기론 볼 게 없다고 했다. 오다가다 잠깐 들르기 좋다는 말뿐이라, 여차하면 다른 곳으로 돌아설 마음이었다.
취미 삼아 시작한 사진이 벌써 3년째지만 필름 카메라에 관심을 둔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했을 때보다 따뜻한 느낌이 묻어나는 것에 매력을 느낀 후로 종종 필름 카메라를 집어 들게 되었다. 북촌은 오래된 동네라고 하였으니, 필름 카메라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안국역에 도착해 출구로 나오자 계동길과 인사동길이 마주 서 있었다. 인사동 쪽으로는 사람이 북적였다. 계동길의 초입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오래된 간판이 이끄는 대로 계동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완연한 여름의 초입이었다.
작은 한옥 마을의 최고점에 올라서자 남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옥길 구석구석에는 젊은 작가들의 꿈이 움트는 작업 공간도 더러 있었다. 탁 트인 전망을 보고 있자니 꿈꾸기에 참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옥마을 끝에서 ‘북촌 전망대’라 쓰인 작인 푯말을 발견했다. 좀 더 제대로 된 풍경 사진을 찍고 싶은 욕심에 화살표를 따라 올라갔다.
살면서 나는 많은 종류의 전망대를 마주했다. 어린 시절, 오백 원짜리 동전을 넣으면 희뿌옇던 망원경이 촘촘히 밝아지는 전망대 망원경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또, 그 망원경이 보여주던 건너편 세상 구경은 얼마나 짧게 느껴지던지. 보기만 해도 아찔하기 일쑤였던 그곳들은 하나같이 녹슨 난간과 울타리도 가지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북촌 전망대는 달랐다. 망원경에 집어넣으려 했던 동전을 모아 커피를 한 잔 사기만 하면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북촌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북촌은, 자신에게 들어서고 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향의 어머니 같은 넉넉한 미소를 내보이고 있었다. 북촌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북촌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사람들은 카페테라스에 앉아 군데군데 낡고, 또 군데군데 생겨나는 북촌의 정경을 보며 편안하게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풍경이 되었다.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북촌,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하나 둘 발을 들여놓는 이 곳에 9년동안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카페가 있다. 자리를 잡았다는 말 보다는 뿌리내렸다는 말이 더 어울릴 이 곳 ‘연두’에는 북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2006년에 북촌에 자리잡은 커피숍입니다. 처음에 동네에 왔을 때는 정독도서관도 가깝고 주변에 크고작은 박물관도 많고 무엇보다도 조용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 이 곳에 자리잡게 되었죠.
사실 연두는 한 개인의 가게라기보다는 공동체 형식을 취하고 있어요. 그래서 연두, 커피와 사람들이라는 이름이 붙은 가게들은 같은 기반 아래 시작한 친구들이죠. 카페 초기부터 핸드드립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예요. 커피교실도 운영하고 있는데 한 달 코스로 주 1회 진행합니다.
“ 처음 연두가 이곳에 자리 잡았을 때와는 많이 달라지긴 했어요. 관광객도 많아졌고 주변의 상점들도 달라졌죠. 예전보다는 북촌스러운 색이 좀 옅어져서 아쉬운 마음이 있지만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왔다 가시는 분들이 좀 더 북촌을 아껴주셨으면 좋겠어요. ”
" 개인적으로 저는 어떤 장소보다는 북촌의 밤을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지금 북촌을 찾으시는 분들은 이 곳이 관광지라는 이미지가 크신 것 같은데 저희에게 사실 북촌은 내가 살고있는 동네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찾는 낮에는 이 곳에서 그런 동네의 느낌을 받기는 힘들지만 해가 지고 나면 정말 동네 북촌을 보실 수 있어요. 특히 제가 추천하는 밤마실 코스는 가회동 한옥마을이예요. 낮에 보아도 예쁘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한옥마을을 연인과 함께 걸으면 정말 로맨틱 하거든요. "
해가 얼추 졌는데도 후덥지근한 날씨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정독도서관 입구가 보였다. 도서관 입구는 도서관이라기보다 동네 공원처럼 친근하고 어수선했다. 칭얼거리는 아이를 들쳐업은 엄마들이 도서관 입구 벤치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북촌에서는 어딜 가나 북촌 사람들이 보여서 나 역시 옛 동네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북촌의 많은 곳들이 그러하듯이, 이곳 역시 꽤 오래된 역사를 지녔다. 1977년 1월 4일 개관한 정독도서관은 경기고등학교의 옛 부지였다. 그 시절 우수한 학생들의 꿈과 희망이 자라던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열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이 자리를 정독도서관만 굳건히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조선왕조의 친인척 사무기관이었던 종친부 건물이 정독도서관 앞마당으로 강제 이전되기도 했다.
종친부 건물이 다시 원래의 터인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오래전 일이 아니다. 2013년의 겨울, 종친부 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이 정독도서관에서 이전되자 정독도서관은 다시 홀로 설 수 있었다.
한낮의 더위가 물러난 북촌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어린아이에게 북촌 상회에서 산 식혜를 맛 보여주고 있는 젊은 엄마가 보였다.
유모차에 앉기엔 조금 큰 듯한 아이는 테이크아웃 컵에 담긴 식혜를 맛있게도 먹었다. 저 아이는 여름날의 달콤하고 시원한 식혜 맛으로 북촌을 기억할 것이다.
‘풍년 쌀 농산’은 바로 옆으로 떡볶이 가게에 몰리는 사람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오래된 의자에 앉기 위해 줄을 선 연인들은 행복해 보였다.
접시에 담긴 떡볶이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났다. 연인들은 이야기할 것이다. 처음으로 이 음식을 먹었던, 아직 서로가 서로를 모르던 자신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삼청동과 맞닿은 곳에 아트선재센터가 있었다. 북촌과 미술관이라니,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어릴 적 만난 소꿉친구를 나이가 들어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그 친구의 어린 시절에는 느낄 수 없던 멋진 모습을 발견한 기분.
불이 켜지기 시작한 아트선재센터는 더욱 세련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1998년 설립된 이 센터는 젊고 실험적인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미술, 음악, 문학, 건축, 무용, 패션 등 전시의 스펙트럼 역시 다양하다. 이러한 분주하고 끊임없는 움직임이 이 동네 북촌을 ‘오래되었지만 낡지 않게’하는 마법의 조미료가 아니었을지.
앳되어 보이는 외모의 이상언님은 사실 북촌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북촌에서 놀던 그가 소개하는 북촌의 숨겨진 명소와, 주민의 시각에서 본 북촌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북촌을 찾아주고 있어요. 하지만 여행객의 입장으로 보는 북촌이다 보니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북촌은 한옥 앞에서 사진 찍고, 거리에서 예쁜 악세사리를 살 수 있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가지거든요.
그중에서도 진짜 북촌의 매력을 꼽으라면 저는 사람냄새가 나는 공간이라는 이유를 들 것 같아요. 동네 구석구석에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죠. 이따금씩 골목길을 걸으면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는데 그 떄 저는 이곳이 참 좋다고 생각해요.
진짜 북촌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면 저는 창덕궁 담벼락을 따라 걸어보세요. 돌담길을 걷다보면 어느 지점에선가 궁 담벼락과 시민들의 집이 붙어있는 곳을 만날 수 있죠. 창덕궁이 지어졌을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 일거예요.
궁 담벼락에 어깨를 기대고 지어진 집이라니. 가끔은 빨래가 널려있는 모습도 볼 수 있죠. 이렇게 북촌은 사람 냄새가 나는 공간이에요. 좀 더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점점 더 옛날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거예요. 집들이나 가게, 풍경이 말이죠. 하지만 반대로 돌아 나오는 길엔 남산타워나 현대식 건물들을 바라보게 되죠. 이게 북촌의 매력인 것 같아요, 사라지는 것들과 새로운 것들이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이죠.
삼청 공원이요! 도심 안에 숨겨진 작은 숲이죠. 아직까진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 조용하다는 것도 요즘 핫한 북촌에서 색다른 매력의 장소가 아닐까 싶어요.
작은 공원 안쪽에는 자연 목욕탕이 있는데, 산에서 흘러 내려 온 물로 만들어진 것이죠. 장마가 끝난 여름이면 그 곳에서 시원한 물을 몸에 끼얹기도 해요. 휴식이 필요한 사람에겐 쉴 곳이 되어주고 놀러 온 사람들에겐 기꺼이 놀이터가 되어주는 고마운 장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