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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TELYST Jun 12. 2021

서울 호텔 연대기

우리나라 서구식 숙박시설의 역사

원래 우리나라에는 역원(驛院) 제도가 존재했습니다.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더욱 확장된 제도로, 왕권의 통제력 강화를 위해 지방을 순찰하는 관리들을 위한 편의시설들을 의미했습니다. 역은 말을 바꿔 탈 수 있는 교통 편의시설이었고, 원은 숙식이 제공되는 숙박시설이었습니다. 이태원이나 조치원처럼 '원(院)'으로 끝나는 이름의 동네들이 그 시절에 뭘 하는 곳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1세대


상업적 목적의 서구식 숙박시설, 즉 호텔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쇄국정책의 빗장이 풀린 조선 말기 무렵부터 입니다. 이방인들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그들을 위한 호텔이 필요했고, 이방인들은 스스로 호텔을 건립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호텔을 직접 건립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대불호텔 (1888-1978):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서울이 아닌 인천의 대불호텔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인 호리 히사타로와 아들 호리 리키타로가 1888년 인천항 인근 조계지(현재의 차이나타운)에 11실 규모의 대불호텔을 개관하여 서울로 출입하는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운영했습니다. 일본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세이요켄 호텔이 1868년에 지어졌으니 우리나라가 대략 20년 정도 늦었던 셈입니다.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같은 선교사들의 회고록에 대불호텔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899년 경인선 개통으로 인천에서의 숙박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대불호텔은 중국 음식점으로 쓰이다가 1978년 결국 철거되었습니다.



손탁호텔 (1902-1917): 손탁호텔은 강력한 개화 정책을 펼쳤던 고종 황제가 1902년 덕수궁 인근, 현재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부지에 당시 황실 전례관이었던 프랑스인 앙투아네트 손탁 여사를 위해 지어 하사한 25실 규모의 호텔입니다. 1909년 손탁 여사가 한국을 떠난 이후, 경영난을 겪기 시작하던 손탁호텔은 조선호텔이 개관하면서 1917년 결국 영업을 중단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이화학당으로 넘겨져 기숙사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면서 1922년 결국 철거되었습니다.



조선호텔 (1914-1967): 최초의 조선호텔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철도국에 의해 환구단이 있던 소공동에 64실 규모로 지어졌습니다. 해방 후에는 미군 사령부로 사용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정부가 이를 인계받았습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고, 6/25 때에는 미군 휴양시설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1963년에 신설된 국제관광공사로 이관되었습니다.



반도호텔 (1938-1974): 반도호텔은 조선호텔 바로 뒤편에 한국에서 기업가로 활동하던 일본인 노구치 시타가우가 1938년 개관한 111실 규모의 호텔입니다. 비료공장을 운영하던 그는 허름한 복장으로 조선호텔을 찾았다가 쫓겨난 후, 바로 뒤편의 부지를 사들여 조선호텔의 두배인 8층 높이로 호텔을 건립했습니다. 해방 후 정부로 넘겨졌던 반도호텔은 1963년 조선호텔과 함께 국제관광공사로 이관되었습니다.



2세대


한편, 해방 후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은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교통부가 넘겨받았습니다. 해방 후 얼마 되지 않아 6/25까지 겪은 우리나라는 경제적 자립이 어려웠고, 정부는 외화를 벌어 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관광 산업을 육성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전담 조직의 설립을 추진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1962년이 되어서야 국제관광공사(한국관광공사의 전신)가 설립됩니다. 이후 국제관광공사는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은 물론, 워커힐호텔과 타워호텔 등을 인수하며 우리나라 호텔 산업의 성장을 주도하게 됩니다.


워커힐호텔 (1963-): 1961년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은 미군을 위한 위락시설을 건립하고자 워커힐호텔의 건립을 추진했는데, 국제관광공사가 출범하자 사업을 이관합니다. 그리고 1963년 객실 5동과 빌라 13동, 전망대와 차고 등 26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워커힐호텔이 개관했습니다. 라스베이거스의 호텔들을 모델로 기획된 이 호텔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나이트클럽, 볼링장, 실내수영장이 도입되었습니다.



타워호텔 (1967-): 1964년 남산에 아시아반공연맹(현재 한국자유총연맹)의 자유센터가 들어섭니다. 이때 5층 규모의 본관 옆에 17층 규모의 자유회관이 외국인 방문객을 위한 숙소로 함께 건립됩니다. 1966년 국제관광공사가 이를 인수하여 개축 후 1967년 타워호텔로 개관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곧바로 매각에 착수했고 1968년 공성산업에 낙찰되어 민간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조선호텔 (1970-): 조선호텔을 넘겨받은 국제관광공사는 새로운 호텔들이 들어서며 경쟁력을 잃어가던 조선호텔을 철거하고 대규모의 호텔로의 재건축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 미국의 아메리칸 항공과 함께 19층에 504실 규모의 새로운 조선호텔을 개관했습니다. 1981년에는 글로벌 브랜드인 Westin을 도입하면서 웨스틴 조선호텔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한편, 정부의 적극적인 관광 산업 육성 정책에 힘입어 민간에서도 호텔업이 성장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호텔업에 진출한 민간 기업들은 여전히 우리나라 호텔 산업에서 활발하게 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금수장 (1955-): 1955년 현재 앰배서더 호텔이 위치한 장충동에 민간 기업인 서현수는 2층에 19실 규모의 금수장을 개관했습니다. 1965년 명칭을 앰배서더로 바꾸었고, 1975년에는 증축을 통해 450실 규모의 대규모 호텔로 재개장했습니다. 1987년에는 글로벌 브랜드 Accor와 전략적 제휴를 체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순수 국내 민간 자본에 의한 최초의 호텔이라는 의미가 있는 호텔입니다.



사보이호텔 (1963-): 우리나라 최초의 증권거래소 개설 2년 후인 1934년 동아증권을 설립하여 '조선의 주식왕'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조준호는, 명동에 사보이호텔을 개관하여 1963년 관광호텔로 등록했습니다. 이후, 1968년 호텔 증축, 2011년 상가 신축을 거쳐 지금도 105실 규모의 호텔로 운영 중입니다. 우리나라 조직폭력의 세력 판도가 변하게 된 1975년의 '사보이 호텔 사건'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로얄호텔 (1971-): 사보이호텔과 함께 오랜 기간 명동을 지키고 있는 310실 규모의 로얄호텔은 1966년 설립된 대한관광개발이 1971년에 개관한 호텔입니다. 당시 최상층에 위치한 나이트클럽으로 유명세를 얻으며, 다른 호텔들보다 젊은 연령의 고객 비율이 높았던 호텔입니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당시 우리나라를 찾은 북한 대표단이 이 나이트클럽을 구경하러 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3세대


이승만 정권과 마찬가지로 관광 산업을 통해 외화 벌이에 열중하던 박정희 정권에게 국제관광공사가 운영하는 호텔들은 애물단지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노쇠화로 민간 호텔들과의 경쟁에 뒤쳐지다 보니 적자가 쌓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외국인 방문객들이 급증하면서 찾아온 전례 없는 호황을 놓칠 수 없었던 정부는 1973년 관광 민영화 정책을 꺼내 들고 대기업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이때 국제관광공사는 보유한 호텔들을 대기업들에게 넘기고, 관광단지 개발을 통한 인프라 구축에 집중하게 됩니다.


워커힐호텔 (1977-): 1973년 선경개발(현재의 SK)이 국제관광공사로부터 워커힐호텔을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글로벌 브랜드 Sheraton을 도입한 쉐라톤 타워를 증축하여 1978년 개관했고, 2004년에는 동일 계열의 부티크 브랜드를 도입한 W 호텔 타워를 개관했습니다. 2017년 글로벌 브랜드와의 계약 종료 후, 각각 그랜드 워커힐, 비스타 워커힐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하얏트리젠시 (1978-): 일본계 자본이 설립한 회사 서울미라마는 남산에 호텔 고급 호텔 개발을 추진했고, 글로벌 브랜드 Hyatt에 위탁운영을 하기로 합니다. 1978년 하얏트리젠시가 개관했고, 리모델링을 거쳐 1993년 그랜드하얏트로 명칭을 변경하여 재개장했습니다. IMF를 넘지 못한 일본계 자본은 1998년 서울미라마의 지분을 Hyatt에 넘겼고, Hyatt는 장기 위탁운영계약을 조건으로 2019년 홍콩계 투자사에 매각했습니다.



롯데호텔 (1979-): 1973년 롯데는 국제관광공사로부터 반도호텔을 인수하고 바로 옆에 위치한 국립중앙도서관 부지 또한 함께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기존 건물들을 철거한 후, 1979년 38층 규모의 롯데호텔 본관을 신축하여 개관했습니다. 1980년에 면세점을,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1988년에는 신관을 증축하여 개관했으며, 2009년 리노베이션을 거쳐 현재 1,015실 규모의 초대형 호텔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신라호텔 (1979-): 박정희 정부는 일제 강점기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원이 있던 장충동 부지에 1967년 청와대 영빈관을 건립했습니다. 그러나 청와대는 1973년 관광 민영화 추진 시기에 삼성에 이를 넘기고 관내에 새 영빈관을 건립했습니다. 기존의 영빈관을 인수한 삼성은 여기에 지금의 신라호텔을 증축하여 1979년에 개관했습니다. 기존 영빈관은 현재도 사용 중이며 호텔은 2013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쳤습니다.



조선호텔 (1983-): 삼성의 호텔업 진출은 신라호텔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3년 웨스틴 조선호텔의 한국 측 지분을 국제관광공사로부터 인수하며 호텔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1987년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건희는 1991년 조선호텔에 대한 보유 지분을 신세계에 넘겼고, 신세계는 1995년 나머지 지분까지 인수하며 온전한 소유권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나라의 숙박업 비즈니스 환경이 척박하긴 하지만, 호텔이 처음 도입되어 발전해가는 과정에는 흥미로운 얘깃거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2012년의 관광숙박시설법 시행을 통해 많은 신규 호텔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고, 지금은 코로나19의 파도 속에서 또 많은 호텔들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비록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인 고급 호텔이 아닐지라도, 이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가는 수많은 호텔, 그리고 여관과 여인숙들에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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