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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말고 독점...?

독서기록 202512: 제로 투 원

by HOTELYST
의도치 않게 신선놀음이 되어버렸던 창업가의 삶을 잠시 접어두고 다시 얼마간 땅에 발을 디뎌보려던 차에, 우연히 들른 교보문고에서 남들은 창업 전에 이미 다 읽었을 것 같은 책을 하나 집어 들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디에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컸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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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어든 책은 출간된 지 벌써 10년이 지난 피터 틸의 제로 투 원입니다. 피터 틸은 이른바 '페이팔 마피아'의 대부로, 온라인 결제 서비스 페이팔을 창업했고, 링크드인과 옐프에 직접 투자했으며, 그가 파트너로 있는 파운더스 펀드를 통해 스페이스X와 에어비앤비에 투자한 바 있습니다. 그는 2003년 데이터 프로세싱 기업 팰런티어를 창업하여 현재 회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미래에 대한 관점


그는 비록 미래를 정확하게 예견할 수는 없지만, 미래가 지금과 다를 것이고, 그 미래의 뿌리가 현재일 것이라는 말로 본인의 생각을 엽니다. 그리고, 진보된 미래라는 낙관적 관점과 함께, 수직적 진보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자원이 희소한 세상에서 기술 없이 글로벌화를 지속해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평적 진보: 효과가 입증된 것을 카피하는 것, 즉 1에서 n으로 진보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하나의 타자기를 보고 100개의 타자기를 만드는 것이 수평적 진보에 해당됩니다. 수평적 진보의 도구는 글로벌화, 즉 한 곳에서 성공한 것을 모든 곳에서 성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수직적 진보: 새로운 일을 하는 것, 즉 0에서 1로 진보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하나의 타자기를 보고 워드프로세서를 만드는 것이 수직적 진보에 해당됩니다. 수직적 진보의 도구는 기술, 즉 새롭고 더 나은 방식으로 무언가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의 관점에서 고대 세계의 철학자들은 비관적이었습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등은 모두 인간의 잠재력에 엄격한 한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현대 철학자들은 대부분 낙관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우파의 허버트 스펜서, 중도의 헤겔, 좌파의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19세기는 진보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말이 되면서 불명확한 철학자들이 나서기 시작합니다. 평등주의적 좌파의 입장을 취하는 존 롤스는 공정과 분배의 문제를 걱정했고, 자유방임주의적 우파의 입장을 취하는 로버트 노작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저자의 미래에 대한 관점은 자유방임주의적 우파 견해와 일치하고, 제 관점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경쟁이 아닌 독점


비즈니스에 있어 진보의 초점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척의 대부분은 이미 존재하는 경쟁환경의 역학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사실 이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경영학에서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연구 및 논의되어 온 주제입니다.


마이클 포터는 1980년 그의 저서 경쟁전략에서 상대적 경쟁우위 유지가 가능한 '유익한 경쟁자'의 성장을 지원함으로써 새로운 시장 개척에 소요되는 비용을 분담하는 전략을 제시합니다. 비록 '경쟁'이 경영학의 핵심 영역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했지만, 고성장기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배경으로 제시된 전략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현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김위찬과 러네이 모본은 2004년 블루오션 전략이라는 논문에서 가치혁신을 통해 더 나은 품질의 제품을 더 낮은 원가로 생산하는 전략을 제시합니다. 이들의 전략은 차별화를 통해 경쟁을 회피하는 데 초점이 있는데, 이때 성과 목표는 점유율이 아닌 가격이 됩니다. 그러나, 차별화 경쟁의 과열로 제품과 사업의 생애주기가 짧아지고, 시장의 불안정성이 증가하게 된 측면이 있습니다.


이들과 달리, 피터 틸이 제시하는 전략은 경쟁을 피해 틈새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점진적으로 시장을 확대해 가는 것입니다.


"진보의 역사는 곧 더 나은 독점기업이 전임자의 자리를 대신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독점은 진보의 원동력이다. 수년간 혹은 수십 년간 독점 이윤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은 혁신을 위한 강력한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눈에 띄지 않는 '독점'은 지금의 산업구조에서 기존 전략들이 갖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일 것 같습니다. 다만, 다양한 논란과 충돌을 피해 갈 수 없는 독점적 지위를 눈에 띄지 않도록 지켜내는 것이 가능할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독점기업들이 독점적 지위를 숨기기 위해 보이는 행태에서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는 있지만, 지속가능한 근본적 해결책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독점기업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다. 독점기업들은 계속해서 독점 이윤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에 독점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방법이 (존재하지도 않는) 경쟁자의 힘을 과장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저자가 '독점'을 위한 조금 더 근본적인 해법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성공적인 독점기업들이 보이는 특징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기준이 제시되면서, 독점은 더 이상 추상적 슬로건이 아니라, 노력하면 닿을 수 있는 현실적 목표가 됩니다.


독자 기술: 독자 기술은 가장 가까운 대체 기술보다 중요한 부분에서 10배는 더 뛰어나야 진정한 독점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네트워크 효과: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수록 해당 제품을 더 유용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네트워크 효과가 필요한 사업들은 특히나 더 작은 시장에서 시작해야 한다.

규모의 경제: 독점기업들은 규모가 커질수록 더 강해진다. 판매량이 클수록 제품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고정비가 분산되기 때문이다.

브랜드 전략: 애플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쪽에서 보유하고 있는 독자 기술들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완전체를 이루고 있다. 또한 애플은 자신들이 구입하는 자재에 대해 가격 결정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대량으로 제품을 제조한다. 그리고 자체 콘텐츠로 형성된 생태계를 통해 강력한 네트워크 효과를 누린다.


저자는 더 나아가 이러한 독점기업을 세우기 위한 3단계 프로세스를 제시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작게' 시작하는 것과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몸집을 키우는 것인 듯합니다. 크게 시작하거나, 급격하게 성장하는 것은 규제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작게 시작해서 독점화하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백만 명의 주의를 끌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정말로 우리 제품이 필요한 기천 명에게 접근하는 편이 훨씬 쉽다.

몸집 키우기: 틈새시장을 만들어 지배하게 되었다면, 관련 있는 좀 더 넓은 시장으로 서서히 사업을 확장해야 한다.

파괴하지 마라: 파괴적 혁신이라는 개념은 기존 회사들에 대한 위협을 묘사하려고 만든 말이다. 그러나 신생기업들이 파괴에 집착한다면, 이는 구식 회사들의 시각으로 자기 자신을 보겠다는 뜻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세스를 성공적으로 이행하더라도, 일정 규모를 넘어서게 되면 결국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가장 바람직한 방식으로 '파괴'하는 것에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파괴'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10년 전에 나왔던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삼한제일검 이방지와 무사 무휼이 지붕에서 술을 나누며 했던 대화가 다시 생각났습니다.


“칼 쓰는 사람은 두수 앞을 보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난 딱 한수 앞만 보려고.”


나름 구체적이라고 생각했던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그토록 버거웠고, 결과적으로 신선놀음이 되어버리고 만 가장 큰 이유는 충분히 '작게' 시작하지 못했고, 한수 앞을 보지 못한 채 두수 앞만을 내다보며 달려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언제 다시 기회를 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런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최소한 눈앞의 문제들을 놓치는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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