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온도
이별에는 만남보다 더 큰 예의가 필요하다.
사랑을 할 땐 불처럼 뜨거웠다가 이별의 순간에 칼날처럼 돌변하는 사람이 있다.
상대의 인격을 모욕스럽게 하고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으며 끝내 과거사까지 들먹이며 치졸하게 구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런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게 요즘의 현실인 것 같다.
요즘 아이들 사이에선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을 듣긴 했는데 얼마 전 소스라치게 놀란 일이 있었다.
금요일 밤이었고 연남동 어느 골목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인적이 드문 골목도 아니었다.
연인으로 보이는 두 남녀는 서로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싸움이 오래되고 있었는지 구경하는 사람들이 여나무 명쯤? 하지만 그 둘은 주위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창피한 것도 모른 채 두 눈에 살기를 싣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귀 기울여 듣지 않아도 사랑하는 연인에게 하는 소리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욕을 내뱉고 있었다.
남자는 간혹 손을 치켜들고 여자는 남자의 가슴팍을 밀치기도 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봤던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바로 앞에서 목격하니 실제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팔다리가 후들거린단 말을 실감했다.
평소 심장이 약한 편도 아닌데 아마도 딸을 가진 ‘엄마’ 라서 무턱대고 불안함이 올라왔으리라.
그 순간은 딸의 안부를 바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정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얼른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아무리 친한 사람도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고 나서야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 난동에서 가장 겁이 났던 건 남자가 여자를 향해 독을 가득 담아 퍼붓는 폭언이었다.
폭언은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어쩌면 육체적 상처보다 더 지독하게 오래도록 남아)피해 당사자를 괴롭히는 폭력이다.
화가 난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을 다듬지 않고 상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미사일처럼 발사해 내는 폭언은 몸에 입히는 상처와 다르지 않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폭언은 이미 폭력성의 전초전이다.
연애는 혼자가 아닌 둘 사이에서 벌어지고 일어나는, 달콤하지만 때로 폐쇄적인 둘만의 인생이다.
서로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되어 줄 수도 있고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될 수도 있다.
일방적인 잘못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마치 완전무결한 듯 자신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자신의 분노를 있는 그대로 상대에게 오물처럼 뒤집어 씌워 상대방의 인생마저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이 아닌지 잘 판단해야 한다.
세상이 하도 험하고 남녀 사이의 일도 점점 비정상적으로 마무리되는 일이 많아 오죽하면 ‘안전 이별’이란 말이 생겨 나오고 ‘이별 범죄’라는 끔찍한 사고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인터넷 사회면에 스토킹 범죄나 이별 후 납치나 감금의 무서운 사례가 한 달에도 몇 건이나 보도가 되고 있을 뿐 아니라 내가 젊은 시절에도 이별 폭력을 가깝게 목격한 적도 있었기에 딸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밤이고 낮이고 딸이 귀가를 하기 전까지 기도하는 심정으로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딸들은 질색이겠지만 딸들을 붙들고 지겹도록 말을 한다.
크고 작은 갈등 상황에서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사람을 가장 빨리 알아채는 방법은 갈등상황에 놓이게 되는 때이니, 그러한 갈등을 일부러라도 만들어보는 것은 단순히 상대를 시험에 들게 하려는게 아니라 나를 위한 안전장치를 점검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사랑이 끝난 후에 오히려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어느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그립고 좋은 기억들만 가득하며 지금쯤 무얼 하며 지내는지 단순한 궁금증을 넘어 그의 행복을 빌어주고, 여전히 아름다운 인성을 지니고 살고 있는지 그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해질녘의 하늘처럼 마무리까지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야 한다.
동화 같은 얘기 같지만 그런 사람은 반드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