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3

사소한 온도

by 윤슬


그런 하루의 시작이 있었다.

창을 열고 하루하루 달라지는 계절의 순환을 들이마시고, 식탁에 앉아 눈앞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오늘은 비가 올지 내일은 눈이 내릴지 날씨를 점쳐보고,

한참동안 창가를 서성이다 돌아서서 조금 느릿하고 게으르게 소파에 앉아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면 잊고 있었던 일을 처리하려 바쁘게 움직이는 그런 일상.


식구들이 모두 나가고 마침내 혼자가 된 아침,

있는 반찬에 조촐하게 아침밥을 차려 먹고 하릴없이 서랍장을 차례대로 여닫으며 오래된 옷들을 정리하다가

‘어맛, 이게 여기 있었네. 올레!‘ 까맣게 잊고 있던 보물을 찾아낸 소소한 기쁨에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지고,

어느 날은 혼자서 차를 몰아 재래시장에 주차를 하고 세상 걱정이라곤 없어 보이는 사모님처럼 에코백 앞뒤로 흔들며 속으로 콧노래도 흥얼거리고

이끝에서 저 끝까지 거닐면서 찬찬히 훑어보다가 물건 좀 볼 줄 아는 30년 차 주부 9단이나 되는 것처럼 하나씩 쏙쏙 집어 올리며 장을 보는 재미가 좋았던 일상.


고요하고 부담이 없는 새벽.

무심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도 괜찮은 밤.

다음 날 특별한 아침 일정이 없어 밤을 좀 새워볼까 괜스레 책을 들춰보고 문득 떠오르는 영화를 찾아봐도 막상 읽히지 않고 담기지 않아 생각만 무성하게 자라나는 새벽.

완전하게 닫히지 않는 하루도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평온은 한 없이 연약한 것이었음을.

평온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오고 기약없이 사라진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제는 곱고 아름다운 것들을 더 많이 보고 살 수 있게 해 달라 기도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망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나이에 기대어 거대한 시련은 다 겪어냈겠거니 불안감을 꾹꾹 눌러두고 있었다.

한없이 어리석고 오만한 생각이란 걸 깨달은 나이가 고작 인생의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