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퇴사 즈음의 감정 상태

by 온수에 빠진 얼음

취업 준비한다고 스트레스받는 대학 4학년 졸업반.

졸업 유예니, 취업 스터디니 한참 힘들어할 때 나는 대학 졸업하기도 전에 전공 계열 직군의 대기업에 합격했다. 그것도 원샷 원킬.

한 군데 면접 보고, 한 군데 붙어서, 한 군데 갔다. 24살을 마무리하는 겨울이었다.


친구들 사이 모임의 화젯거리가

"누구는 어디를 붙었네, 걔는 결국 회사를 어디를 다니네, 거기는 초봉이 얼마라더라"

에서

"누구는 누구랑 결혼을 한다더라, 신혼집은 어디라던데? 어디 은행은 전세대출을 이만큼 해준다더라. 걔가 알고 보니 친정에서 몇 평짜리 아파트를 해줄 만큼 집이 부자라던데, 첫째 예정일이 다음 달이란다. 다음은 누구 차례니, 이런 일 아니면 우리 다 모일 수 있는 날이 오겠니"

정도로 바뀌어 갈 무렵에


난데없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다고, 다신 안 돌아올 것처럼 요란하게 동남아로 떠났다.

거기서 나는 나대로 나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겠다고 했다. 30살이 시작되는 겨울이었다.


첫 직장으로는 좋은 회사였다.

아니, 첫 직장이 아니어도 아주 좋은 회사였고, 지금도 좋은 회사라고 생각한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 네임 밸류, 신입이 받기 꽤 후한 연봉에다가 임직원의 전문성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 커리큘럼과 평가 제도에 집중하는 회사였다.

또라이 보존법칙에 입각해 보면, 그럼 그 또라이가 혹시 나인가 싶을 정도로 팀원들 모두 모난 사람 없이 좋았다. 다들 착하고 똑똑하셨다. 엘리트 출신 팀장님의 격려 속에 과분할 정도로 좋은 조직 문화를 경험했었다.


그런데,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불편함이 늘 따라다녔다.


나는 고작 지방 국립대 학사 출신이라는 자격지심이 생긴데다가 업무가 너무 어려웠다.

더 잘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할까 뭘 더 해야 할까, 나한테만 어렵나?

함께 입사한 동기들은 계속 계속 성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불안함과 초조함이 밀려왔다. 나는 이 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부정적인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하니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갔다.

이런 좋은 회사를 그만두면 나 같은 건 다신 이런 곳에 발도 못 디딜 것 같았다.

그런데 버티는 게 너무 힘들었다. 양가감정에 숨이 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즈음 우울증이 시작됐던 것 같다.

개인적인 악재까지 더해지니 감정 기복이 밀리세컨드 단위로 널뛰었다.

내 감정의 피해자가 나였지만, 가해자도 나였다.

그냥 어서 모든 일에 초연한 할머니가 되어버렸으면 했다.


우울증이라고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 건 특별한 사람들이나 걸리는 줄 알았으니까.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어느 날 문득 어떤 망상이 시작됐다.


신이 나를 만들 때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거야


하물며 모기도 먹이사슬이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나에게도 주어진 역할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역할을 저버리고 이대로 그냥 할머니가 되어 버리는 건, 내 젊음에 대한 낭비인 것 같았다.


지금 이러고 있는 건 신이 의도한 "이유"는 아닌 것 같고, 분명 세상 어딘가에는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망상이 점점 자라났다. 결국 이걸 못 찾는다면 굳이 삶을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결론에 도달해 버렸다. 살아있어도 되는 이유가 필요했다.


그 이유를 찾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되는 대로 막 살아보자 싶었다.

스쿠버 다이빙이 취미였으니, 매일 매일 다이빙할 수만 있다면 적게 벌더라도 다이빙 강사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1년 내내 여름만 있는 나라에서 매일 바다로 출근한다? 생각만으로도 설렜다.

(실제로 이서진 배우분께서 윤식당 나와 이런 곳에서 다이빙 강사로 살고 싶다고 말한 걸 보고, 사람들은 다 비슷하구나 생각했다. 물론 나는 그걸 해보고 난 후에 봐서 그다지 감흥이 없었지만)


그러다 어느 날 뭔가 잘 못되서 바다에서 숨이 끊어진다면, 누구에게도 내 시체를 치우는 민폐를 끼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완벽한 인생계획이라고 생각했다.



+ 실제로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현실과는 맞지 않는 믿음(망상)을 가지고 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그 믿음이 고착화되면서 점점 치료가 더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또 이들은, 죽음에 대해 과한 집착을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마지막엔 이를 시도하면서 위험한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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