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우핑, 자급자족 끝판왕

by 하우스노마드 키라

홋카이도 도요우라.

내가 처음 우프를 하게 된 곳은 마을 외곽, 산자락에 자리한 농가였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만평 정도 되는 밭 모서리에 덩그라니 위치한 집.


사실 처음 도착했을 때 내 눈엔 그저 흔한 시골집 같아보였다. 하지만 이 집은 그냥 보통 집이 아니었다. 집의 기둥은 근처 폐가에서 주워온 나무로 세워졌고, 벽과 지붕은 재활용 재료로 직접 만들어졌다. 전기는 태양열로, 따뜻한 물과 난방은 화목난로로 해결했다. 물은 근처 계곡에서 끌어다 정수해서 쓰고, 화장실은 양변기 아래 톱밥이 깔린 독특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직접 기른 닭이 낳은 달걀로 요리를 하고, 집주변에서 자란 부추며 아스파라거스 등 다양한 채소로 음식을 해먹었다. 30대 부부와 어린 아이 4명이 사는 이 집은, 말 그대로 자급자족의 끝판왕이었다.


오전 8시, 밭으로

오전 6시에 일어나 7시쯤 아침을 먹고, 8시부터 일이 시작됐다. 이날 내게 주어진 일은 감자 심기였다.

감자는 먹어봤지만, 내 손으로 직접 감자 모종을 심는 건 처음이었다. 씨감자를 칼로 자르고, 하나하나 무게를 재고, 감자 심을 땅을 팠다. 글로 쓰면 참 쉬워 보이는데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땅은 단단했고, 허리를 한참동안 구브리고 있었더니 금세 아파왔다. 몇 개 심지도 않았는데 땀이 났다.

그렇게 감자를 직접 심으면서 그동안 내가 너무 쉽게 감자를 먹어왔다는 걸 알았다. 그때부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해야 할 사람은 농부라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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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라라, 감자야"

처음 하는 일이다 보니 요령도 없고 힘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감자를 땅에 묻으면서 나는 감자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참고로 난 운전하면서도 네비게이션과 대화를 하는 사람이다.

"잘 자라라, 감자야." 그러자 신기하게도 힘들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손은 계속 움직이고, 땀은 계속 났지만, 그게 고통이 아니라 리듬처럼 느껴졌다.


제주에서 귤을 딸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한참 귤을 따다 보면 생각이 사라지는 지점이 있다. 그럼 그게 마치 명상 같다. 나는 그걸 "귤명상"이라고 불렀다. 감자 심기도 그랬다. 잡생각이 사라지고, 몸만 움직이는 것.


반복되는 일상

매일 아침과 오후, 내게 반복적으로 주어진 일이 또 하나 있었다. 벼모종에 물 주기.

모판에 줄지어 서 있는 작은 벼 싹들에게 물을 주는 일. 단순하고, 지루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매일 물 줄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싹이 훌쩍 자라있었다. 우리는 뭔가를 계속 반복적으로 할 때 그 자람을 알아채지 못하는 거였구나. 매일 조금씩 반복되는 일상이 어쩌면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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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자연과 함께

오전에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가끔은 오후에 자유시간이 주어지곤 했다. 그 시간에 집 아래 작은 개울에서 가족들과 강 낚시를 하기도 했고, 집 주변 들판에서 두릅이나 표고버섯을 따오기도 했다. 그걸 집에 가져가면 호스트가 튀김을 만들어줬다. 갓 튀긴 두릅과 표고버섯. 일본 튀김은 한국 튀김과는 달리 유난히 바삭하고 고소한 맛이 난다. 일본에서도 귀한 두릅을 내 손으로 직접 따왔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튀김 맛을 더욱더 특별하게 만들었다.



여행자와 생활자의 차이

관광객으로 왔다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이들과 함께 이들의 일상을 산다는 것. 이들이 먹는 음식을 똑같이 먹고, 이들이 생활하는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사는 것. 여행자였다면 이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사는지 몰랐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농가는 일본에서도 특이한 케이스의 집이었다. 자급자족은 노동이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였다. 내가 언제 태양열로 전기를 만들고, 화목난로로 물을 데우고, 계곡 물을 정수해서 마시고, 화장실에서 큰일 보고 톱밥을 뿌리는 경험을 해보겠는가. 그 모든 과정이 이들의 일상이었고, 나는 그 일상 속으로 잠시 들어갔을뿐이었다.


우프는 단지 "농사 체험"이 아니었다. 농사 체험을 가장한 문화체험이었다.

이제까지 내가 해왔던 여행은 '수박 겉핥기'가 아니었나 싶다. 새로운 장소의 건축을 보고, 음식을 맛보고, 사진을 찍고 자랑하기에 바빴으니까.


그런데 도요우라에서 나는 감자를 심고, 벼에 물을 주고, 톱밥을 뿌리며 그들의 평범하지만 특별한 하루하루를 함께 살았다. 나는 그 집을 방문한 게 아니라, 잠시 그 집 가족의 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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