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 가면 늘 머무는 집이 있다. 내가 발리 우리 집이라 부르는 곳. 그 집에 사는 발리 사람 킹뇨만은 새를 키운다. 서너 개의 새장이 집안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어느 날, 킹뇨만이 새장 속 새를 꺼내더니 세숫대야에 새를 목욕시키는 게 아닌가. 강아지 목욕시키는 건 봤어도 새 목욕시키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신기한 듯 지켜봤다.
"왜 새 목욕시키는 건데?" "더우니까." 킹뇨만의 대답은 간단했다. 더워서. 새가 더울까봐 목욕을 시킨다고?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새가 정말 더운 걸까? 아니면 새장 안이 더운 걸까? 하늘을 날던 새였다면 시원한 곳으로 날아가면 그만이었을 텐데. 새장 속 새를 볼 때마다 나는 늘 같은 생각을 한다. 얼마나 답답할까? 하늘을 날고 싶을 텐데. 저 좁은 공간에 갇혀서. 아, 저 새장 열어주고 싶다.
새장 근처에는 킹뇨만 아들 카덱이 잡아온 물고기를 키우는 큰 어항이 하나 있다. 내 양팔을 벌린 크기의 2배 정도의 어항 안에 내 팔뚝만 한 물고기가 혼자 살고 있다.
새 목욕을 시키는 킹뇨만을 보고 난 후, 내 시선은 어항 속 물고기에 멈춰섰다. 저 녀석도 어항 속이 답답하지 않을까? 저 녀석이 살아야 할 곳은 어항이 아니라 강인데. 넓은 강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살아야 할 물고기가 투명한 유리 벽 안에 갇혀 있다.
고개를 돌려보니 집안 여기저기 자리한 화분들이 이제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 같은 생각이 든다. 화분 안에서 자라는 식물도 답답하지 않을까? 저 식물이 살아야 할 곳은 꽉 막힌 화분이 아니라 땅속인데. 뿌리를 마음껏 뻗으며 자라야 할 식물이 작은 화분에 갇혀 있다.
새장, 어항, 화분.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떠올랐다. 모두 인간 곁에 두고 싶다는 이유로 새를, 물고기를, 식물을 가두어 키우고 있다는 것. 새는 하늘을 날아야 새다운 거고, 물고기는 물속을 헤엄치며 살아야 물고기다운 거고, 식물은 땅속에서 자라야 식물다운 건데. 인간이 무슨 권리로 이들이 본래 있어야 할 곳에서 빼앗아 가둬버린 걸까?
새가 하늘을 날 때, 그 새는 생태계에서 씨앗을 옮기고 해충을 잡으며 자신의 역할을 한다. 물고기가 강에서 헤엄칠 때, 그 물고기는 물의 순환을 돕고 다른 생명들과 연결되며 생태계의 일부가 된다. 식물이 땅에 뿌리를 내릴 때, 그 식물은 토양을 살리고 공기를 정화하며 수많은 생명의 터전이 된다.
그런데 새장 안 새는 그저 새일 뿐이다. 어항 속 물고기는 그저 물고기일 뿐이다. 화분 속 식물은 그저 식물일 뿐이다. 생태계와 단절된 채, 마치 인형처럼 인간의 소유물로만 존재한다. 그들이 지닌 본래의 존재 가치는 사라지고 오직 "예쁘다", "귀엽다", "힐링된다"는 인간의 감상만 남는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그 존재는 자신의 가치를 온전히 발휘하게 되는게 아닐까? 그게 생태계가 작동하는 방식일텐데.....
킹뇨만의 새 목욕 사건 이후로 나는 결심했다. 화분에 식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새나 물고기와 같은 동물을 키우는 건 소수의 개인의 취향이라 접어두자. 하지만 화분은 다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집안에 화분을 들인다. 반려식물이라는 이름으로, 인테리어라는 이유로, 공기정화라는 명분으로.
그리고 금방 시들어가는 식물을 보며 "나는 식물 키우는 재주가 없어"라고 말한다. 재주가 없는 게 아니다. 애초에 화분이라는 공간 자체가 식물에게는 불완전한 환경이다. 식물은 땅속에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자라야 한다. 가능하면 땅에서, 흙에서 자라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자신답게 살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화분 대신 정원을 선택하기로 했다. 작은 텃밭이라도 좋다. 식물이 뿌리를 마음껏 뻗을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식물은 단순한 관상용이 아니라 생태계의 일부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
킹뇨만의 새장 속 새를 내 마음대로 풀어줄 수는 없어도, 내 곁에 가둬 두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는 것. 그것이 소유하는 삶을 넘어, 생태계의 가치를 존중하는 '각자의 존재하는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내 작은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