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책방 사장이라고? 책방을 오픈하기는 했는데 책방에 손님이 오면 어떡하지? 손님이 오는 게 좋기보다는 무서웠다. 그리고 신기했다. 아니, 어떻게 이 시골 구석에 있는 책방을 알고 찾아오는 걸까?
처음 책방을 열고 1년 동안은 관찰자로 지내기로 했다. 3인칭 시점으로 책방을 지켜보는 거다. 어떤 손님들이 올까, 책방의 시간과 계절은 어떻게 지나갈까. 나는 책방도, 가게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당시 나는 오늘 하루 이 책방에 단 하나의 생명체라도 책방에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꼭 손님이 아니더라도.
어떤 날은 동네 삼춘이 지나는 길에 책방에 오시면 잔치커피 한 잔을 타드리곤 했다. 그리고 그때 책방에 매일같이 오가던 이들이 있었으니, 그건 길냥이들이었다.
덕분에 책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조금씩 풍요로워지기 시작했다. 길냥이들에게 밥을 주기 시작하면서 초보 책방 사장의 목표는 '고양이 사료를 사기 위해 책을 팔아야겠다'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책방 처음 1년은 고양이와 함께한 날들이 훨씬 많았다. 나는 고양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까만 고양이는 '흑임자'. 성은 흑 씨, 이름은 임자.
알록달록한 고양이는 '깨강정'. 성은 깨 씨, 이름은 강정.
노란 고양이는 '청국장'. 성은 청 씨, 이름은 국장.
여름에는 더위에 지친 고양이들이 책방 옆 커다란 토란잎 아래 그늘에서 잠을 자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책방 지붕에서 뭔가 소리가 났다. 설마, 쥐? 알고 보니 다행히도 그건 흑임자의 아기 고양이였다. 아기 고양이가 책방 지붕 아래 살고 있었던 거다. 아기 고양이에게는 어미 흑임자의 성씨를 따라 '흑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우리는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며 제법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육지에 일을 보고 다시 책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책방 앞 잔디밭에 흑임자가 죽어 있었다. 내가 육지에 일 보러 간 사이 들개가 책방에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흑임자를 녀석이 늘 앉아 있던 귤나무 아래에 묻어주었다. 내 주변에서 누군가 죽어서 사라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 정말 많이 울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가장 잔인한 것은 고양이가 세상에서 사라졌는데도 일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이었다. 맨날 보던 녀석이 없어지니 너무 허망했다. 그 뒤로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기로 했다. 물론 책방에 오는 녀석들에게 밥은 계속 줬지만.
오래전부터 책방은 길냥이들의 부엌이었다고 한다. 우연히 이곳에 살던 분을 만났는데 자신이 어렸을 때도 길냥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책방 손님들에게 조심스레 얘길 건넨다. 책방 지붕에 고양이가 살고 있는데 간혹 걸어 다니는 소리가 나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쥐가 아니라 고양이니까. 어떤 손님들은 고양이 간식을 일부러 챙겨오기도 했고, 책방 고양이들 덕분에 <묘한 서점>이라는 책에 키라네 책부엌이 나오기도 했다.
나는 고양이 밥을 주면서 책방의 하루를 시작하고, 고양이 밥을 주면서 책방의 하루를 마감했다.
표선오일장에서 사온 보리콩을 안주 삼아 와인 한 잔을 홀짝이며 책방 앞에 앉았다. 라디오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인 <세상의 모든 음악>의 시그널이 흘러나온다. 길냥이 가족 세 마리가 모두 저녁 먹으러 책방에 왔다. 무슨 일인지 셋 다 밥을 다 드시고, 사이좋게 책방 앞 잔디밭을 뛰어다니며 책방 안을 기웃거렸다.
이게 바로 내가 가장 애정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란 단어 안에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고양이가 함께 있다.
사람들은 길고양이에게 밥 주는 책방 사장인 나를 좋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오해다. 내가 고양이들에게 오히려 감사하다는 거다. 내가 이렇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거니까. 그래서 나는 고양이에게 밥을 줄 때마다 오늘도 밥 먹으러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책방 위에 사는 이 길고양이들이 아니었으면 책방이 참 많이 외로웠을 텐데. 고양이들 덕분에 책방도 나도 늘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년을 책방의 관찰자로 지내며 알게 됐다. 책방은 책만 파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이 함께하는 곳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