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 미국 국채 시장의 큰손이 되다
스테이블코인의 위상이 달라졌다. 가상자산이라는 이름 아래 한때 투기 자산으로 취급받던 존재가 이제는 미국의 국채 시장을 떠받치는 ‘큰손’으로 떠오르고 있다. 단순한 기술적 진화가 아니라, 지정학적 무기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미국의 정책 기조 변화는 이러한 흐름을 가속화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화폐(CBDC)에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민간이 발행하는 스테이블코인을 지지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시장 자율성을 강조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달러 패권 유지를 위한 전략으로 읽힌다.
실제 우리에게 미칠 파급력을 예상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국내 대기업인 SSG나 카카오가 USDC(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를 결제 수단으로 받아들이고, 월급을 USDC로 지급한다고 가정해 보자. 소비자는 굳이 원화를 보유하거나 환전소를 찾을 이유가 줄어든다. 이는 한국 원화에 대한 수요 감소로 직결되고, 통화 주권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USDC는 미국 기업 서클이 발행하는 스테이블코인이다. ‘1USDC = 1달러’로 고정된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발행사는 미국 단기 국채와 같은 안전자산을 담보로 보유한다. 다시 말해, 스테이블코인이 확산될수록 미국 국채에 대한 수요도 동반 상승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미국 정부의 재정정책과 맞물리며 작동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규모 감세안을 추진 중이다. 감세는 필연적으로 재정적자 확대를 부르고, 그에 따라 국채 발행도 늘 수밖에 없다. 문제는 ‘셀 아메리카’ 정서가 강해지는 시장 분위기 속에서, 이를 소화할 신규 수요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스테이블코인 준비금의 규모 및 성장 — 미국 단기국채 보유 상위 주체들과의 비교
그 수요를 채우는 주체가 바로 스테이블코인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테더(USDT)와 서클(USDC) 등 주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이 보유한 미국 단기 국채 규모는 이미 중국을 앞섰다. 이번에 미 상원을 통과한 지니어스 법에 따르면 이들 발행사는 달러 현금 또는 만기 93일 이내의 단기 국채를 1:1로 보유해야 하며, 이는 곧 국채 수요의 견고한 기반이 된다.
정책과 제도도 이 흐름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난 6월, 미국 상원은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에 편입하는 '지니어스 법(GENIUS Act)'을 통과시켰다.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서클의 주가는 공모가 대비 8배 이상 급등했고, 미 재무장관은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2030년까지 3조70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 각국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각국은 자국 내 가상자산의 법적 지위를 재정의하고 규제 명확화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역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정책 과제로 검토 중이다.
이처럼 스테이블코인은 핀테크의 경계를 넘어, 통화 패권을 둘러싼 지정학의 최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은 민간 스테이블코인을 무기로 삼아 달러 중심 질서를 확대하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반면 브릭스(BRICS) 국가들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도입을 통해 ‘탈달러화’에 나서고 있다. 특히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를 통해 독자적 통화권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가속화하고 있다.
미국은 이에 맞서 ‘정부’가 아닌 ‘시장’을 내세운다. 직접 디지털 달러를 찍기보다는, 민간 기업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세계에 퍼뜨리는 방식이다. 정부가 손대지 않아도, 시장이 스스로 미국 국채를 사들이고, 달러 생태계를 확장해나가는 구조다.
돈이 머무는 장소와 구조가 바뀌고 있다. 세계 질서가 이동하고 있다는 경고다. 우리는 어떤 돈을 쓰고 있는가. 그리고 그 돈은 누구의 질서에 속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