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이 넘는 뿌리 깊은 사금융의 역사 '전세'
“이제 전세방 얻었어요. 더 열심히 해서 집 사야죠.”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 같은 곳을 보면 꼭 나오던 장면이 있다. 단칸방에서 시작해 밤낮없이 일하며 자식들을 키워낸 출연자가 제작진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드디어 전세방을 얻었어요. 이제 더 열심히 벌어서 우리 집 사야죠.”
월세라는 매달의 숙제를 끝내고, 언젠가 마주할 ‘우리 집’으로 건너가기 위해 반드시 딛고 지나가야 할 징검다리였다. 우리가 믿어온 이 ‘주거 사다리’는 사실 국가가 만들어준 복지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집주인과 세입자가 아슬아슬하게 맞바꾼 ‘개인 간의 돈거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흔히 전세를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별한 제도라고 생각하지만, 역사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전세는 국가가 머리를 맞대고 만든 정책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 길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겨난 ‘사적 금융’에 가깝다. 고려 시대부터 있던 ‘전당’이나 조선 후기의 기록들을 보면, 목돈을 맡기고 남의 집에 사는 방식은 예전부터 존재했다. 볼리비아나 인도의 일부 지역에서도 우리 전세와 비슷한 모습이 나타나듯, 집이 필요한 사람과 돈이 필요한 사람이 만났을 때 생겨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학계에서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를 현대적 전세 제도의 시발점으로 본다. 부산, 인천, 원산 등 항구가 열리면서 일본인 거류지가 조성되고, 일자리를 찾아 농촌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면서 인구가 폭발했다. 주택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집값이 치솟자, 돈 빌릴 곳 마땅치 않던 집주인들은 예비 세입자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세입자는 주택 가격의 일부를 빌려주는 대신 집세를 내지 않고 거주권을 얻었다. 이것이 전세의 원초적인 모습, 즉 '집을 담보로 한 사적 대출'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전세 계약이 지금보다 더 엄격한 공증 체계를 갖췄다는 사실이다. 조선 말기에는 전세 계약 문서를 공식 관문서인 ‘가계(家栔)’에 기록했다. 세입자는 당당한 채권자로서 전세권을 자유롭게 양도할 수 있었고, 집주인은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까지는 함부로 집을 팔 수도 없었다.
1910년 조선총독부 보고서에 ‘전세’라는 이름이 처음 오른 이후, 1970년대 산업화 시기에 전세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세입자는 월세를 아껴 목돈을 불리고 집주인은 그 목돈으로 다른 자산을 키우는 ‘묘한 공생’이 이뤄진 것이다.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오르던 시절, 전세는 그 안에서 숱한 문제를 품고서도 굴러왔다. 조선 시대에도 전세 사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 그 역사는 꽤나 깊다. 다만, 집값이 오르는 기세가 워낙 좋았고, 당시에는 양반들끼리의 거래라 어느 정도 신용이 담보되었다는 설도 있다. 덕분에 문제가 터져도 서로 ‘퉁-칠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을 뿐이다.
변화가 시작된 건 국가가 이 사적인 거래에 개입하면서부터다. 1990년대 영세민을 돕겠다며 시작한 소액 대출이 어느덧 억 단위의 거대 금융이 되었고, 개인 간의 거래였던 전세에 국가가 ‘대출 보증’이라는 인공호흡기를 달아주었다.
지금의 정부는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길을 가려는 듯하다. 실제로 서울 아파트 전세 물량은 5년 만에 최악으로 줄었고, 집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비명은 커지고 있다. 특히 ‘노도강'처럼 서민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부터 전세가 마르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믿어온 사다리가 지속 가능한 존재인지 톺아봐야 할 것이다.
정부가 마음을 굳게 먹었다면, 전세는 이제 그만 보내주어야 할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으나 이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되어버린 제도. 전세방 사는 글쓴이의 한탄 섞인 예감은 이렇다.
“우리가 알던 전세의 시대는 끝나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