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류진의 <달까지 가자>를 읽고
친구 E가 물어온 적이 있다.
"혹시 <일의 기쁨과 슬픔> 있어?"
온갖 책을 찾아 읽는 잡식성 독서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익히 알아서인지, 유명한 책이라니 아마도 우리집에 있을 것 같았나보다. 나도 제목은 들어봤지만 평소에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이슈가 많이 되는 것을 보니 뭔가 흥미로운 책이기는 한가보네, 하고 넘겼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들어서인지 소설가 장류진이 <달까지 가자>라는 장편을 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어쩐지 궁금해졌다. 소위 '페이지 터너'급 책이라고 해서 그렇다면 읽어보고 싶기도 했다. 보통의 소설은 진도 나가는 것 자체에 어려움을 겪는 편이다. 인내심을 갖고 읽어보지만 장황하게 펼쳐지는 도입부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자주 진지하고 가끔 인상적인 문장의 숲에서 헤매다 보면 어느새 눈꺼풀이 내려오고 마는 것. 그래도 의무감으로 소설을 읽어보려고 시도하고 또 시도하지만, 끝까지 읽어내는 데 번번이 실패하곤 했다. 아주 가끔은 나를 잊고 몰입하게 하는 소설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드물게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이번이 그 드문 경우였나보다. 이 장편소설 한 권을 무려 이틀만에 다 읽고 말았다. 좀더 여유가 있었다면 아마 하루만에 읽어버렸을 것이다. 그저 시간이 부족했을 따름. 다해, 지송, 은상 셋이서 만들어가는 속도감 있는 이야기에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 다음 페이지, 그 다음 페이지를 정신없이 읽어나갔다. 독자를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가 깔끔하고도 대단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주인공 셋이 '이더리움'이라는 가상화폐의 세계를 유영하는 이야기다. 비트코인은 너무 흔한 소재라 이더리움을 택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더리움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스토리를 쥐락펴락하는 작가의 솜씨에 마치 드라마 한 편을 보듯 눈앞에 장면 장면이 펼쳐진다. 소설의 주요 인물 세 사람은 한 회사의 각각 다른 부서에서 비슷한 시기에 발령받아 일종의 '신입 동기'의 유대감을 갖고 만나는 동료들이다. 이들은 비전 없는 자신들의 직책과 위치에 대해 자조적으로 푸념하며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 중 작가의 유감없이 발휘되는 유머 감각에 웃지 않을 수 없는 페이지가 나온다.
바야흐로 평가 시즌이었다. 작년 한해 동안 한 일에 대한 성적표를 받는 시간. (중략) 각 등급의 알파벳은 이런 뜻이었다.
Outstanding: 특출함
Incredible: 뛰어남
Meet requirement: 요구 충족
Below requirement: 요구 이하
Need supplement: 보충 필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바꿔 불렀다. 아무래도 이쪽이 훨씬 직관적이었다.
O : 오짐
I : 인정
M : 무난
B : 별로
N : 나가
_장류진, <달까지 가자> 21-22쪽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솜씨도 훌륭하지만 이 소설의 미덕은 이런 데에 있다. 그러니까, 재미있다. '응?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하고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뿜게 만드는 그런 문장들 말이다. 그리고 직장인이라면 뼛속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재미있는데 쓰디 쓴 현실을 담아낸 데에서 오는 페이소스가 짙게 묻어나는 블랙유머가 작품 곳곳에 흐른다. 어떤 이야기를 비슷한 톤으로 진지하게 끌고 나가는 건 어찌 보면 더 쉬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남을 웃게 만드는 일은 보통의 센스가 아니고는 어렵다.
아니, 어쩌면 그건 태어나면서부터 작가의 핏줄 속에 이미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웃게 만드는 본능이자 실력. 그런데 그 유머감각을 잘 세공하여 타인의 내면에 있는 어떤 부분을 툭 하고 건드리며 일깨우는 표현으로 만들어내는 것. 휘리릭 읽히는 짧은 페이지를 쓰기 위해 작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런 솜씨를 다듬고 또 다듬었으리라.
이 소설의 애잔한 부분은 이런 장면이다.
나는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하나하나 캐치해서 추측하고 재배열하고 그 아래에 내 자리를 만들었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그랬다. 잡담 속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정보들. 어느 동네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는지, 출퇴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주말에 무슨 일을 했는지, 명절에 어디에 가는지, 부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같은 것들. 강남 주민, 유학파, 교수 딸, 의사 아들. 그런 걸 알고 난 후에는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속에서 무언가 이상하게 작아졌다. 부러움, 질투, 이런 상투적이고 민망한 이름들이 붙기도 전에 정말로 오장육부가 물리적으로 수축하는 느낌이 들었다.
(중략)
물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악의가 없다. 그냥 자기 주변의 일상적인 소재로 평범한 대화를 했을 뿐이다. 나를 쪼그라들게 하려는 의도 따위는 티끌만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게 사람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할 것이다. 타인을 주거지와 부모의 직업으로, 재력으로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교양있는 시민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천박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을 사람 자체로만 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_장류진, <달까지 가자> 103-104쪽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만한 상황. 다들 해사하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거기에서 감추지도 드러내지도 못하면서 조용히 쪼그라드는 것 같은 자기의 마음을 발견할 때 느끼는 민망함과 수치심 같은 것들. 지금껏 한 번도 이런 감정을 겪어본 적이 없다면 당신은 운이 좋거나 소설 속의 그 '악의 없는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부유함 혹은 여유로움을 공기처럼 두르고 살아서 그게 타인에게도 당연한 것이리라 굳게 믿고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을 보며 다해는 생각한다.
저런 애들은 여기서 박봉 받으면서 일해도 결혼할 때 엄마 아빠가 집 사주고 차 사주겠지? 못 사줘도 일부라도 보태줄 거 아냐? 마음이 되게 편하겠다······ 야······ 진짜로······ 걱정이 없겠다······ 저렇게 살 수만 있으면······ 되게 든든하겠다······ 저 사람은 내가 이렇게 옹졸하다는 걸 모르겠지? 아마 날 좋아할지도 몰라······ 생각이 여기까지 오면 여유 있는 집안에서 자란 게 부러운 게 아니라 사람을 그 사람의 존재만으로 볼 수 있는 건강한 마음이 부러웠다. 반대로 나는 속으로 이렇게 좀스럽게 굴면서 쉽게 사람을 좋아하지 못했다.
_장류진, <달까지 가자> 105쪽
아, 세상에 이렇게 슬픈 이야기가 있을까. 물론 역사 속의 비극은 너무나 촘촘해서 거대한 참사에 비하면 이런 건 슬픔 축에도 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마 발화하기도 아니, 이런 생각을 스스로 인정하기도 민망한 그런 류의 애매한 감정을 작가는 참 섬세하게 포착해서 다해의 마음 속 대사로 탄생시켰다. 이런 류의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켜켜이 쌓여 나중에는 그 실체조차 간파하기 어려운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한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정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대한민국에서는 '한恨'이라는 절묘한 단어로 불렀던 것이고. 전쟁과 식민지 시절을 겪으며 민족 안에 흐르던 한이 있는가 하면, 21세기 도시에는 세분화되어 저마다 갖고 있는 자잘한 한이라는 것도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이른바 '나노화된 한'이랄까. 그것을 오늘의 작가와 감독들은 각자의 통찰이라는 핀셋으로 세밀하게 집어내어 작품화하는 것일 테고.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라면 예술가들에게는 그 어느 것도 사소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시인이 달리 시인이겠는가.
조선시대의 노비들이 신분제의 견고함 앞에서 울분을 토했다면, 눈에 보이는 신분제도는 없어졌지만 이 사회에 촘촘하게 그물처럼 존재하는 계층의 격차는 거기에 항변하는 것조차 우스워져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다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자기의 옹졸함을 탓하는 것뿐이었겠지. 그 틈새로 작가는 이러한 불평등 너머로 우리의 젊은 여성들이 결핍을 어떻게 감각하며 여기에 대처하는지 보여준다. 독자의 마음을 자꾸만 쫄깃하게 하면서.
다해가 뭔가 럭셔리한 문화를 누리는 것을 불편해하고 자신의 자격에 대해 회의하고 있을 때 동료이자 언니인 은상이 말한다.
"야! 니가 그럴 자격이 왜 없냐? 그럴 자격 있다. 누구든 좋은 걸, 더 좋은 걸 누릴 자격이 있어.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너도, 나도, 우리 엄마도. 그건 다 마찬가지인 거야. 세상에 좋은 게, 더 좋은 게, 더 더 더 좋은 게 존재하는데, 그걸 알아버렸는데 어떡해?"
_장류진, <달까지 가자> 194쪽
말 한 마디를 해도 시원시원하게 하는 은상은 이런 말도 한다.
"저 사람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했단 말이야."
"무슨 말?"
"나한테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 너한테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 난 그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역시, 그것 때문이었구나. 은상 언니가 목소리를 낮춘 채 이어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을 정말로 싫어한다고. 그렇게 사람을 아래로 보면서 하는 말이 어디 있느냐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정도'라는 말 앞에 '나한테는 아니지만'이 생략된 것 같다고 했다. 나한텐 아니지만 너한테면 그 정도는 족하지. 그 정도면 감사해야지. 그런 말들. 기만적이라고 했다. 그런 종류의 말을 하는 사람의 면면을 잘 봐두라고 했다. 그게 정말로 자신을 포함한 누구에게나 모자람 없이 넉넉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를.
장류진, <달까지 가자> 309쪽
이것은 마치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선언의 21세기 버전 아닌가.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 또한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대한민국 헌법 제10조)
이러한 선언과 권리가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직관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이 세계가 실제로는 그렇지 못함을 너무나 선명하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행복을 누리면서도 죄책감을 가지고 자격을 의심하게 하는 사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는 점에서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의 함의는 가볍지 않다. 소설 속 문장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고, 인간의 존엄과 예의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당신은 어디쯤에 서 있느냐고.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응답하겠느냐고. 어쩌면 이더리움은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 우리에게 읽히기에 너무나도 영리한 방편.
그러고 보면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소설을 좀처럼 만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지하지만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소설을 만나고 싶다. 작가의 작품세계를 표현한 것만이 아니라 독자의 입장을 헤아려주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그런 작품을 각종 OTT 서비스나 유튜브 말고도 책으로도 만나고 싶다. 소설가에게 독자가 작가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고 헤아려주는 존재로만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독자에게 책을 읽는 '기쁨과 슬픔'을 고루 선사해주는 소설가를 만나고 싶다. 때때로 웃음까지 선사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모든 소설이 그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여전히 문학은 언어로 지은 집이라는 예술로서의 의의를 가짐을 잘 알고 있다. 문학 바깥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실험과 시도가 계속 이루어짐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새롭고 독보적인 작품은 언제나 즐거움과 놀라움을 선사하곤 하니까. 다만 독자로서의 작은 바람이라고 하겠다. 오랜 세월 울림을 선사할 만큼의 무게를 지녔으면서도 이 길고 긴 겨울 밤 꼼짝없이 독자를 사로잡히게 만드는 재주를 갖춘 작품. 그런 소설을, 아주 많이 만나고 싶다고 하면 욕심일까.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정주행 한 후 나는 오랜만에 시와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드라마의 힘 있는 스토리와 인상적인 대사는 마치 한 편의 문학작품을 보여주는 듯 흘렀고, 나는 잘 쓰여진 소설 한 권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혹 어떤 장면은 시로 읽혔다. 드라마와 소설에서 얻는 즐거움이 반드시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책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고, 독자의 마음에 성큼 다가서는 소설이라면 어떤 책이든 기꺼이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쯤 하여 <달까지 가자>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이야기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지만, 아직 이 책을 접하지 않은 독자를 위해 괄호로 남겨둔다. 끝까지 다 읽은 이가 있다면 당신과 즐거이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우리의 오늘과 내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 냉혹한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에 관하여. 혹 대단하게 살아남지는 못한다 하여도 당신과 나누는 대화 사이에서 이미 우리의 오늘은 조금쯤 따뜻해져 있을 테니까.
덧 : 주인공 다해의 이름이 왜 '다해'인지 어쩐지 알 것 같아졌다(작가의 의도와는 상관 없을지라도). 다해가 곁에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줄 거다. 다해야, 너 하고 싶은 거 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