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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칫거리 Nov 13. 2019

프로수발러의 여행 준비

여행 준비




할머니, 내가 커서 유럽 여행 보내줄게


“할머니가 요즘 깜박깜박하셔”란 엄마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여든이 넘으셨지만, 연세보다 건강하셔 종종 60대로 오해받으시곤 했다. 중학생이던 나를 위해 ‘맛있는 공부’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시던 분인데 치매라니. 더욱이 나는 유학 중이던 터라 할머니의 초기 치매 소식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계기는 짧은 국제 전화. 3분 남짓 통화에서 할머니는 한국 언제 들어오냐는 질문을 세 번 넘게 하셨다. 당황한 나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할머니 갑자기 왜 그래~”란 말만 되풀이했다. 전화를 끊고 펑펑 울었다.


가장 여행하고 싶은 나라를 묻는 말에 할머니는 늘 이태리라고 하셨다. 세계 3대 미항 나폴리와 물의 도시 베니스를 가보고 싶다는 말씀에 철부지 열다섯은 “어른 되면 할머니 유럽 여행 보내줄게”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내가 어른이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건 알게 됐다. 10년 전 할머니와 한 약속을 지킬 때가 왔다.


얼굴은 쭈글쭈글해도 나이는 얼마 안 먹었다는 할머니, 할아버지




첫 직장에서 모은 900만 원


문제는 여행 경비였다. 초저가 패키지는 두 분께 체력적으로 무리가 될 수 있었다. 1인당 최소 300만 원대 패키지 X 3명 X 10일간 유럽 여행 예산을 짜 보니 대략 1,100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다행히 그즈음 첫 직장을 구했다. 8개월 동안 매월 100만 원씩 여행 적금을 부었고, 비상금 백만 원을 합쳐 900만 원을 마련했다.


여전히 예산보다 200만 원이 부족했다. 엄마와 두 외삼촌으로부터 효도를 내세운 삥(?)을 뜯을 계획을 세웠다. 여행 자체를 기특하게 여겨 선뜻 도와주실 걸 알았지만 그냥 받기에는 염치없었다. 곧 다가오는 설에 맞춰 모자란 경비를 벌기 위한 PT를 준비했다. 여행 동기를 설명했고 다양한 패키지를 표로 비교했으며 안전 관련 대비책을 정리했다. 부족한 돈을 받아 여행 경비를 채웠다.



열다섯 중학생은 맞춤 장기 여행을 계획했지만 스물다섯 신입사원의 사정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다. 내 한 몸만 챙기면 됐던 배낭여행과는 A부터 Z까지 달랐다. 두 분의 안전과 체력을 고려해 가이드가 동행하는 패키지여행을 골랐다. 가을 즈음 가려던 여행을 개인적인 사정으로 두 계절 앞당겼다. 겨우 10일 정도의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설명서라곤 읽지 않는 내가 여행상품 약관의 작은 글자를 한 톨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잘 보이지도 않는 옅은 색으로 만 85세 이상은 패키지 기본 보험 제외 대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으로 '오, 내가 뭘 하려는 거지'란 생각이 들었다.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 채 여차저차 첫 단추를 꿰었다.




프로수발러의 바리바리 짐 싸기


여행의 시작이 면세점이라면, 여행의 준비는 단연 다*소. 배춧잎 한 장이면 만수르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제대로 석유 부자 놀이를 했다. 짐 들어줄 하인이 없어 팔에 장바구니 자국이 남긴 했지만.


혼자 여행 때는 컵라면 하나 안 챙겼지만 이번엔 한 칸이 컵밥


효자템 1위는 핫팩 방석. 허리 닿을 즈음에 핫팩 방석을 깔고, 발 닿을 즈음에 찍찍이 핫팩을 붙였다. 광고처럼 보일러는 못 놔드려도 세미 전기장판은 놓을 수 있었다. 2위는 참이슬 세트. 우리 할아버지도 tvN 꽃할배들처럼 빡센 일정 속 약주 한 잔으로 피로를 푸셨다. 김과 통조림 깻잎은 안주가, 매콤한 쌀국수와 누룽지 컵라면은 해장국이 됐다. 여행에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셨던 듯하다. 3위는 각종 붙이는 것들. 씻고 나오시면 종아리에는 휴족시간을, 발에는 발바닥용 파스를 붙여드렸다. 얼굴에는 팩, 어깨에는 동전 파스를, 여행하다 다친 상처에는 방수 밴드까지. 매일 밤 자기 전 의례를 위한 제품을 말 그대로 바리바리 싸갔다.


닉값 제대로 한 효자템


사실 바리바리는 할머니께 자주 하던 말이다. "사면되는데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오셨어요" "왜 이렇게 바리바리 챙겨주셨어" 감사하다는 말이 쑥스럽고 고생하신 게 죄송해서 할머니의 수고를 그렇게 표현하곤했다. 사춘기 때는 친구를 마주칠까, 할머니가 싸주신 반찬통으로 가득한 쇼핑백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다. 여행을 준비해보니까 할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겠더라. 바리바리 사랑을 싸주셨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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