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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칫거리 Nov 14. 2019

할머니 통째로 분실주의

여행 출발


공항 멀리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자 웃음부터 났다. 손자가 사준 모자부터 삼촌이 사드린 신발까지 위아래 꽁꽁 싸매고 오셨기 때문이다. 웃음도 잠시 그새 해프닝이 벌어졌다. 할머니께서 검정 코트 긴 머리 여자를 나로 착각해 따라갈 뻔하신 것. 할머니 가방이 아니라, 할머니를 통째로 잃어버릴 수도 있다니. 갑자기 긴장이 몰려왔다. 할아버지께서 "나도 네 할머니 뒷모습 보고 할머니가 아니라 아줌마인 줄 착각했어"라며 농담하시기 전까지.


2월 칼바람에 대비한 완전 무장




할머니의 닉값 VS 할아버지의 드립력


할머니 놀리는 재미에 사시는 듯 한 할아버지는 사실 할머니의 새로운 자아를 받아들이느라 고군분투 중이시다. 우리 할머니 성함은 한 유 순, 태어날 때 방긋방긋 웃던 유순한 모습에 지은 이름이다. 그리고 팔십 평생을 이름처럼 사셨다. 그야말로 닉값의 대명사랄까.


유순한 할머니께서 어느 날부터 속마음을 필터 없이 말씀하신다. 심지어 기억력 감퇴로 가끔 할아버지 속을 뒤집어 놓기까지 하신다. 화내실 법도 하지만 할아버지는 웬만하면 언성을 높이지 않으신다. 가난한 청년 시절 고모할머니 댁에 얹혀살았던 기억 때문이다. 두 어르신이 매일 죽을 듯 다투셔서 너무 괴로웠는데, 돌이켜보니 두 분 다 초기 치매 셨던 것 같다고. 본인 자식들에게는 같은 괴로움을 주고 싶지 않다며 조심하신다.


지상직 승무원이 할아버지 여권에 사인이 없다며 안내한다. 할머니 여권에는 이미 사인되어있는 걸 보시곤 언제 남편 몰래 해외 다녀왔냐며 또 놀리신다. 번지는 미소 안에 사랑과 인내가 느껴진다.



여행 1일 차
여행 7일 차




청력과 경청의 상관관계

시간이 남자 할아버지는 주류 면세점에 들어가셨다. 종업원이 계산기를 들이밀며 할인율을 설명한다. "10불 미만은 지금 10%밖에 할인이 적용되지 않는데 여기 40불 이상 제품들은 20%에 추가 5% 적용되고 회원이시라면 얼마..." 찬찬히 들으시던 할아버지는 "하하, 고마워요" 눈 마주치시며 감사인사를 건네신다.


그제야 종업원이 계산기를 내려놓으며 천천히 둘러보시라는 말을 건넨다. 빠른 템포의 설명을 못 알아들으실까 지켜보던 나는 탁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귀 좀 밝다고 잘난 체할게 아니구나. 상대의 말을 경청한 적이 언제 인가 싶어 부끄러워졌다.


탑승구 의자에 앉아계시던 할머니는 쓰레기가 신경 쓰이셨는지 결국 가서 주워오신다. 10년 전 즈음 집 근처 광교산에 놀러 갔을 때도 할머니는 쓰레기를 주우셨다. 아빠가 장모님은 용인시 주민이신데 성남시 모범 시민상을 받으시겠다며 놀렸었다. 성남시, 인천시, 아마 City of London에서도 모범시민이실 귀여운 할머니.


사진을 단톡 방에 보내자 큰삼촌께서 어머니 미소가 천진난만하다고 하신다. 할머니께서 "나이 말하면 사람들이 놀래"하시니 할아버지께서 "그러게 당신은 사람들 좀 놀라게 하지 마" 너스레를 떠신다.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탑승 시간이 다가왔다.



80세가 아닌 8살의 호기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날개는 계속 이렇게 펴 있는 건가? 하늘에서 길을 어떻게 찾는지... 네비가 있겠지? 하여튼 비행기 만든 사람이 대단한 거여" 비행기를 처음 타시는 것도 아니신데 여덟 살처럼 호기심이 가득하다. 할아버지는 창가 자리 앉은 할머니께 심각한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당신만 비즈니스석에 앉았으니 이코노미인 우리에게 돈을 내라며. 저기까지가 구름이네, 저기까지가 바다네 옥신각신하시면서도 내내 웃으신다.


팩소주를 챙길 때 눈치챌 수도 있겠지만, 할아버지는 약주를 즐기신다. 기내식 메뉴에 맥주도 있다고 말씀드리니 맥주는 안 드신단다. 그런 할아버지를 가장 기쁘게 만든 건 기내 미니 와인. 한 잔 일 줄 알았는데 보틀로 주냐며 밝은 미소를 보여주신다.



할아버지께 찐 미소를 선물한 기내 와인

        

영국 항공이라 기내 엔터테인먼트는 영어만 지원했다. 이것저것 누르시길래 비행지도 찾는 것까지 보고 깜빡 잠들었다. 눈 뜨니 각자 추억에 잠겨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시청 중. 영문학을 전공하신 할아버지께서 작가에 대해 쭉 읊어주셨다. 할머니께서도 젊을 적 일곱 권짜리 책을 세 번이나 완독 하셨다고. 찾아보니 내가 태어난 연도에 개봉한 영화다.


흑백영화 세대와 4D영화 세대를 태운 비행기가 어느덧 히드로 공항에 진입했다. '내일은 런던의 태양이 뜬다'는 비비안 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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