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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칫거리 Nov 15. 2019

영국에선 우리 돈 안 받지?

런던 윈저성과 이튼스쿨


로밍 안 한 폴더폰으로 뭘 보시던걸까




파운드와 아이스크림


런던 외곽 윈저성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자꾸 주위를 둘러보신다. 여기선 우리 돈 안 받냐며 애타 하시길래 뭐 필요하시냐고 여쭈니, 너 아이스크림 사줘야 한다고 하신다. 주변 가판대에서 금발 꼬마들이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다섯 살인 줄 아시나, 파운드도 모르면서. 목이 매는 걸 숨기려 괜히 볼멘 소리를 했다.


신입 사원인 나는 모든 게 서툴러 스스로를 의심하곤 했다. 나만 이상한지, 내가 모자란 지 끊임없이 자책했다. 그럴 때마다 스물다섯 살을 다섯 살처럼 지켜보고 응원하는 사람이 있어 용기 낼 수 있었다. “그럼 우리 손녀딸 착하지, 얼마나 착한데" 누구도 흠집 낼 수 없는 할머니 속 나의 자리, 착한 손녀딸. 그거면 된다. 우리 할머니가 나 착하대! 사회초년생의 전투력이 샘솟았다.


꽃만 보시면 자목련인지 개나리인지 예쁘게 폈다며 좋아하셨다




이튼 스쿨 앞 두 학생


윈저성에서 도보 10분이면 영국 명문 사립학교 이튼스쿨이 나온다. 역대 15명의 총리를 배출했으며 재학생 1/3은 옥스퍼드나 캠브릿지를 간다는 기숙학교다. “여기 학생들은 으쓱으쓱 하며 이 문을 드나들었겠지” 할아버지는 교장선생님으로 일하셨던 때가 생각나셨나 보다. 사진에는 통 관심 없던 분이 교문 앞에서 한 장을 부탁하신다.


유일하게 할아버지 요청으로 찍은 사진


대학에 붙었을 즈음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갔었다. 식탁 의자에 앉자 “그래, 중국 고대 시조를 공부하니 어떻더냐” 물어보셨다. 우물쭈물하니 그 자리에서 이보와 두백의 시를 읊으셨다. 수십 년 전에 외우신 시를 잊지 않기 위해 다시 보시고 다시 보셨다는 할아버지 앞에서 “대학 시험 치자 마자 다 잊어버렸죠~”라는 농담은 쏙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여행 내내 꿀 발라 놓으신 듯 가이드님 가까이 붙어계셨다. 알고 보니 설명을 더 듣고 싶으셨다고한다. 맞다. 몇년 전 영어 공부를 위해 엄마에게 녹음기를 부탁하신 것도 모자라 청력에 손상이 올 때까지 되풀이해 들으신 분이지. 학교에서는 교장선생님이셨지만 인생에서는 늘 학생이셨다. 


옆에서 무단횡단해도 신호를 기다리는 만국 모범시민


옆에선 “이 학생들처럼 열공해서 명문대 가야지”라는 한국인 아주머니의 잔소리가 들렸다. 아들처럼 보이는 꼬마는 싫다며 칭얼댔다. 싫어도 배워야하는 꼬마와 좋아서 배우고 싶은 할아버지. 이튼 스쿨 앞 두 학생의 그림자 사이 내가 서 있었다. 꼬마를 뒤로하고 할아버지를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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