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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칫거리 Nov 15. 2019

칼로 템즈강 물 베기

런던 타워브리지와 런던타워


귀한 런던 날씨요정 강림




쫄깃쫄깃한 런던타워 기념품


할머니는 전라도 분이시다. 할아버지의 까다로운 다섯 누님을 모두 만족시킨 음식 솜씨의 소유자. 나와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데 어느 순간부터 간이 맞지 않았다. 주방에 뭐가 있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하신다. 그 와중에도 내가 찹쌀떡을 좋아하는 건 잊지 않으신다. 발 받침대 위에 올라 아픈 팔로 몇 시간을 저어 만든 팥앙금은 머리가 띵할 만큼 달다.


주방칼도 못 찾게 됐지만 할머니께도 쫀득쫀득 달라붙는 기억이 한 개씩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손주와 며느리 줄 선물이 그랬다. 처음 들어간 기념품 가게는 타워 브리지 앞. 손주에게 뭐가 좋을까 고민하시더니 타워브리지 모형이 달랑거리는 남색 펜과 똑딱이 손거울을 집으셨다. 계산하고 나오는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기념품관 맥주잔 들고


미소에 줄을 그은 건 정신없는 공항 수하물 검사. 몰아치는 줄 때문에 정신 없던 할아버지께서 기념품이 담긴 봉투를 검사대에 두고 오신 모양이다. 깜빡한 대가는 웃기고 가혹했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애들 줄 남색 펜을 잃어버려 다시 사야 한다"는 잔소리를 열흘 내내 들으셨다. 유럽이 며칠째 인지도 가물가물하시던 할머니가 손주 선물만큼은  순간도 잊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만든 팥앙금 속에는 할아버지가 깐 밤도 들어있다. 잔소리를 멈추라는 호소를 들으니 왠지 다시는 밤 안 깐다고 하셨던 원성이 겹쳐 들린다. 손녀인 내 귀에는 잔소리도, 호소도, 원성도 찹쌀떡처럼 달콤하다. 모두 칼로 템즈강 물 베기인 걸 알기 때문이다.





템즈강물로도 소양강물로도


런던은 어딜 봐도 건물이 고풍스럽다며 감탄하시지만 강물은 영 아닌가 보다. 타워브리지 아래로 흐르는 템즈강을 보니 소양강 맑은 물이 떠오르셨다고. 영국 사회문화 수업 교수님께서 런더너는 런던 날씨에 대해 "내 새끼 까도 내가 깐다"는 태도를 보인다고 하셨다. 다행히 이 날 하늘은 소양강물처럼 맑아 남의 새끼(?) 깔 일 없이 화창한 날씨를 만끽했다.


타워브릿지 열리는 모습을 못 봐 아쉬웠다


패키지 여행에는 선택 관광이라는 개념이 있다. 로마 벤츠 투어, 파리 에펠탑 투어 등 도시별 전문 가이드님의 설명을 들으며 관광지에 얽힌 문화와 역사에 관해 한층 더 깊이 배울 수 있어 좋다. 선택하지 않으면 여유롭게 자유시간을 가지면 된다. 런던 선택 관광은 시내를 계속 걸어야 했기에 남는 쪽을 택했다.


들어가고 싶으신지 런던타워 입구에서 기웃기웃


할아버지는 런던타워가 궁금하셨나 보다. 들어가고 싶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지만 입구 앞을 서성이신다. 둘러보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려 입장을 못하는 대신 얼른 스마트폰에 검색을 했다. 영국 왕실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소라는 소개글이 인상 깊다. 한 편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와 왕관 같은 보물을 전시하고, 지하에서는 중세 갑옷과 방패 같은 전쟁 무기를 보관한다고한다. 눈이 멀 만큼 반짝이는 530캐럿으로도 피비린내는 숨길 수 없었겠지. 한 때 수많은 귀족의 처형장으로 쓰였다는 설명을 읽으니 아름답던 타워가 섬뜩하게 느껴진다.


사진에 안 나온 한 쪽 귀에는 무전기 이어폰


기다리는 사이 런던 가이드님과 동행 분들이 근처에 도착했다. 선택 관광을 한 사람들에게만 들리는 가이드님 설명 때문에 무전기가 지지직 거렸다. 끄셔도 괜찮다고 말씀드렸지만 설명을 들으니 도움이 된다며 계속 켜 두신다. 템즈강물로도 소양강물로도 할아버지의 불타는 학구열은 끌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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