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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칫거리 Nov 15. 2019

할아버지의 문장을 고쳐 썼다

런던 대영박물관


런던 설민석 같았던 가이드님




대영박물관에서 고민한 세대 차이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대영박물관에 도착했다. 런던 가이드님이 역사 이야기와 함께 인사이트까지 들려주신다. 고대의 용맹함을 드러내기 위한 사자 사냥이 현대의 보여주기 식 행정 같다는 말에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대영박물관을 보는 상반된 시각에 관해서도 설명하신다. 관리를 위해 쏟는 비용과 노력은 칭찬받아 마땅하다는 의견과 아무리 포장해도 장물 보관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


영국은 보이는 건물마다 고풍스럽다는 칭찬 후 남의 꺼 뺏어 자기들 치장했다는 말을 매번 붙이시던 할머니는 후자의 손을 드신다. 어려서 광복을 맞은 1930년대생의 설움 때문이실까. 학교에서 일본어 학습을 강요하고 동생 업어 피난 가던 그 시절은 어땠을까.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우리의 세대 차이에 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두 시대의 정서, 두 사람의 마음


스무 살이 되던 해,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 마시는 중이었다. 할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 번호를 아시는 줄도 몰랐는데. 종이와 펜이 있냐고 물으시곤 불러주는 문장을 받아 적으라고 하셨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끄러운 술잔 소리를 뚫고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라보는 앞날은 멀게만 보이지만 흘려보낸 지난날은 덧없고 아쉽고 후회스럽다. 젊은 시절 매 순간 최선을 다하자." 전화기를 귀에 바싹 대고 들리는 대로 아이폰 메모장에 받아 적었다. 감명받은 나는 도자기 체험 때 저 문장을 컵에 새겨 넣었다. 베스트셀러 목록이 자기 계발서로 꽉 차던 해였다.


대학을 채 졸업하기도 전 베스트셀러 목록이 물갈이됐다.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높은 별만 바라보다 목이 꺾였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내 가치관도 변했다. 무작정 최선을 다해 살라는 말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았다. 동시에 할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라떼는 말이야~'라는 농담을 할 수도 없었다.



은희경의 '소년을 위로해줘' 속 구절이 떠올랐다.

전쟁과 폭력을 겪은 세대. 그리고 풍요롭게 배려받고 자란 세대. 굶주림이나 고독이 둘 중 어느 쪽에게 더 두려운 존재일까. 풍요롭게 자란 세대에게 궁핍은 가난을 통과한 세대보다 오히려 더 두려운 재앙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들이 겪어본 상처보다, 겪어보지 못한 상실에 더 크게 반응하는 게 아들 세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 혹은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수백 년에 걸쳐 겪은 일을 빠른 시간 안에 압축적으로 경험했다. 농경사회에서 정보화 사회까지, 이렇게 엄청나게 다른 시대의 정서를 가진 인간들이 동시대에 섞여 사는 건 드문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서로 다르다는 것......(중략)


아무리 달라도 스무 살이 된 손녀딸을 위해 전화하신 할아버지의 마음은 알 수 있다. 나를 아끼며 내가 행복해지시길 바라는 걸 거다.


우리 모두는 궁극적으로 우주의 어린 아들, 즉 소년들이다. 서로 위로해주자.

나 역시 할아버지의 문장을 떠올리면 쓸쓸하다. 흘려보낸 지난 세월 속에 엄마와 나를 보살펴야 했던 날은 몇 할을 차지할까. 아쉬움과 후회를 없앨 수는 없지만 후에 새로운 문장을 쓰실 수 있도록 위로해드리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불러주신 문장을 내 시대의 정서에 맞게 고쳐 썼다. "젊은 시절 매 순간 행복해지자.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좋다. 네가 행복을 찾는 길을 응원하겠다.” 나의 퇴고를 마음에 들어하실 거라 믿는다.  


두 시대의 정서는 달랐지만, 두 사람의 진심은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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