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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칫거리 Nov 16. 2019

전주여고의 유럽 일기장

런던 하이드파크와 버킹엄 궁


"내가 자꾸 잊어버리니까 써야 돼"




전주여고의 유럽 일기장


영국 숙소에 도착했다. 추울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아늑하다. 셋이서 맞춘 폭신폭신한 수면 잠옷을 꺼낸다. 할머니는 실수로 남성용 잠옷을 입으셔서 긴소매를 몇 번이나 접으신다. 그건 남성용이라고 알려드리니, 소주 드시던 할아버지께서 고개를 휙 돌려 "왠지 탐나더라!! 얼른 벗어요!!" 하신다. 할머니가 칫솔을 못 찾셨을 땐 손가락으로 닦으라고도 하셨다. 할머니 놀리는 재미에 사시는 게 틀림없다.


실수로 입은 남성용 수면 잠옷
놀릴 기회를 놓치시지 않는다


할머니는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돼 피곤하신 듯하다. 바로 주무시지 않고 캐리어에서 주섬주섬 일기장과 펜을 꺼내셨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웃겼는데 사뭇 진지하게 적으신다. 여기까지 와서 잊어버리면 안 된다며 오늘 있었던 일을 함께 되짚는다.


지역 치매예방센터를 같이 다니는 분들은 할머니를 "전주여고"라고 부른다. 학력을 자세히 쓰래서 적었더니, 좋은 학교라며 칭찬처럼 부르시는 거다. 여기까지는 훈훈한데 이어진 이야기가 놀라웠다. 치매 검사 당시 직원이 학력을 보곤 "어머~ 고등학교 나오신 할머니는 치매 안 걸려요"라고 했다는 것. 농담이었겠지만 전해 들은 나는 속이 끓는다. 치매예방센터에 주 1회밖에 못 간다는 사실 때문에 더 그렇다. 옆에서는 할머니가 감기는 눈꺼풀과 싸우며 오늘 뭘 봤는지 물으신다.


매일 밤 이어진 일기 쓰기


불을 끄고 잠을 청한다. 이불은 폭신하지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쉽게 잠들지 못한다. 주무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일어나 앉으신다. 평소에도 자다가 다리가 저려 일어나 한참씩 주무르신다고 한다. 내가 모르는 할머니의 밤이 있구나.


한 밤 중 홀로 깨 저리는 다리를 주무르실 때 어떤 기분이실까. 주물러도 돌아오지 않는 기억력 때문에 불현듯 두렵진 않으셨을까. 전주여고 때문에 마음이 아린 채 여행 첫날밤을 보낸다.




여왕 언니 말고 X언니


버킹엄 궁 앞


이튿날 아침 일찍 버킹엄 궁으로 향한다. 운 좋으면 손을 흔드는 여왕도 볼 수 있다는데 아쉽게 보지 못했다. 대신 영국 여왕처럼 손을 흔드신다. 검색해보니 엘리자베스 2세가 두 분보다 연세가 많으시다.


할머니께 여왕 언니가 저기 계신다며 장난치니, 고등학생 때 X언니는 있었다고 하신다. 당시에 X언니가 유행해서, 한 언니가 얌전한 할머니를 맘에 들어해 X자매를 맺었다고. 내 세대에서 쓰이는 의미와는 다른 듯 했지만 할머니 고딩 시절 얘기를 들으니 재밌었다.


여윾시 영국 요리(?)


점심에 고기를 먹는다는 말에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질기고 별로였다. 영국 요리의 악명을 느낄 만큼은 아니었지만 이탈리아로 출발하는 비행기가 왠지 기다려졌다.




앨버트 기념비 사랑 테스트


런던 마지막 관광지는 하이드파크. 영국은 왕실 사유지로 쓰이던 공원을 일반 시민을 위해 개방한 경우가 많은데 하이드파크도 그중 하나다. 예전에 갔던 프림로즈 힐이 아기자기한 느낌이었다면 하이드파크는 넓-었다. 철퍼덕 잔디밭에 앉아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여유로운 하이드 파크


쌀쌀한 2월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햇볕을 쬐러 나왔다. 삼삼오오 소풍 온 친구들을 본 할머니가 삼 형제 도시락 싸던 얘기를 해주셨다. 큰삼촌, 작은 삼촌도 급장이었고 엄마도 부급장이라 견학 날이면 담임 선생님 것까지 도시락을 총 6개 싸셨다고 한다. 6년 내내 말이다. (이 와중에 엄마는 여자라서 부급장까지 밖에 못 했다는 사실에 뒷목 당겼다)


사랑꾼 여왕의 추모법


하이드파크 한 켠에는 빅토리아 양식의 거대한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랑꾼이었던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 앨버트 경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몹시 슬퍼했다. 그를 기리기 위해 예술가, 조각가를 불러 이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앨버트 기념비를 바라보며 할아버지는 내가 죽어도 이렇게 기념비를 세워줄 거냐고 묻는다. 할머니는 못 들은 척하신다. 앨버트 기념비 앞 사랑테스트가 여느 젊은 커플 못지않게 달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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