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진심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연애할 때 가장 견디기 힘든 것 중 하나는 상대가 내비친 순간의 진심들을 포용하는 일이었다. 상대가 지금 당장 이 순간에 가득 넘쳐나는 감정을 여과없이 쏟아낼 때면 나는 종종 회의했다. 이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너는 다시 차분해진 마음으로 이성을 가다듬고 정제된 감정을 보여주겠지. 지나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순간의 진심으로는 정말이지 못할 것이 없다. 지금 내 눈앞에 서있는 상대가 내 눈에 이렇게나 예쁜데. 이것도 해주고 싶고 저것도 주고 싶고 그것도 사주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나도 그 사랑스러운 순간 내 마음을 다해서라면 얼마든지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다. 나도 그 순간에는 분명 그만큼의 커다란 진심을 가졌다. 하지만 나는 너무도 현실적이고 또 너무도 예민한 사람이라, 그 마음이 지속되어 행동으로 이어질 거라는 확신이 없이는 그 마음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줄 수 없었다.
반대로, 내가 전에 만났던 아이는 늘 어렴풋한 형태의 그러나 매우 거창한 계획을 열심히 늘어놓으며 그 순간의 진심을 모두 쏟아내었다. '내가 다음에 이거 해줄게, 저기 데려가줄게, 그거 사줄게.' 흥분에 들떠 내뱉은 약속 아닌 약속들을 등뒤에 쌓아두고 그는 막상 때가 되면 슬금슬금 발을 뺐다. 아예 까먹어버릴 때도 많았지만 나는 눈앞에서 보는 그 '슬금슬금'이 죽도록 미웠다. 어.. 있잖아.. 내가 그때는 마음이 막 그랬는데.. 막상 진짜 하려니 좀 귀찮기도 하고.. 돈도 부담되고...... 부푼 마음이 가라앉은 그의 지속가능한 진심은 내 눈에 너무도 선명히 읽혔다. 그의 진심은 현실 앞에서 종종 비루해졌다.
애초에 말이나 말 것을, 아무 기대 없던 나를 제멋대로 공중에 붕 띄워놓고 기어코 패대기를 치고야 만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진심이 너무도 절절하여 꺼내놓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인지, 아니 대체 인내심이라곤 없는 것일까. 내가 너를 위하는 마음이 너무도 소중하여 지금 당장 내뱉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걸까. 그렇다면 실은 결국 자기만족의 감정이 아닌가. 순간의 진심에서 나온 말들을 아주 믿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마음이 정말로 순간에 그치고야 말았을 때 실망하지 않는 법을 나는 몰랐다. 말하는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으리라 이해해줄 만큼의 배려심은 내게도 없다.
하지만 그는 늘 막상 내게 실망만 안겨주었으면서도 매순간 말로만 뱉어내었던 순간의 진심들을 무기 삼아 "너는 나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며 기어코 원망과 비난을 쏟아냈다. 자신이 없어서, 실은 조금은 용기가 없기도 해서, 입 밖에 내지 않았던 나의 '분명히 존재했던 커다란' 진심들은 마치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졌다. 나의 마음은 그 말들에 살을 베이고, 조금씩 작아졌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헷갈린다. 비록 터질 것 같은 순간의 진심이었을 지라도, 나는 입 밖으로 꺼내어 전해야 했던 걸까? 빵빵한 풍선처럼 커다래보이는 진심이 실은 작고 말랑한 고무주머니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 커다란 풍선이 뻥 터져서 다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상대가 된다고 해도, 나는 주머니가 아니라 부푼 풍선을 상대에게 주는게 맞는 걸까. 내가 풍선을 주지 않아서, 그 아이의 마음은 아팠을까.
아아 꼭 진심만큼만 행동하고, 행동할 수 있는 만큼만 진심을 비추며 살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