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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Oct 06. 2018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나요?

스스로 확신이 없는 나는 때때로 확신에 가득찬 사람들을 강하게 부러워했다. 자신을 혹은 자신이 하는 일을 굳게 믿고 단단히 밀어붙이는 사람들. 대개의 위대한 이야기나 성공스토리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저는 그냥 저 자신을 믿었어요. 제가 하는 일에 대해 확신이 있었죠." 많은 성공담엔 이런 인터뷰가 뒤따랐다.


확신이란 무엇일까. 확신하고 일을 밀어붙여 성공한 사람은 강단있고 멋진 사람이라 칭송된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지켜  꾿꾿하게 자신의 길을 걸은 사람.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확신하고 일을 밀어붙였지만 실패한 사람에게는? 무모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고집불통 같은 말을 붙여준다. 왜, 영화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2017)에서 도박중독자 모임에  간 바비도 말하잖아, '우리가 여기에 있는건 돈을 잃었기 때문일 뿐, 똑같이 도박을 해서 돈을 딴 사람들은 도박중독자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처음 확신하는 사람에 대한 공포를 느낀 건 학창시절 영화 <트루먼 쇼>(1998)를 볼 때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있어. 거짓말과 속임수뿐인 세상에서 내가 만든 세상만은 진짜야.' 너도 거짓말 같은 세상에서 상처받으며 사는 것보다 내가 너를 위해 꾸며놓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사는 게 행복할 거라고. 프로듀서의 그 절대적인 믿음이, 그 믿음을 기반으로 확신에 찬 온화한 얼굴이 나는 무서웠다. 확신에 차서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 내가 나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단호한 얼굴이.


확신에 찬 사람들의 말들은 주로 무해한 얼굴을 하고 나를 찔렀다. "나는 어떤 환경에 처해도 '그런 일'은 안 할거야."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은 역시 조심하는 게 좋지." 따위의 말들은 내가 '그런 일' 들과 관련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나를 짓누른다. 그게 나의 일이 되었을 때는 아주 당연한 수순처럼 자연스럽게 마음을 닫아버린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도끼로 찍어 닫힌 문을 속절없이 바라봐야 했던 적이 있겠지.


정말로 그런 상황에 처하면, 정말로 어떤 일을 겪으면, 나는 내가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없다. 그 상황에서 '옳은 선택'이 무엇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으니까. 모든 방면에서 옳은 선택이 존재하기엔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어떤 선택을 해도 누군가는 다치고 상처받는다. 게다가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은 나약하고 또 비겁하기도 해서 극단의 상황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할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렇다면 무언가에, 혹은 스스로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자신이 경험해본 바가 없는 세상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확신에 찬 세상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걸까?


나의 글은 언제나 물음표 투성. 언제 어떤 마음을 다잡아도 늘 의구심이 뒤따르고, 의구심 속에서도 그 순간의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고, 또 상처주고 상처받은 뒤에야 진작 품었지만 모른 척했던 의구심을 확신한다. 역시 확신하지 않는 편이 옳다고 확신해.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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