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오랫동안 '오경섭 테이프'라는 것이 있었다. 오경섭 테이프가 무엇인가 하면 '오경섭'이라고 적힌 라벨지가 붙어있는 비디오 테이프로, 나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홈비디오 테이프다. 그 속엔 유치원 발표회에서 춤을 추고 있는 나, 악기를 연주하는 나, 대표로 시를 낭송하는 내가 있었다. 비디오 테이프 속에서 나는 언니와 카메라를 보며 김건모의 핑계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서로 앞에 서겠다고 다투다가 기어코 센터를 차지한 내가 천연덕스럽게 춤을 추고, 잔뜩 심통이 난 언니가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거나, 시골에 놀러가 줄넘기를 뛰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있었다.
우리는 그 테이프를 아주 많이 돌려 보곤 했다. 그래봤자 몇 해 되지도 않은 내 과거의 모습인데 테이프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심심할 때마다 보고 또 들여다봤다. 오경섭 테이프는 영원히 오경섭 테이프였다. 나는 '오경섭'이 왜 써있는지 생각도 하지 않고 마치 어렸을 때 팝송을 들리는대로 따라 부르던 것처럼 그냥 오경섭 테이프라고 불렀다. 새로운 라벨을 붙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냐면 오경섭 테이프는 오경섭 테이프니까.
한동안 잊고 지내던 오경섭 테이프를 다시 찾은 건 애인에게 내 어린 시절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나의 하찮고도 귀여웠던 시절을 보여주고 싶었다. 상상할 수 없지만 '무대에만 서면 눈에 빛이 반짝하는 무대체질이었다'는 엄마의 증언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시절의 내가 정말 어린시절의 나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때는 어떤 가능성이 보이는 아이였는지, 아니면 그때부터 이미 자존감이 낮고 못난 아이였는지 알고 싶었다. 그걸 확인하면 뭔가 마음을 정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해도 테이프를 찾을 수 없어 아빠에게 "오경섭 테이프 어딨어?" 하고 물었다. 아빠는 처음에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오경섭이라는 단어는 귀에 익는지 예전에 아빠가 운영하던 센터에서 운동을 배웠던 사람의 이름이라고 했다. 아니 그래서 오경섭 테이프는 어디 있냐고? 하니 그건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의 운동 영상이니 당연히 버렸을 거라고 했다. 아빠는 이 테이프에 우리의 모습을 찍어놓은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오경섭이라는 사람이 운동하는 모습을 연습용으로 찍어놓은 테이프에 우리의 어린 시절 모습을 담은 영상을 덮어씌워 놓았고, 우리에게 오경섭 테이프란 우리의 어린시절 홈비디오를 의미했기 때문에 굳이 새로운 라벨지를 붙이지 않았다. 그렇게 내 어린 시절 움직이는 모습이 홀라당 날라가 버렸다. 이제와서 왜 그때 진작 이름표를 똑바로 붙여놓지 않았을까 후회해도 속만 상할 뿐, 되돌릴 수 없다. 잘못 붙은 이름표 하나 때문에 나의 추억을 잃어버리다니 이렇게 한심한 일이 다 있다니.
가끔 생각한다. 나는 내 인생에 제대로된 이름표를 붙여주며 살아왔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나는 늘 가장 부정적인 방식으로, 가장 나쁜 의미의 라벨을 나에게 붙여뒀다. 게으른 사람, 허무주의자, 도망치는 사람, 우울증, 의욕상실, 무능, 좌절감... 실패. 나에겐 분명 그렇지 않은 면들이 있었을텐데, 나는 반드시 내가 이름붙인 그 사람인 것만은 아니었는데, 어느새 나도 그 라벨지에 속고 있다. 라벨지가 진실이라고 믿고 내 인생을 버려도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오경섭 테이프 안에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 잊게될 것이다. 그 안에 들어있던 나의 모습은 까맣게 잊은 채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오경섭이라는 이름만을 가물가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중에 울지 말고 지금이라도 빨리 이름표를 새로 만들어 붙여. 지금 위에 그냥 덕지덕지 덮어버려도 상관없으니까. 그러면 언젠가 지금의 나를 전혀 다른 나로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벨지에 뭐라고 써넣는들, 나는 영원히 나라는 사실이 절망적이지 않을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