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직업은?
해마다 학년 초가 되면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을 한다. 학생들의 가정환경 수준에 따라 교육방침을 다르게 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학생들의 성향을 가정환경으로 파악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다.
가정환경을 조사하기 위해 학급에서 선생님의 질문에 따라 손을 들었던 기억도 있고, '가정환경조사서'라는 종이를 집으로 가져와서 작성한 기억도 있다.
가정환경조사서를 집에서 작성하던 어느 날의 이야기다.
기억을 되돌려 보면 안방에 언니와 오빠 둘(나보다 3학년, 5학년, 7학년이 높은) 그리고 엄마가 있었고 아버지는 안 계셨다. 아마 볼일이 있어서 고향에 내려가셨던 것 같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안방에 엎드려서 각자 학교에서 가져온 가정환경조사서의 칸을 채워나갔다. 학교는 달랐지만 조사서의 내용은 거기서 거기였어서 우리는 낄낄거리며 칸을 채워나갔다.
텔레비전, 냉장고, 카메라, 피아노, 자동차, 전화 그런 것들을 소유하는지 묻는 질문지에 답을 하는 건 아주 쉬웠다. 모두 X였으니. 하지만 아버지 직업란은 O, X로 할 수 없는 칸이라 여기에 대해 언니, 오빠들의 토론이 이어졌다. 그전에는 가정환경조사서를 아버지가 작성해주셨기 때문에 이 칸에 무엇을 쓸 것인지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무직 아닌가?"
"무직은 좀 그렇지 않나?"
"그렇긴 하네"
"무직인데 무직으로 쓰지 뭐라고 써?"
"그래도 배운 자식들인데... "
"그럼 실업자는 어떨까?"
"오, 좋아.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해."
“실 자를 빼고 업자라고 쓰는 건 어때? 실업자도 업자의 한 종류잖아.”
“킥킥”
"잠깐, 실업가로 쓰는 게 어떨까?"
"야, 실업자랑 실업가랑 뜻이 완전히 다른데 뭔 소리야."
"선생님이 뭐라고 하면, 어? 획이 하나 빠졌네요. 하면서 '가'를 '자'로 고치면 되지."
우리는 아버지를 실업가로 등극시키고자 애썼으나 결국 점만 찍어냈다. 무직인 아버지가 부끄럽거나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퇴직하신 아버지를 칭하는 어떤 단어도 아버지를 향한 존중의 뜻을 담지 못했다. 돌아가신지 20년이 넘었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아버지를 존경하고 그리워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