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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끝 햇살 Apr 14. 2020

1-1. 공부 못해서 왕따 되면 어쩌나?

아이가 왕따 당할까 봐 걱정이에요


당신은 자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편인가?     


“공부 못 하면 애들이 바보라고 싫어해!”

“애들이 글도 못 읽는다고 놀려!”

“수학계산 못하면 애들이 안 끼워줘!”

“공부 못하는 찌질이는 아무도 안 놀아줘!”     


이런 말은 아이를 왕따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왕따에 조건이 있다는 말과, 이 조건에 부합되지 않으면 왕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왕따를 부른다. 그저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둘러댄 말이고 또 아이가 실제로 왕따를 당했을 때 엄마가 둘러대는 핑계지만 이런 말들이 아이의 미래에 끼치는 영향은 부모 생각보다 크다.



엄마의 두려움인가? 아이의 두려움인가?

 하지만 왕따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엄마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어릴 때 친구 사이에서 당연히 벌어지는 삐치고 싸우는 일일 수도 있다. 이런 일상적인 일이 인간관계를 두려워하는 엄마에 의해 부풀려져 왕따라는 괴물로 둔갑하곤 한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공부 못하는 아이를 싫어하리라는 엄마의 예측은 틀렸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공부 잘하는 아이와만 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 주기가 비슷한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를 사귄다. 밤 열 시까지 학원에 다니는 아이가 학원도 안 다니고 하루 종일 집에서 노는 아이와 어떻게 만나서 친해질 수 있겠는가?

 공부 잘하는 아이가 공부 못 하는 아이를 싫어해서 안노는 것이 아니라 함께 놀 시간이 맞지 않기 때문에 안노는 것이다. 그걸 공부 잘하는 아이와 사귈 능력이 없는 거라고 즉, 공부를 못해서 그런 거라고 추리하는 건 사실관계가 맞지 않다. 

 게다가 왜 꼭 공부 잘하는 아이와 친해야 하냔 말이다. 엄마의 소망이 아이가 원활한 인간관계를 맺는 데에 있지 않고 공부 잘하는 아이와 한 그룹이 되는 것인가? 공부 잘하는 아이와 친할 수 없다면 공부를 덜 잘하는 친구를 사귀면 된다. 그런데 엄마는 공부 덜 잘하는 아이와 친해지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결국 공부 잘하는 아이와도 못 친하고, 공부 덜 잘하는 아이와도 못 사귄다. 결국 놀 친구가 없다. 엄마가 놀지 말라고 해서 안 놀게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왕따다. 엄마가 훼방을 놓으면 친구 사이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친해질 기회가 없다. 언지까지? 딱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 사춘기가 오면 엄마 말은 안 통한다. 머리가 굵어져서 엄마 때문에 뭔가 손해 봤다고 판단하는 그 날이 오면 무조건 엄마 말과 반대로 행동한다. 엄마 말과 반대로 가야 이득이 생길 거라고 판단하기도 하고, 엄마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가주기가 분해서 반대로 행동하기도 한다. 


정말 공부 못하면 왕따 될까?

 수학계산 못해서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 좀 잘한다고 꼴값질 할 때 애들이 싫어한다. 여기서 핵심 문제는 수학 역량이 아니라 사회성이다. 부모 생각처럼 아이들이 공부 못한다고 친구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과만 어울리려고 하고, 자기보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무시할 때 왕따 될 확률이 가장 높다.


 '공부 못하면 찌질이들 하고만 놀아야 하니 공부를 잘해라.'


 이 말은 아이를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두는 말이다. 게다가 아이가 좀 더 커서 논리가 생기게 되면 강한 논리적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공부 못하는 게 왜 찌질인데?”

 “행복이 성적 순이야?”

 “엄마는 공부 잘했어? 엄마 친구는 다 성공했어?”    

 

이런 공격에 대항하는 무기는 딱 하나뿐이다.


 “이런 버릇없는 놈을 봤나? 닥치고 공부 햇!”

 "공부 잘하면 좋지. 뭘 따지고 들어? 내가 너 잘못되라고 하는 말이야?"


말과 막걸리 사이

 이런 비논리를 엄마가 매일 주장하고서는 논술시험 잘 보라고 논술학원 보내봐야 말짱 헛일이다. 제대로 발사된 논리적 공격에 희열을 느껴도 논술로 승부가 날까 말까 한 마당에 이런 비논리적 흐름으로 아이를 키운다면 오히려 논리를 제대로 편다는 것은 상대를 약 오르게 할 수도 있다는 무의식이 싹틀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막연하게 논리적 타당성보다는 힘과 권력이 우선이라는 판단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친구관계란 좋아하는 사람끼리 좋아하면서 지내는 것을 말한다. 좋아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상대방을 소중히 여길 때 관계는 발전되고 그 소중함 속에서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 가장 기본적인 명제조차 엄마의 욕망으로 변형시킬 때 아이는 논리도 친구도 엄마도 잃게 된다. 

 결국 아이가 공부를 못해서 왕따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고민과 걱정은 그 내부를 탐색해보면 왕따에 대한 걱정보다 공부를 못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더 크게 들어있다. 이 세상에 공부 1등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1등만으로 이루어진 그룹만 있는 것도 아닌데 엄마는 거기에 끼지 못하면 마치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1등이 아니면 친구가 아무리 많아도 다 부질없고 1등 그룹에 끼지 못하면 친구가 아무리 많아도 왕따나 다름없다고 여기는 엄마야 말로 세상의 가장 강력한 왕따일 것이다.      


아이를 키우며 우리도 자란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면 절대 돌아보지 않았을 종합적인 자아성찰의 기회를 선물 받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를 알약이나 백신 프로그램으로 정기 점검하듯이 아이의 왕따 걱정을 통해 내 안에 어떤 불합리한 신념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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