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상담한 한 아이는 반에서 외톨이로 지냈다. 엄마가 가장 분개하는 기억은 체육시간에 포크댄스를 출 때 남학생들이 딸과 파트너 하기를 싫어했던 일이다. 딸은 그 일로 크게 상처를 받았고 딸애의 손잡기를 거부한 남자애들은 가해를 한 것과 다름없다고 엄마는 참담해했다. 물론 그런 경험이 있으면 딸이 속상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남자애들이 파트너 하기 싫어했던 일보다, 엄마가 그 일에 노발대발 흥분한 일이 아이 마음에 더욱 깊이 각인되었다. 엄마가 분개하는 장면을 통해 아이는 수치심의 기준을 배웠다. 그건 엄마의 기준이지 아이의 기준이 아니다. 엄마가 분노하고 담임선생님에게 항의하는 걸 보면서 그 일이 매우 잘못된 사건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엄마아~~, 반 애들이 나한테 뚱뚱하다고 놀렸어. 날더러 돼지래.”
사회에서 누굴 돼지라고 놀렸다면 모욕죄에 해당한다. 이건 분명히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이다. 그럼 이런 일을 당한 내 아이는 어떻게 키워야 할까?
공권력의 도움을 받아 죄는 죄로 벌은 벌로 규명해야 할까? 아니면 사과를 받아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못을 박아야 할까? 여기서 내 아이의 아픈 상처는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나? 그러지 않으려면 우선 살부터 빼야 하나?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이것 하나는 알고 넘어가자. 여기서 누가 수치를 소유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젊은 건축학자 최우용은 「다시 관계의 집으로」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썼다.
장면 1.
수도원 높은 성벽, 컴컴한 구멍에서 채소 더미가 굴러 떨어진다. 먹을거리가 보이자 몰골이 초라한 민초들이 채소 더미와 함께 나뒹군다. 수도사 윌리엄 왈, “가난한 자들에게 저렇게 베푸는군.” 구휼의 방식이 수치스럽다. 이 수치는 살기 위해 몸을 뒹구는 이들의 것이 아닌 삶의 처절함을 우습게 보는 수도원의 수치다.
장면 2.
수도원 입구에서 몰골이 초라한 민초들이 거위, 달걀, 감자, 푸성귀 등을 들고 줄을 서있다. 수도원 입구에 버티던 자는 괜한 트집을 잡으며 이들에게 거만을 떤다. ‘십일조’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약탈 아닌 약탈은 지옥의 공포를 감당해야 하는 이들의 수치가 아니다. 공포를 관행적 세금으로 악용하는 수도원의 수치다.
아이가 놀림을 당하거나 다른 아이들에게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은 이것이 누구의 수치인가 하는 것이다. 누군가 내 아이에게 돼지라고 놀린다면 이는 돼지처럼 뚱뚱한 내 아이의 수치가 아니라 그렇게 표현한 아이의 수치다. 그러니 ‘돼지 같다는 말을 듣고 내 아이가 얼마나 치욕스러웠겠냐?’라는 말을 한다면 이건 번지수 착오다. 그가 수치심을 자극했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렇다고 내 아이가 반드시 수치를 소유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악플에 시달리다 자살한 최진실 사건에서 수치스러운 것은 최진실이 아니라 악플을 단 악플러에게 있다. 최진실에게 이 개념이 명확했더라면 자살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돼지 같다는 말은 분명 모욕스런 말이다. 모욕이 되라고 한 말이다. 아니 어린아이가 그런 뜻 없이 뱉은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이 타인에게 주는 영향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내 아이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말을 안 듣고 살아갈 수 있다면 바랄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한평생을 살면서 이런 말을 안 듣고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지금은 SNS 세상이 아닌가? 휴대폰 버튼만 켜면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에서 온갖 비방으로 세상이 떡칠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내 아이가 비방을 들은 뒤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가면 좋을까?
비방을 듣고도 끄떡없이 살아가야 한다. 악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도 일상생활을 유지해야 하고 자신이 돌봐야 할 것들을 돌보면서 살아가야 한다.
여기서 타블로가 자신의 학력에 대해 의심을 품은 네티즌들의 비방 속에 하루하루를 견뎌냈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터넷 상 루머와 논쟁에 신경을 쓸 틈도 없이 가족을 지켜야 했어요. 나에게는 바로 그것이 전쟁과도 같았어요. “
"나의 소중한 가족을 지키는 것이 최선의 대응이었어요. “
그는 밤새 눈이 빨개지도록 인터넷에 불을 켜고 어떤 댓글로 내 마음을 후벼 파는지 검색하는 대신, 그들과 끝나지 않는 댓글 전쟁을 벌이는 대신, 그들의 비난에 심신이 지치도록 내버려 두는 대신, 소중한 가족과 함께 하는 선택을 했다.
타인이 놀리고 비난할 때 여기서의 수치는 내가 아니라 그들의 소유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꿋꿋하게 일상을 지켜 나가는 것이 가장 건강한 선택이다. 아이가 그런 비난을 듣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잘 치유해 주어야 함과 동시에 그런 놀림과 비난 속에서도 건강하게 살아내는 힘을 길러 주는 것이 우리 부모의 역할이다.
그러려면 우선 부모가 수치의 소재지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친구가 수치심을 유발해서 아이가 수치심을 느꼈다면 놀리는 행위 자체가 수치스러운 행위이다. 여기서 출발을 해야 놀림을 당한 아이를 피해자로 전락시키지 않는다. 놀림을 당한 아이에겐 아무런 수치심이 없다는 것을, 오직 수치심을 가져야 할 아이가 있다면 놀린 행위를 한 아이라는 것을 학교와 교사가 주지시키지 않으면 놀림을 당한 아이는 쥐구멍에서 나올 수 없다. 그저 울며불며 슬퍼하는 피해자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피해를 당한 아이는 피해를 입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시발점이 아이가 피해를 입은 것이기 때문에 이 안건이 지속되려면 피해를 입은 아이가 계속 피해자로 남아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돼지 같다는 말에 당한 피해가 유지되어야만 사건이 지속된다면 피해를 당한 아이는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또 그 이후에도 계속 울고 있어야 한다. 피해를 입은 데서 문제가 발단되었으니까.
만일 누가 내게 모욕적인 발언을 한다면 그 해결을 법에 맡길 수도 있고, 사과를 주고받는 선에서 마무리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 여기서 가장 바람직한 길은 아무런 상처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꼭 울고불고하면서 피를 흘려야 법에 호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꼭 놀림당한 부끄러움 때문에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에 걸려서 기본적인 생활을 이루지 못하고서야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상처 없이도 수치심을 유발한 가해자에게 모욕적인 말은 사양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무너지거나 흐트러지지 않은 태도를 견지하고서도 법에 의뢰할 수 있다. 법은 반드시 피 흘리고 쓰러진 사람에게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니 놀림당하는 것을 지나치게 부끄러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말자. 놀림은 놀림을 당하는 자의 몫이 아니라 놀리는 자의 몫이다. 부모가 이런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아이가 놀림으로 입는 상처를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