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기
미스터 션샤인과 도깨비를 쓴 이은숙 작가의 옛 드라마 ‘상속자’를 보면 여주인공 차은상(박신혜 분)을 괴롭히는 여학생 세 명에게 최영도(김우빈 분)가 이렇게 말한다.
“어이, 여럿이 몰려다니지 말고~~. 인생 혼자 살줄도 알아야지.”
정답이다. 인생 혼자 살줄 아는 것, 이게 인생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말은 단지 드라마 대사에만 들어있지 않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카톨릭 사제였던 헨리 나우엔은 이렇게 말했다.
‘영적 삶을 살려면
먼저 용기를 내서
자신의 외로움의 사막에 들어가
부드럽고도 끈질긴 노력으로
그곳을 고독의 동산으로
바꾸어야 한다.’
「여자로 나이 든다는 것」에서 앤 G. 토머스가 한 말은 비단 여성에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여자는 자신의 삶에 무언가를 더하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감정이야말로 스스로의 인생과 그 의미를 마주하게 도와줄 열쇠임을 결코 깨닫지 못한 채.’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인생을 마주한다는 것은 피하고 싶은 감정을 동반하는 일일 것이다. 살아가는것은 불안과 고통과 두려움을 동반하는 일이다. 그 길은 어느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다. 철저하게 혼자서 가는 길이다. 외로운 길이다.
외로움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사람은 인생을 마주할 기회를 회피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피해 다닐 수만은 없다. 실패, 사고, 노화, 질병, 죽음에 드리운 인생의 본질을 마주하는 일은 용기를 필요하지만 그것이 바로 인생의 열쇠이자 선물이 된다.
화려한 스케이트 기록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에 6번 출전했음에도 메달을 따지 못한 이규혁 선수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림픽 메달 때문에 항상 저는 좀 부족한 선수라고 생각해왔고, 결국 약간 부족한 선수로 마감 짓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올림픽을 통해 많이 배웠고 선수로서 성숙했던 것 같습니다. 메달 때문에 저는 부족한 선수로 끝나고 또 약간은 부족한 스케이트 선수로 살아가겠지만 앞으로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겠습니다.....”
그는 또 은퇴식에서 이렇게 말한다.
"10년 전, 20년 전 금메달을 땄으면 지금의 감사함을 몰랐을 것입니다."
운동선수로서는 조금 많은 나이인 36세로 올림픽에 6번이나 출전해서 결국은 아름다운 도전의 역사를 써낸, 선수로서 올림픽을 즐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준 이규혁 선수는 절대 부족한 선수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넘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부족함’의 의미를 평가 절하할 생각은 없다. 이규혁 선수에게 당신은 결코 부족하지 않으며 메달을 따고 안 따고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반면에 그가 말하는 부족함의 의미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소중한 뜻이 따로 있다.
나는 이규혁선수의 아름다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는 사람.
‘이번엔 부족했으니 다음엔 부족함을 채워서 메달을 꼭 딸래요’ 하는 고백과는 차원이 다른 부족함이다.
내 삶이 결국 부족함으로 결론이 났지만 그 부족함을 충분히 내 삶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부족함 때문에,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이 악물거나 저항하고 힘들어하는 모습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다. 부족하지만 위축되지 않고, 부족함을 인정하지만 더욱 삶이 깊어지는 아름다움의 진수를 이규혁 선수가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부족하다. 하물며 신이라고 불리는 예수와 석가모니마저도 부족한 존재였다. 하느님의 아들로 인간세계를 구원하러 이 세상에 왔다가 결국은 죄인으로 몰려 십자가형을 당했다. 아버지인 하느님에게 가능하면 그리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나 거절당하고 결국은 팔자 사납게 돌아가셨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인간세상을 구제하려 온갖 고행 끝에 그도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이하셨다.
우리도 부족하고, 우리 아이들도 분명히 부족하다. 우선 우리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그 부족함을 아이들에게 채우라고 하지 말자. 우리의 부족함은 우리 몫으로 두고,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살게 하자. 그들의 삶도 또한 부족할 것이다. 그 부족함을 바라보는 일은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맞닥뜨리는 일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내 아이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부족하다는 것을. 그리고 아이들도 언젠가는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그 과업을 이규혁선수 처럼 멋지게 해내는 모습을 내 아이에게 담담하게 보여주자. 그래서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아이들에게 선물해 주자.
자신의 부족함을 아무런 저항 없이 남 탓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은 외로움과 마주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결국 메달을 딸 수 없다는 것’
‘내가 지방대 밖에 못 간다는 것’
‘부모가 나를 뒷바라지 할 수 없다는 것’
‘자랑할 만한 직장에 다니지 못한다는 것’
‘내가 믿지 못할 만큼 늙어버렸다는 것’
‘내가 암에 걸렸다는 것’
‘머지않아 죽게 되리라는 것’.
이런 것들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면 그 순간부터 새로운 삶이 열린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외면하면 남는 것은 남 탓밖에 없다. 이래서 메달을 못 땄고, 누구 때문에 못 땄고, 좋은 부모 만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더라면, 담임선생님만 잘 만났더라면....이런 하소연으로 꽉 찬 인생을 살게 된다.
지금 내게 닥친 현실을 잘 살펴보자. 이게 바로 내 현실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 이것이야 말로 외로움을 만나는 일이고 외로움을 딛고 올라서는 일이다.
왕따 문제 극복의 핵심은 바로 외로움에 있다. 외로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왕따의 해결책이 있다고 하겠다. 왕따 해결은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것인데 외로움이 곧 왕따 문제의 해결책이라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아이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돌아왔다면 아이에게 외로움을 마주하는 방법을 알려 줄 기회가 온 것이다. 외로움 때문에 다른 친구들 탓을 하거나 분노를 폭발하는 방식으로는 외로움과 마주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가 그 길로 가고자 하면 그저 아이의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아이가 외롭다고 하면,
“많이 외롭구나. 어떻게 외롭니?”
친구들이 꼴 보기 싫다고 하면,
“친구들이 밉다, 그치? 미워서 어떤 마음이 들어?”
친구들에 대한 분노로 꽉 차있다면,
“친구들한테 화가 많이 났구나. 더 이야기 해볼래?"
아무리 엄마가 지치도록 달래줘도 아이가 그칠 줄을 모르면,
“오늘은 엄마가 피곤해서 좀 쉬고 싶은데... 내일 다시 말해도 될까?”
이런 말 말고 다른 잔소리는 필요 없다.
큰 아이가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동생과 놀지 않아준다면, 그래서 작은 아이가 울고불고 엄마한테 SOS를 요청한다면, 작은 아이의 슬픔과 외로움을 충분히 알아주는 걸로 족하다.
“언니가 안 놀아줘. 잉잉잉~~”
“언니가 너랑 안 놀아주니까 슬프고 심심하구나. 쯧쯧, 그게 동생의 운명이란다. 언니는 동생이랑 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만 놀아준단다.”
“엄마가 언니를 불러서 나하고도 놀아주라고 말하면 되잖아.”
“언니는 언니가 놀고 싶은 사람과 놀 자유가 있단다. 그건 엄마가 간섭할 수 없단다.”
“그럼 난 어떻게 하라고? 잉잉잉”
“속상하구나? 속상하면 울어야지. 슬픔이 가실 때까지 실컷 울어. 엄마가 안아줄까?”
외로움이란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고, 외롭다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파국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 인생을 마주할 수 있다. 세 살이든, 십 대든 혹은 그보다 더 나이를 먹더라도 마찬가지다.
상담실에 오는 부모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다음과 같다.
“그냥 평범하게, 다른 집들처럼, 자식과 화목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냥 평범하게.
이 말이 뜻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실로 평범하지 않다.
“그저 다른 집 아이처럼, 다른 길로 안 나가고, 학교 끝나면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집에 돌아오고, 엄마는 그게 안쓰러워 간단한 간식 챙겨주고, 아침엔 피곤에 지친 몸으로 또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고, 성적은 전교 일등은 아니지만 sky대학 정도나 아니면 많이 양보해서 in 서울 정도?”
다른 집들처럼.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가정이 완벽하게 화목할 거라고 추측한다. 절대 싸우지 않고, 가족 사이에 상처받는 말 하는 법이 절대 없으며, 모든 가족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하지만 싸우지 않는 가정은 없다. 잘 싸우고 잘 봉합할 뿐이다.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는 가족은 없다. 상처를 주고받지만 상처가 치료되고 또 좋은 일로 상처를 덮는다. 혹시 주변에 자기 가족은 절대 싸우지 않고 화목하기만 하다고 은근슬쩍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어도 좋다. 안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안 싸우는 가정으로 기억되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진실하지 않은 남의 가정을 비교하면서 ‘내 가정은 왜 이러나, 아이고 내 팔자야’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안 싸우는 척 하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고 산다. 특히나 가족 내 갈등으로 고통 받는 사람 앞에서 자기 가족의 화목함을 강조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주장하는 바는 안 봐도 뻔하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 자랑이나 해대는 사람의 가정이 사랑으로 충만할 리 없다.
상담실에 와서 가족끼리 상처를 주고받아 걱정이라는 말을 하는 내담자들은 가족 간에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담사들은 상처를 주고받는 것에 주목하지 않고 상처가 치료되지 않고 상처를 잊지 못하는 것에 주목한다. 상처를 주거나 받는 것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치료도 되고 잊히기도 해야 한다. 상처가 가족 내에서 치료되어야 상처를 주지 않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상처 주는 상황이 아니라 치료 안 되고 잊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이러니는 내담자들 중에 가족과의 싸움으로 인한 상처보다 다른 가정처럼 화목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더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꿈에 그리는 화목한 가정이란 19세기 개념에 머물러 있다. TV 광고에 나오는 화목한 가정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3대가 모여서 저녁밥을 같이 먹고 자식들이 부모 말에 복종하면서 편안하게 사는 생활.
우리가 자녀와 화목하게 지내려는 소망과 자녀들이 살아가려는 세상에는 괴리가 너무도 크다. 우리 자식들이 가는 길은 우리가 밟아보지 못한 길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우리의 소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인류 역사상 어느 때에 지금과 같은 시절을 살아봤단 말인가?
이제 우리는 화목이라는 단어를 이 시대에 맞게 다시 써야 한다. 화목이란 ‘아이가 내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체성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 공부도 성실도 뛰어난 덕목도 하나 없지만 그저 부모로서 사랑해주는 것, 내가 자식에게 바라는 바가 있지만 자식이 그것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에 박수를 쳐주는 것. 그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화목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도 더 이상 제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
“엄마 보시기에 제가 답답하고 한심해 보이는 것 잘 알아요. 그래도 잔소리는 그만 하세요.”
“저도 제가 알아서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제 일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세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가정이면 화목한 가정이고, 이런 말조차 할 수 없는 가정 분위기라면 화목하다고 볼 수 없다. 만일 당신의 가정에서 자녀들이 이런 말을 수시로 한다면 당신의 가정은 화목한 가정이다. 저런 말이 부모인 당신에게 던져주는 외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