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루 끝 햇살 Jun 08. 2020

 3-4. 자녀의 거절은 언제나 OK


 

 아이가 거절을 못하고 끌려 다녀서 걱정이라는 엄마에게 나는 이렇게 묻는다.


 “아이가 거절을 못해서 걱정이세요?.”

 “네, 아이가 친구의 부탁을 거절 못하고 전전긍긍해요.”  


 “아이가 거절 잘하는 아이가 되길 바라세요?”

 “네, 그러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아요.”


 “만일 아이가 엄마한테도 거절을 잘하면 어떨 것 같으세요?”

 “허걱...  네? 그건 좀.”     


엄마들은 자녀의 ‘거절’ 행위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진다. ‘우리 애는 거절을 못해서 걱정이에요’ 하고 말하지만 대화를 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아이가 거절을 잘하는 것도 싫고 거절을 못하는 것도 싫다는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친구에게 거절을 못해 끌려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면서도, 거절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매몰찬 것은 아닌가?’하고 걱정을 한다. 남에게는 거절을 잘 하지만 자신을 비롯한 가족이 하는 부탁은 두말없이 들어줬으면 하고 바란다.


거절을 배우는 법

 이런 엄마 밑에서 아이는 거절 잘하도록 배울 수 없다. 거절을 배울 수도 없거니와 거절을 하더라도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다. 거절을 못하는 아이의 부모는 100% 거절을 못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남이 거절을 하면 머리 싸매고 드러눕는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거절하는 것을 보지도 못 했고, 거절이 상대방에게 주는 상처가 얼마나 큰지 익히 알기 때문에 거절을 하려야 할 수가 없다.


 이런 가정에서는 거절하는 사람들을 성토하는 성토대회가 자주 열린다. 이런 가정에는 제사나 명절, 집안 대소사에 뺀질거리는 동서가 있고 회사에는 자기 일만 하고 팀의 일은 나 몰라라 하는 뻔뻔한 동료와 부하 직원이 있다. 그들을 성토하고 한숨 쉬는 말을 들으면서 자란 아이는 절대로 죄책감 없이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거절을 하느니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요.”

 “딴 사람이 힘들어하는 걸 보느니 내가 힘든 게 마음 편해요.”     


책임과 무책임 사이

 이런 아이들은 자기 앞가림도 못 하면서 다른 사람 인생의 짐까지 지고 허덕거리면서 살게 된다. 주변을 둘러보면 도박과 알코올로 패가망신한 남의 가장(남편의 형제자매나 아내의 형제자매 등)을 돌보는 책임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책임이 아니라 오히려 무책임이다. 스스로 방기한 삶의 책임은 어느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 없다. 도박이나 알코올 중독은 빈털터리 헐벗은 자신과 올곧이 만날 때 바닥을 치고 일어날 수 있다.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것이야말로 무책임이다.      


 학교에서 반 아이들에게 학대를 받던 아이가 있었다. 남녀공학에 다니는 중2 남학생이었는데 뒤에 앉은 여학생들이 볼펜으로 교복에 낙서를 하고, 맛난 반찬도 뺏어먹고, 책상 서랍을 쓰레기통 삼아 모든 쓰레기(아이스크림 먹던 것까지)를 버리곤 했다. 이 아이는 단호한 태도로 거부의사를 밝히지 못했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애가 나를 닮아 거절할 줄을 몰라요. 저도 그렇거든요.”

 아이 어머니는 유치원에 다니셨는데 당연히 쉬어야 할 토요일에 유치원 원장의 부탁으로 논문을 대신 써주고 온갖 개인 프로젝트를 도와주느라 쉬지 못하셨다.


아빠 닮은 이기주의자

 아이 어머니는 아이가 자신을 닮아 거절을 못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머니가 거절을 하지 말도록 강요했다. 아이가 5살 때부터 7~8년 간 돼지저금통에 모은 (약 30만 원이 넘는) 돈을 엄마가 가져간 일이 있었다. 이사하는 데 이사비용이 부족하다고 아이에게 달라고 했다. 상담사가 보기에 그 가정은 아이 저금통이 아니면 이사를 못 갈 정도의 형편은 아니었다. 만일 그렇더라도 아이에게 빌렸어야 옳다. 아이에게 왜 거절하지 않았는지 물어보니 만일 엄마의 부탁을 거절했더라면 늘 말하는 레퍼토리인 ‘가족끼리 돕고 살아야지, 넌 아빠 닮아 이기주의자다’라는 말을 들었을 거라고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이 아버지는 오랫동안 실직 상태였다. 아내의 금전적인 책임 요구를 거절해 온 것이나 다름없다. 어머니는 오래된 남편의 거절에 소진되어 아이는 거절하지 않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가정에서 거절을 용인해주지 않으면 당연히 아이는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거절할 때마다 부모가 머리 싸매고 앓아눕는다면 거절을 못하는 것에 덧붙여 거절에 대한 죄책감까지 보너스로 얻게 된다. 거절도 못 하고 거절에 따른 죄책감까지 지니고 사는 삶은 감당하기 쉽지 않다.


내 몫인가, 아닌가

 거절을 할지 말지의 기준은 ‘내 몫의 짐인가’에 있다. 내 몫이 아니면 거절만이 상책이다.    

  

 내가 낮은 성적표를 받아와서 엄마가 우울증에 걸려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했다면 그건 누구의 책임일까?

 내 성적 때문에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으니 공부 못하는 내 책임일까?      

 아니다. 그건 분명 엄마 몫의 짐이다. 엄마는 자식이 공부를 잘하게 되는 순간, 우울증이 바로 나을 거라고 기대하겠지만 엄마의 우울증은 원인도 결과도 해결 방안도 엄마의 몫이다.

 제사에서 '전과 적은 동서가, 과일과 나물은 내가'라고 명시했다면 동서가 제 몫을 다하지 않아 전과 적을 가져오지 않았을 때 그것 없이 제사를 지내야 한다. 만일 동서가 제 몫을 하지 않을 때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일을 모두 내가 짊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한 제사의 책임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 동서가 내 감독 아래 제사에 봉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한 제사의 총체적인 책임은 내게 있다. 제사의 총체적인 책임이 내게 있지 않다면 전과 적 없이 제사 지내는 일에 내 책임은 없다. 전과 적을 손수 정성스럽게 만들었느니 시장에서 사 왔느니 하는 타령은 모든 일을 내 책임으로 내 등에 지고 가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일은 일대로 하고 좋은 소리 못 듣는다. 앞으로 평생 뼈 빠지게 일할 날만 남아있다.     


달콤 쌉싸름한 거절

 거절은 내 몫의 짐만 지겠다는 선언이고, 독립된 개체로 살아가겠다는 출발이다. 자식은 반드시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마땅한 존재지만 독립되지 않은 부모 아래서는 엄청난 잡음을 동반한다. ‘자녀 독립만세’를 쓴 송상호는 자식을 ‘바르게’ 키워야겠다고 마음먹는 일이 바로 부모가 미성숙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우선 부모가 먼저 자녀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부모가 독립하지 못하면 자녀를 독립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참신한 이론이자 명석한 지혜가 담겨있는 말이다. 그는 또 부모가 먼저 독립해야 자식이 겪는 시행착오를 온전히 자녀의 몫으로 돌려줄 수 있다고 말한다. 지당한 말씀이다. 자녀의 시행착오를 온전히 자녀가 겪도록 놔두는 일은 부모가 독립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이가 부모에게 거절을 한다면 처음에 마음은 쓰리겠지만 마음 깊이 환영해야 한다. 세상에서 부모에게 하는 거절이 가장 어렵다. 부모가 이제껏 거절을 용납하지 않았다면 더더욱 그렇다.

매거진의 이전글 3-3. 외로워도 괜찮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