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울 때 내가 하는 말이 잔소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그 말을 몇 번째 했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전에도 아이에게 그 말을 한 적이 있다면 그게 바로 잔소리다. 딱 두 번째부터 잔소리가 된다.
잔소리가 기분 나쁜 이유는 화자가 훌륭하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잔소리의 실체는 대부분 ‘내가 너보다 더 잘 아니 내 말을 들어라’다. 걱정되어서.. 안타까워서... 잘못될까 봐... 하는 잔소리는 결국 다 자기가 더 많이 알고 더 잘났다는 말이다.
왜 아이들은 부모의 잔소리를 들으면 화를 낼까? 잔소리는 기분을 나쁘게 하기 때문이다. 자녀가 시끄럽게 할 때 엄마가 하는 말을 들어보고 어떤 게 잔소리고 어떤 게 잔소리가 아닌지 구별해보자.
1. “좀 조용히 해. 너무 시끄러워서 엄마 머리가 아프려고 해”
2. “쉿, 조용히 해. 시끄럽게 하면 사람들이 싫어한단다.”
3.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너 혼자 시끄럽게 굴면 여러 사람에게 민폐가 된단다.”
1번 문장은 자녀의 행위로 인해 느껴지는 감정을 말하고 있지만 2번과 3번 문장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뭘 가르치려고 한다. 이런 잔소리는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주로 이런 화법을 쓰는 부모가 자식들과 갈등을 빚는다.
1. “네가 밥을 잘 안 먹으니까 건강이 나빠지고 키가 안 클까 봐 걱정이 돼.”
2. “밥을 잘 먹어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어. 잘 안 먹으면 병에 걸려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 힘들어.”
3. “밥 잘 안 먹는 애들은 친구들이 싫어해. 쟤는 밥을 안 먹으니 우린 쟤랑 놀지 말자. 그러면서 안 놀아준단다.”
여기서도 1번 문장은 괜찮지만 2번 3번 문장은 자녀가 알아듣기 어렵다. 교육 의도는 엿보이나 논리에 비약이 있고, 게다가 진실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하면 아이는 혼란에 빠지고 사회성 습득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맥락 파악하기'가 어려워진다. 나중에 커서는 엄마가 하는 말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하게 만든다.
잔소리의 문제점은 듣지도 않는 말을 여러 번 한다는 데에 있다. 한 번 이야기해서 안 들으면 여러 번 말해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담배를 끊어라, 지각을 하지 마라, 공부를 열심히 해라, 숙제를 잘해라, 운동을 해라, 밤에 일찍 자야 일찍 일어난다. 등등의 말은 한 번으로 족한 말들이다. 더 이상 해봐야 귀담아듣지 않고 관계만 나빠진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는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간할 수 있는 지혜를’이라고 기도했다.
그 차이를 분간하는 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아이에게 한 번 말했는데도 바꾸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말은 아무 소용없는 잔소리다. 아이의 행동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행동을 받아들이는 내 태도는 바꿀 수 있다. 아이의 행동에 대해 계속 잔소리를 한다고 행동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이의 행동에 대해 내 태도를 달리할 때 개선될 여지가 있다. 물론 변화를 기대하고 아이를 조종하기 위해 변한 척하는 것은 꼼수다. 그래서는 나도 아이도 절대 변하지 않는다.
아침마다 일어나지 않는 아이를 깨우려고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다면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를 일찍 일어나도록 변화시키는 일은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전쟁을 그만두는 것이다.
“내일 아침부터는 더 이상 깨우지 않겠다. 아침에 네가 스스로 일어나서 학교에 가도록 해라.”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해가 중천에 떠서 수업도 이미 시작했고, 지각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만큼 시간이 늦어버려 학교에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상황에 되었을 때 아이는 비로소 자기의 인생과 마주한다. 꿈이라고 해도 가위눌릴 것 같은 그런 대책 없는 현실과 마주할 때 덜컹거리는 심장으로 인생을 정면으로 만난다. 누구나 꼭 필요한 때에 인생과 만날 기회를 가진다. 아이는 마주한 인생을 앞에 놓고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내일부터 학교를 가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아이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만나고 있을 때 엄마가 끼어들어 늦게 일어난 아이와 한판 싸움을 벌이면 아이는 그 패를 버리고 엄마와의 전쟁으로 나선다. 엄마와의 전쟁이 훨씬 더 만만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마주하는 일은 답답하고 막막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헤매는 기분이 든다. 거기에 비하면 엄마와의 싸움은 한 판 꽃놀이패다. 어떤 기승전결을 거쳐 어떻게 결론이 날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엄마의 아킬레스건을 잘 알고 있는 아이는 엄마에게 주는 상처의 강약을 조절하면서 세상을 요리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익숙한 싸움을 왜 마다하겠는가? 피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인생의 책임으로부터 달아날 기회를 엿볼 때, 엄마가 퇴로를 제공해주면 아이는 미끄럼을 타듯이 이쪽으로 미끄러진다.
아이에게 주어진 이런 소중한 기회를 엄마가 지레 겁이 나서 빼앗아버리면 안 된다. 그러다 영영 학교에 안 가기로 작정하면 어떻게 하냐고? 영영 학교에 안 갈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도 인생을 마주한 뒤에 내리는 결정이라면 환영할 일이다. 인생을 마주할 기회를 주지 않고 매일 아침마다 전쟁을 치러가면서 끊임없이 잽을 날릴 때 아이들은 그 모든 짐을 부모에게 떠맡기고 드러눕는다.
해는 중천에 떠있고, 이미 학교에 들어가기엔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고, 아프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고, 엄마는 이 사태를 모면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을 것 같고, 오늘 학교에 결석한다면 내일은 또 뭐라고 둘러댈 것인지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있을 때 엄마가 한숨을 내쉬면서 퍼붓는 잔소리는 영원한 구세주보다 더 반갑다. 엄마와의 악다구니를 통해 불안감을 잊을 수 있고, 이 모든 사태의 원인과 책임을 엄마에게 돌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열 받아서 하는 말에 나 대신 져주려는 책임감이 녹아있다는 것을 눈치 챈다.
“그래서 어떡할래?”
“꼴좋다. 선생님한테는 뭐라고 할래?”
“지각이나 하고.. 쯧쯧. 학교는 뭐 하러 다니니? 아예 그만두지 그러냐?”
이런 염장질은 결국 대신 책임져주기로 가는 지도가 숨어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 간섭도 안 하고 그저 “일어났니?”라는 말만 하는 것이 소리소리 지르고 악다구니를 하는 것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엄마의 이런 태도에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인생을 마주하게 되고, 인생의 짐을 자기 어깨에 짊어지게 된다.
그러다 정말 학교를 안 가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하는 부모들이 많다. 학교 가기 싫다는 아이를 부모가 억지로 깨우는 방식으로는 학교에 보낼 수는 없다. 오히려 아침마다 치르는 전쟁을 통해 학교를 안 가고 짐도 안 지는 방식을 습득할 가능성이 더 높다. 아이가 인생을 마주하고서 내린 결론이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결정이면 아무도 말릴 수는 없다.
잔소리 대신 아이가 자신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선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