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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끝 햇살 Jun 22. 2020

3-6. 등산도 육아도 한 번에 한 걸음씩만

   

 상담실로 찾아온 부모들에게 상담사는 이렇게 묻는다.


 “그중에 가장 힘든 문제가 뭔가요?”

 “그중에 어떤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하고 싶으세요?”


 이는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될 수 없다는 뜻이면서, 한 가지 문제에 초점을 집중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 질문이다. 상담에 의뢰되어 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상담도 문제를 하나씩 붙들어야 한다.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로부터 출발한다. 실마리를 찾았다면 그다음에 필요한 것은 집중이다. 다른 부분을 문제 삼지 않고 초점에만 관심을 두는 집중력이 요구된다.


룰을 마음대로 바꾸던 아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상담받으러 온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이 있었다. 이 아이는 치료시간에 상담사와 게임을 하다가 처음에 합의한 방식을 중간에 자기 마음대로 바꾸곤 했다. 상담사가 '언제 그런 게임 룰이 있었냐'라고 물어보면 '지금부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상담사가 그럼 이제부턴 그 룰을 적용하는 거냐고 물으면 그렇다고는 대답하지만 얼마 안가 룰은 또 바뀐다.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였다. 규칙이 무엇인지 아무런 개념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 아이가 가정에서 룰을 맘대로 갈아치우는 왕처럼 군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이는 ‘룰을 그때그때 갈아치우는 왕국’의 피해자였다.

 아이의 엄마는 마트에서 밤늦게까지 일했다. 엄마가 몇 시에 오마고 했지만 일을 하다 보면 그 시간에 오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이럴 경우 왜 안 오냐, 왜 늦게 왔느냐는 아이의 항의에 엄마는 벌컥 화를 내기 일쑤였고, 노는 아빠 대신 벌어먹고 살려는 엄마의 노고를 이해 못하는 파렴치한으로 몰고서야 막을 내렸다. 오기로 한 시간에 왜 오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답 대신 야단을 친 것이다. 아이 입장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룰이 바뀐 것이다.

 오마고 한 시간에 오지 않은 엄마가 설명을 해야 하지만, 늦게 온 사람이 화를 내고 급기야 내가 아주 못된 아이가 되어 버리는 사태를 몇 번 경험하고 나면 아이는 학교에서 이런 상황이 왔을 때 엄마처럼 행동한다. 피해자가 언제나 피해자의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는 다른 곳에서 다른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상담사처럼 놀아주고 받아주기로 작정한 사람 앞에서는 부모가 했던 억압자의 역할을 그대로 답습한다.


상담사를 때리던 아이

 아이는 상담실에서도 룰을 수시로 바꾸고 거기에 항의하면 상담사를 ‘가격’했다. ‘가격’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때린다는 말을 쓰기엔 너무 행동이 빠르고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내 행동이나 상황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순식간에, 정말 전광석화처럼 손으로 혹은 장난감으로 내 머리를 쳤다. 상담사는 이 아이의 사회성 문제보다 ‘가격’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했다. 룰을 바꾸는 문제는 사회성 훈련으로 해결되지만, 다른 아이를 때리는 문제는 폭력의 가해자로 굳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담사가 계속 맞으면서 상담을 할 수 없어서 이 문제가 상담사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이기도 했다. 사실 아이의 무의식적인 행위로 봐서 다른 아이를 덮어놓고 때렸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때리는 행위에 대해 숨기고 있었다.

 이 아이에게 때리지 말라고 하는 요청은 너무나 제어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상담사가 보기에 때리는 순간의 속도나 눈빛이 너무나 빨라서, 무의식이 곧바로 척추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우선 상담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때린 후에 사과하는 일’을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첫 번째 과제: 때린 후에 사과하기

‘때린 후에 사과하기.’     

 때리기 전에는 전깃불같이 빠르게 일어나는 자신의 행위를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둘이 함께 찾아낸 과제였다. 때리기 전에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면 때리고 나서라도 반드시 사과를 하자. 하지만 처음엔 이마저도 몹시 어려운 과제였다. 왜냐하면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이 아이는 때리고 나서 불같이 화를 내기 때문에 사과는커녕 말도 못 붙이게 했다. 때리고 나서 불같이 화를 내고 히스테리를 쏟아낸 다음에야 내가 얼마나 아픈지, 속상한지, 실망스러운지 설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처음엔 화내고 삐치고 돌아앉아 씩씩거리는 바람에 내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차츰 때린 뒤 화를 내고 삐치고 씩씩 거리는 일을 모두 치른 뒤엔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맞았을 때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맞고 나면 둘 간의 사이가 얼마나 멀어진 것 같은지, 맞으면서까지 계속 상담을 해야 하나 얼마나 고민되는지 등등의 말을 수 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서야 비로소 아이가 미안하다는 마음의 동요가 일었다. 그런 일이 여러 번 있고 나서 내가 설명하기도 전에 먼저 스스로 사과를 하기 시작했고, 자발적인 사과를 시작하면서 나를 때리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그제야 때리는 문제에 대해 토론이 가능해졌다. 그 아이로부터 맞지 않고 회기를 진행할 수 있었던 건 상담 시작 후 8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그 이후로는 혹여 실수로라도 상담사를 때린 적이 없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아이와 어떤 과제를 함께 극복하는 과정에 있다면 아이가 밥을 푸다가 말고 정신줄을 놓고 TV를 보느라 주걱의 밥을 주방 바닥에 반이나 흘렸더라도 그걸로 싸우느라 과제의 수행까지 뒤엎어버리면 안 된다. 집합에 관한 공부를 할 때는 미적분을 빵점을 맞더라도 집합 단원에만 집중해야 한다. 부모가 오히려 불안해하거나 집합을 그만두고 미적분으로 건너뛰거나 해서는 안 된다. 집중력은 그렇게 길러지고 그래야 문제도 해결된다. 한 번에 한 걸음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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