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도 예방주사가 필요해

김혜순 「죽음의 자서전」

by 이지경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 이후 세상의 건너편에 대해 누구나 한 번 쯤은 상상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막연한 죽음 말고, 정말로 죽음이 존재하는 곳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는가. 짧고도 긴 지난 시간동안, 우리는 수많은 이별을 겪었다. 상실의 아픔에 온 사회가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여기 초하루부터 마흔아흐레까지. 우리 사회와 개인이 체감하는 죽음에 대해 진솔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해둔 시집이 있다.


여기엔 49편 간 영혼의 여정이 담겨 있다. 각 시의 제목 아래 ‘하루’부터 ‘마흔아흐레’까지. 이러한 구성은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연속성을 지닌 것 같다. 양장책 위로 거대한 꼬치를 찔러둔 모습이라고 해야 하는가. 마치 사람이 죽으면 49제를 올리는 것처럼, 시인이 직접 죽음이 되어, 49일동안 영혼이 이승을 떠돌며 죽음에 대해 생경히 전달한다. 그리고 하루하루 영혼이 증발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 시집을 한 권의 ‘시집’이 아니라, 마흔아홉(그 이상) 장의 한 편의 ‘시’로써 받아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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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희번득한 영원의 확장"

영원이라곤 없는 삶에서 유일하게 영원한 것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으로써 영원히 잠들고, 세상에서 영영 사라진다. 시인이 직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첫 날의 「출근」의 이야기다. 죽음은 관념적인 것이라 체험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텍스트에 명백하게 느껴지는 것은, 죽음으로 육신을 떠난 영혼의 한기다.


시는 시간의 흐름과도 같다. '하루'의 「출근」은, 죽음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시적화자의 모습에서 죽음이 다가온 이의 긴박함과 영혼이 빠져나간 후의 생경함을 직접적으로 담고 있다. “희번득한 영원의 확장”이라는 간결한 메시지로 나타내는 죽음은, 영원함이 없는 인간의 세계에서 유일한 영원성을 확보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라고 본 것 같다.


헛숨의 모순

죽음은 때론 모순적이다. 강렬히 열망하고 미쳐버리는 순간 죽음으로 치닫게 된다. 마흔엿새 「질식」, ‘숨’에 미쳐버린 나머지 오히려 숨이 차 정말로 질식해버렸다. 과호흡은 호흡을 단절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란 모순에 대해 고찰해본다. 죽음이란 이리 간편하고 잔인한 것이란 생각.


죽음의 예방주사

죽음을 텍스트로 옮기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고민을 해보았다. 죽음이란 미지의 영역을 사람들 앞에 성큼 다가오게 하는 것이 맞는가? 저승을 이승까지 견인하는 것이 과연 어떤 실효성을 지니길래. 결론적으로 시집을 덮을 때, “필요한 경우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죽음이란 때론 기피되고, 사회적으로도 다뤄지지 않는 담론이다. 죽음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다루게 되면 그 본질이 흐려지게 된단 여론에 의해서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간 참사에도 우린 자유롭게 의견을 표하지 못하고 죽음을 외면한다. 그러한 죽음도 모두 외면하는 것이 맞는가. 마땅한 대가를 치른 것인가. 스쳐가는 순간의 한 방을짜리 이름은 기억할 필요가 없는가. 죽음을 매립한 땅 위에 서있는 것이 과연 평화인가.


그러니 시는 우리 사회에 덮친 죽음의 그림자를 무엇보다 선명히 직시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 성수대교 붕괴, 이태원 참사. 외에도 세지 못한 수많은 죽음이 우리 사회에 살아 숨쉬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시인은 직접 “죽음”이 되어 우리 사회에 팽배한 죽음에 대한 기피를 떨쳐내도록 만든다. 이 시집을 구매하면, 죽음이란 뜨거운 냄비를 받치는 종이 깔개로 사용하도록 하자. 죽음을 신성하고 거룩한 영역의 것으로 만들면 안 된다. 죽음은 무엇보다 가까이 우리의 곁에 있으며, 죽음이란 충분히 ‘시’가 될 수 있다. 시는 충만한 집필자중심주의로 굴러가는 바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