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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Jan 09. 2024

<성난 사람들>은 어떻게 타자화된 동양을 해방하는가?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서양에 의해 동양이 타자화되는 문제를 논한다. 타자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타자 내부의 구체적인 차이들은 지워지고, ‘동양’이라는 하나의 분류 아래 보편화된 성질이 부여된다는 사실이다. 타자인 동양이 부여받은 성질은 저절로 ‘열등하고, 저급하며, 낙후된’ 것이 된다. ‘우월하고, 고급스러우며 발전한’ 것들은 서구의 성질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타자는 악마화되기도, 신격화되기도 하는데, 이는 곧 타자가 동등한 인간 존재로 인식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슬람에 대해 야만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는 시선이 동양에 대한 악마화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서양에는 불교와 선에 통달한 명상적인 동양 문화라는 지나치게 이상화된 이미지가 공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인 성질이 아니더라도, 개별적 차이가 지워진 채 일방적으로 부여된 판단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을 억압하는 폭력으로 작동한다. 지금껏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타자화된 시선에서 동양계 미국인들을 재현해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컴플레인조차 걸지 않는 소심한 동양인, 성별에 따라서는 ‘수학에 능통한 괴짜이지만 성적 매력은 없는’ 동양 남자와 ‘순종적이고 가정에 헌신하는’ 동양 여자가 대표적이다. 설령 유교적 문화를 공유하는 아시아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가족에게 헌신하는 모습이 실제로 많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동양을 타자화하는 렌즈는 그 이면을 살펴보려는 일말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간의 할리우드 카메라 렌즈는 동양 문화를 다각적으로 살피기는커녕 그저 더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재현하며, 이야기에 걸맞게 이들을 소모해왔다.     


     그러나 아시아계 미국인의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은 다르다. 이 시리즈는 관습과 고정관념에 의해 억눌린 동양계 미국인들의 내면을 현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그 부당한 서구적 편견을 산산조각 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유교적 가치의 내면화를 통해 그 자신을 억압해온 수많은 동양인에게도 통쾌함을 선사한다.     


     <성난 사람들>은 동양계 미국인 두 명을 주축으로 전개된다. 한국계 미국인 대니(스티븐 연)는 가장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느끼며 건축 도급업자로 일하고 있지만, 일이 마음만큼 풀리지 않는다. 베트남과 중국계 미국인 에이미(앨리 웡)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서 대니에 비해 화려한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역시 나름의 고충이 있다. 간절히 바라는 사업체 매각은 좀처럼 진전이 없고, 시어머니는 에이미를 무시하며, 남편인 조지(조셉 리)는 무능하다. 에이미와 대니는 성별도, 사회적 계급도, 살아온 환경도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을 공유한다. 태어날 때부터 미국 땅에서 자랐음에도 사회가 그들에게 부여한 동양인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성난 사람들>은 덤덤한 표정 아래 터질 것 같은 울분을 참고 있던 대니와 에이미가 난폭 운전 사건으로 뒤엉키며 시작된다. 두 인물은 평소 자신의 분노와 폭력성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다. 이는 오랜 기간 서구 사회가 믿어왔고, 할리우드가 재현해 온 ‘평화로운 내면의’,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동양인의 이미지와 잘 부합하는 삶이다. 그러나 각자의 역할과 사회가 부여한 이미지에 충실하기 위해 솔직한 감정을 억눌러 온 두 사람의 내면은 비슷한 모양으로 문드러지고 있었다. 난폭 운전을 계기로 서로에게 끝없는 복수를 이어나가는 두 인물은 서로를 향해 치를 떨지만, 사실 그 둘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솔직하게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서로의 등장을 언제나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대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면서 늙은 부모와 철없는 동생 폴(영 마지노)을 부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교적 책임감을 떨치지 못한 대니는 압박과 절망에 짓눌려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하고, 마트에서는 노골적인 무시까지 당한다. 그래도 대니는 참는다. 지금껏 그래왔듯.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는 여기까지만 담아왔으며, 그렇게 동양 남성은 남성성을 결여한 소심한 캐릭터로 남는다. 그러나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온갖 멸시와 거기에서 비롯된 분노를 억눌러 온 대니는 마트에서 나오자마자 난폭 운전자 에이미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대니는 그간 부재했던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는 동양 남성’ 캐릭터로 나아간다.     


     에이미 역시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성격으로 재현되어온 기존의 동양인 여성 캐릭터와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녀는 직업적 성취뿐만 아니라 성적인 관계에서도 수동적이기보다는 본인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좇는 인물이다. 에이미는 부하직원 미아(미아 세라피노)의 사진을 도용해 대니의 동생 폴과 연락하는 대범함을 보인다. 이렇게 그녀는 수동적으로 응시 되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스스럼없이 거짓말까지 한다. 비록 삐뚤어졌을지언정, 이 대목에서 드러나는 캐릭터의 주체성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시리즈 내내 ‘복수심’을 주된 동력으로 움직인다는 특징 역시 수동적인 동양 여성 캐릭터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에이미의 불만은 그녀 스스로 선택한 상류사회의 허례허식이기도 하지만, 남편 조지와 함께 살펴볼 때 더욱 흥미롭다. 조지는 일본인 예술가의 집안에서 나고 자란 일본계 미국인이다. 구김 없는 미소를 잃지 않는 조지는 이제껏 동양에 덧씌워진 신비롭고 이상화된 캐릭터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에이미가 부정적인 감정을 내보일 때마다 감사일기와 명상을 제안하거나, 선불교적 조언을 내놓는 방식으로 그녀의 부정적인 면을 외면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에이미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에이미를 가장 크게 억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에이미의 사업 상대로 등장하는 조던(마리아 벨로) 역시, 타자화하는 시선으로 에이미를 억압하고 있다. 깃털이 잔뜩 달린 왕관과 같은 ‘이국적인’ 물건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조던은 에이미의 ‘고요한 불교 정신’을 칭찬한다. 그러나 조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에이미를 가두는 굴레로 기능한다. 조던은 그렇게 에이미에게 자신이 어떤 변덕을 부리든 아무 소리 않는 타자이자 약자로 머물 것을 요구하며, 그 자신은 주체로 군림한다. 결국 조던과 조지는 동양에 대한 서구 사회의 타자화된 시선 그 자체로서, 관습과 인식이 타자화된 대상을 어떻게 억압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억압은 ‘일본계 미국인’ 조지처럼 타자화된 집단 내부에서 내면화된 목소리로 드러나기도 하고, 백인 갑부 조던의 경우처럼 타자를 억압하는 외부적 목소리로 드러나기도 한다.     


     <성난 사람들>이 타자화를 전복한다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시리즈가 ‘수동적이던 동양인을 분노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으로 재현해서’가 아니다. 동양을 타자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의 문제는 그런 태도가 맥락을 제거한 채 개별성을 살피지 않고 상대를 재단한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할리우드 영화에서 동양인은 그간 가부장적 분위기와 같은 맥락이나 고통을 겪는 개별 존재들의 서사는 제거된 채 타자로만 존재했다. 그러나 <성난 사람들>은 그간 할리우드가 도구로 소비해온 동양의 이미지 이면의 맥락을 담아낼 뿐 아니라, 그런 이미지가 어떻게 굴레로 작용하며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지에 주목한다. <성난 사람들>이 폭력에서 오는 말초적 즐거움을 넘어 해방감을 선사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낭만화도, 악마화도 없이 날 그것의 타자를 마주하는 일은 에이미와 대니가 보여주듯 때로 섬뜩한 공포를 주겠지만, 오직 그런 대면만이 우리를 타자화의 굴레에서 해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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