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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Jan 09. 2024

내던져진 몸을 끌어안는 파농의 사유

『검은 피부, 하얀 가면』프란츠 파농

    우리는 종종, 아니 꽤 자주 자신의 존재를 미워한다. 혼을 부정하고 몸을 혐오한다. 그 존재 방식이 세계가 제시하는 이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던져진 세계는 이미 이항 대립의 폭력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이다. 우리는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 몸과 영혼을 도려내고, 부정함으로써 더 완벽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렇게 자신에게 폭력을 행한다. 이에, 식민주의 비판을 넘어 식민주의 기저에 자리 잡은 이항 대립의 폭력성에 저항한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식민주의가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이항 대립의 폭력은 여전히 잔재하고 있기에.

   

    파농은 1925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군으로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정신과 의사로 일했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진찰하며, 파농은 식민 지배가 인간의 정신에 일으키는 파괴적 영향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한편 흑인 혼혈인 파농은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도 분석과 반성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렇게 자신을 포함한 동시대인들의 정신을 끊임없이 탐구하며 얻은 식민 주의에 대한 통찰이 바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다.


    보통 식민 지배의 잔혹성을 이야기할 때, 노예제, 노동 착취, 차별적 언행 등 가시적 인 차별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끔찍한 일이지만, 식민주의가 더욱 무서운 것은 은연 중에 사람들의 영혼까지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서서히,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 진다. 그 무의식에 특히 주목한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는 자신의 흑인성을 부정하고 백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흑인의 사례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1장에서 파농은 언어와 관련된 사례를 소개한다. 마르티니크 아이는 어릴 때부터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할 것을 요구받는다. 프랑스어 특유의 R 발음을 완벽하게 구사하기 위해 마르티니크인은 끊임없이 R 발음을 연습한다. 단순히 유창하게 말하고자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노력이 아니다. 이들의 목표는 ‘진짜 프랑스인’처럼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문명화된 인간’으 로 인정받는 것이다. 파농의 말을 빌리자면, 마르티니크인들은 언어 능력을 통해 “백인화의 정도를 평가받는다”(20쪽). 그리고 그 평가는 백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백인화의 폭력은 직접적인 모욕과 멸시가 없어도 작동한다. 파농은 프랑스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흑인 혼혈이다. 그런 파농에게 백인 친구들은 너는 외모가 검을 뿐, 영혼은 백인이라는 말을 칭찬처럼 건네곤 한다. 그렇게 파농은 ‘단지 조금 검을 뿐, 흑인이 아닌’ 존재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흑인은 갈등한다. 이들은 나를 증명하기 위해 나를 부정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식민주의 조건 아래서 마르티니크인은 끊임없이 그들의 흑인성을 표백하고, 백인으로 거듭나고자 자기검열을 멈추지 않는다. “원숭이와 백인이라는 인간을 연결하는 중간자의 존 재”(38쪽)로 취급받는 흑인들에게, 백인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선과 이상에 가까워지는 것이며, 무엇보다 인간이 되는 길이다. ‘우월하고 문명화된’ 백인에 비해 흑인은 ‘열등하며, 야만인이고 폭력적’이다. 파농이 보기에 마르티니크인은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그 자신의 존재를 끊임 없이 부정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이러한 식민주의의 폭력은 이항 대립에 많은 부분 의존하고 있다. 물론 이항 대립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이항 대립은 세상을 인식하는 인간의 본능이며, 그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다. 예컨대 인간은 악과의 대립에서 선을, 흑과의 대립에서 백을 인식한다. 인간 언어 역시 기본적으로 이항 대립에 기반하여 만들어진다. 특정 변별 자질의 유/무에 따라 음운을 구분하고, 차이에 기반한 구조 속에서 언어 체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항 대립은  인간 의미작용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이 자체에는 어떠한 악의도 없다.


    그러나 이항 대립 위에서 폭력이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항 대립의 한 쪽으로 곧 잘 힘이 실리기 마련이며, 우세한 쪽이 다른 한쪽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식민주의에 대입해서 생각해보면, 선-우월함-깨끗함의 가치를 백인이 소유하고, 악-열등함-더러움의 가치는 흑인에게 부여되는 식이다. 식민주의 구조 아래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 이러한 가치를 내면화 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흑인 내부에서도 서로를 구분 짓도록 추동하는데, 마르티니크인들 이 세네갈인들을 자신들보다 더 야만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한편 파농은 책의 4장에서 식민주의 자체보다 열등 콤플렉스가 선행한다는 마노니(Mannoni)의 분석을 지적하며 사르트르를 인용한다. 피지배자에 내재해있는 열등콤플렉스가 식민주의를 낳는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에 의하면 “유태인이라는 이름은 유태인들 스스로가 지칭한 이름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정해준 이름이다. 이것이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진실이다. … 유대인들을 창조한 사람은 바로 반유대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126쪽) 이는 마노니가 잘못 분석한 마다가스카르인에게도 마땅히 적용되어야 한다. 마다가스카르인이 라는 인식은 백인에 의해 부여된 것이며, 따라서 식민주의보다 열등콤플렉스가 선행할 수는 없다. ‘야만인’은 ‘문명인’과의 조우로 빚어진 존재이다. 이렇듯 파농은 개인의 심리가 아닌 식민주의, 즉 구조에서 문제를 발견한다.


    그렇다면 구조적인 식민주의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가? 파농은 종종 네그리튀드를 언급하지만, 그들의 방식을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는다. 네그리튀드는 에메 세제르(Aimé Césaire) 등으로 대표되는 흑인 정치 운동으로, 흑인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인종 문제에 접근했다. 그 자신의 문화와 문명에 주목함으로써 차별주의자들에게 저항한 것이다. 분명 유 의미한 노력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방식은 여전히 백인들의 이항 대립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들의 세계로 편입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나도 당신들처럼 철학을 할 수 있고, 문명을 누리는 지성인이라고. 맛있는 밥에만 동물처럼 기뻐하는 야만인이 아니라고.


    파농은 “흑인 철학자와 플라톤 사이에 그렇게 수많은 서신이 왕래했었다는 사실”보다 “사탕수수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여덟 살 꼬마들의 인생”(315쪽)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 는 흑인의 세계에 서서 백인을 비난하지 않으며, 그의 사유는 흑과 백이라는 구조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 파농의 작업은 백인과 인종차별주의를 비판하고, 그들에게 저항하는 ‘우리’ 흑 인들의 긍지와 고유함을 주창하기보다 그저 인간의 고통을 본다. 그리하여 파농은, 이항 대립 으로 세워진 인간의 언어로 자아와 타자를 고정하지 말고 그 모순을 한 번에 끌어안자고 주장한다. 그것은 곧 열린 존재로 남아있는 것이며, 구조 속에 편입되지 않은 존재로서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다양하고 단단한 정체성이 무엇보다 중시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흑인, 퀴어, 여성, 아시안 … 정체성을 강조하는 시대 흐름은 분명 어떤 좋은 점을 가지고 왔겠지만, 때로는 그 단단한 정체성이 긋는 구분은 자아에게도 타자에게도 폭력을 행사한다. 그런 우리에게 파농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이 무엇이든, 나는 당신의 고통받는 몸을 본다. 언어로서 섣불리 당신의 존재를 고정하지 않겠다. 나를 너를 그저 사람으로 본다.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몸을 가진 우리, 그래서 고통을 느끼는 우리. 세상이 부여하는 모든 악의에 “나는 인간으로서 나의 모든 존재의 무게를 그의 인생에 포개서 그에게 보여줄 것이다.”(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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