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6월 14일 일기
그렇게 바르셀로나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온 마드리드. 언덕길을 꾸역꾸역 올라가 도착한 호텔은 호스텔인 줄 알았으나 개인 욕실이 딸려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바르셀로나에 이어 더 작은 호텔 감옥에 우리가 갇혀버린 것인지 애매했다. 우리는 지쳐있었고, 우리의 여행은 이런 식으로 지속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떠오르지만, 서로 이야기를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도 지쳤고, 엄마도 지쳤다.
호텔에서 시에스타를 즐기며 햇빛을 피하는 사이, 난 근처 에어비앤비를 검색해서 바로 예약을 했다. 다음날 아침 9시에 호스트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호텔 3박, 30만 원가량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다. 난 만 원짜리 액세서리 하나도 엄청 고민하며 구매하다가도, 백만 원짜리 항공권이나 몇 십만 원짜리 원피스는 마음에 들면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제를 한다. 이 30만 원은, 먼 타지에 와서 엄마와 함께 할 시간을 더욱 값어치 있게 만들어 주기 위한 돈이라면 나에겐 3원의 가치조차 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돈이다.
다음 날, 엄마에겐 (당연히) 호텔 숙박비를 환불받았다고 (거짓) 말하고, 뭐 나름 잘만한 호텔을 왜 굳이 떠나 숙소를 바꾸냐고 하는 엄마를 데리고 9시 정각에 호스트를 만나러 건물 앞으로 갔다. 5분가량 늦은 호스트는 연신 늦어서 미안하다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고, 우리 짐을 들곤, 3층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에어비앤비가 성공한 이유를 혼자 여행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고향에서 비행기를 장장 12시간, 경유 두 번하면 거의 18시간을 타고 날아와서, 처음 보는 공항, 처음 보는 외국인, 처음 보는 버스를 타고 겨우겨우 숙소 근처에 도착해 호텔 침대에 누웠을 때, 생각보다 설레지 않고 두려움이 앞설 수 있다. 괜히 나의 계획을 점검해 보고, 내일은 무엇을 할지 여행 가이드를 들여다 보고, 와이파이를 연결해 한국의 친구와 카톡을 한다. 이게 뭐람.
그런데 에어비앤비로 예약을 하면, 그 먼 길 낯선 땅에서 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 약속 장소에 약속 시간에 도착하면 날 기다리고 있다가 환하게 웃어주고, 난 그 순간 이 땅에 아는 사람이 한 명 생겼고, 그 사람은 날 집으로 안내해주고 자기 도시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묻는 것에 기꺼이 대답해준다.
여행에서 남는 기억은 대부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겼던 일이다. 혼자 여행하면 더욱이 사람이 그리운 법인데, 날 기다려 준 그 한 명의 호스트로 난 이 도시가 갑자기 정겹게 느껴지고, 내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낯섦이 사라지고, 마치 이 도시가 우리 동네인마냥 느껴지고 없던 애정이 생기는 것이다.
집은 넓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너른 창문으로 햇볕이 쏟아져 내리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침실이 따로 있고.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둔 욕실 타월이 있었다. 그냥 우리 집이었다. 엄마와 나는 그 순간 잿빛이던 마드리드가 너무 좋아져 버린 것이다. 마드리드를 기점으로 근교 도시 두 곳 여행만 계획한 우리는 그냥 그 집이 너무 좋아서 그 집에서만 뒹굴뒹굴하며 나흘을 보내고 싶어 진 것이었다.
냉장고와 찬장에는 이전 숙박객들이 남기고 간 재료들이 있었다. 쌀...! 쌀이 있었다! 스페인은 빠에야를 먹는다! 그 길쭉한 쌀! 엄마는 밥을 했다! 나는 에어프랑스에서 가져온 튜브 고추장을 꺼냈다! (+ 에어프랑스 나는 굉장히 만족한다.) 밥에 고추장을 비벼 (플라스틱이 아닌!) 숟가락으로 먹는 순간의 행복이란... 아마 유럽 여행 한 달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가 아닐까?
당장 마트에 가서 나흘 동안 절대 먹을 수 없는 양의 장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보고 (다 먹었다.) 우리는 모든 접시와 숟가락, 포크, 나이프와 와인잔과 식기 및 주방도구를 이용해 여행지를 우리 집으로 만들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유럽에 적응하고, 엄마와 나의 첫 여행에 적응하느라 심적으로 지쳐있던 우리는, 집이라는 너무나도 공간 속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밥을 먹으며 우리의 일상을 재현해 낸 것이다. 우리의 여행과 여행 방식은 사실 마드리드를 기점으로 바뀌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한 달 동안 유럽에서 우리가 즐겨하던 일상을 발견하며 여행했다. 좋은 일이었는지 나쁜 일이었는지, 바르셀로나에서의 일주일은 우리가 서로 유럽에 적응하기에 충분할 만큼 길었고, 그 뒤의 삼 주가 극적으로 좋아질 만큼 극적으로 (특히 처음 이틀은) 집에 가고 싶은 나날이었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비엔나. 잘츠부르크. 뮌헨. 우리가 함께 있었던 다섯 도시. 엄마가 "호연아 나 떠나기 싫어~", "우리 그냥 오늘 집에 있을까?"라고 한 유일한 도시는 마드리드였다. 정작 그 유명하다는 솔 광장은 메말라 비틀어졌고 스페인의 수도에 있는 자라는 명동 자라보다 훨씬 별로였고. 마드리드는 볼거리가 없는 유일한 도시였고, 우리가 떠나기 싫은 유일한 도시였다. 난 아침에 국제학생증 들고 프라도 미술관을 쭐래 쭐래 산책했고, 우리는 점심이 되면 다시 장을 보러 근처 슈퍼에 가서 스페인어를 유일하게 하는 가게 점원 아줌마와 무슨 고기가 맛있는지 이야기했고, 잠시 나간 산책길에 근처에 있는 패브릭 소품 가게를 구경하는 게 하루 일과였다.
왜 항상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대부분 사소한 것일까? 여행에서 일상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추억으로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이 편안한 여행은 내가 서있는 공간을 내 삶의 일부로 끌어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생각한다. 많은 곳을 다녔다고 생각했지만, 2016년 여름 한 달의 여행은 나에게 여행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by 꾸꾸까까세계여행. 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