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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Aug 16. 2021

보고서에 대충 써버린 모호한 문장들

내게 모호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모호하다

K 회사는 최근 사업확대로 내년부터 영업, R&D, 개발 조직을 더욱 확장할 계획입니다. 인사팀장 임 상무는 주간회의에서 팀원들에게 아래 내용을 지시했습니다.


 "앞으로 신규 조직이 계속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바, 올해가 지나기 전 리더급 인력들을 미리 키워놓을 필요가 있음. 교육담당자는 인재양성 계획을 수립하여 다음주까지 보고할 것"  


 교육담당자 정열심 대리는 이번 리더 양성이 매우 특별한 지시임을 이해하고 한주간 여러 부서와 회의를 하고 외부 기관에 문의를 했습니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1. 각 부서장들에게 리더의 소질이 있는 부서원들을 추천 받아 리더 Pool을 구성한다.

2. 추천받은 인력들에게는 본인이 부서장이나 PM(Project Manager)으로 선발될 수 있음을 통지한다

3. 리더십 전문 외부 교육기관을 알아보고 최적의 비용으로 교육이 가능한 곳을 선정한다

4. 인력별 교육 차수를 구성하여 실행한다

 

 그리고 이 계획을 토대로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였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한 번 살펴봅시다.

(기본적인 보고서 내용 - 배경, 목적 등- 과 상세내용은 생략하고 추진계획의 큰 제목 부분만 보도록 합시다)


◆ 제목 : 차년도 사업 확대를 대비한 리더 양성 계획

 - (중략) -

○ 추진 계획

    1. 리더 후보자 pool 선정 (~ 5월)

    2. 리더 후보자 대상 notice 메일 발송 (~6/3)

    3. 리더십 교육 프로그램 확정 (~6월)

    4. 인력별 교육 차수 편성 및 통보 (~ 7월)

    5. 차수별 교육 실행 (~ 10월)   


 여기까지 쓴 정열심 대리는 뭔가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수립한 계획은 10월에 종료되어 연말까지 2개월이 비게 됩니다. 무언가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템 하나를 추가해 보았습니다.


     6. 리더 후보자 신규 프로젝트 참여를 통한 실전역량 강화 (~12월)  


 그런데 이 부분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정열심 대리의 보고서를 검토하던 임 상무는 무난하게 읽어나가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눈이 멈췄습니다.


 "실전 프로젝트 참여? 마지막 6번 항목은 구체적으로 무얼 하겠다는거지?"


 정열심 대리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했습니다.


 "네, 상무님... 그... 아무래도 지식적으로만 습득한 리더십 교육에서 그치면 조금 부족하겠다는 생각에, 후보자들이 실제 프로젝트에 리더로 참여함으로써 실전 감각을 익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임 상무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연말에 참여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어떤게 있는데?"


 정열심 대리는 갑자기 말문이 막힙니다.


 "그 부분은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니, 한 해 농사 다 끝나가는 연말에 신규 프로젝트 건들이 얼마나 있다고... 만약 후보자들이 다 참여할 수 없으면 기회가 공평하게 안돌아가는 거 아닌가? 그리고 이 사람들이 연말 과제에 참여해도 될만큼 업무 여유가 있는건가?"


 "........"


"그리고 이거 하게되면 누가 추진하는거지? 인사팀인 우리가 하는건가? 아니면 현장에서?"


"........."


 "그런 부분 생각 안했어요? 어떻게 이 계획을 추진건지 고민 안 해보고 그냥 한 줄 추가한거에요?"


 결국 정열심 대리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전반적으로 잘 흘러가던 보고서가 '구체적이지 않은 개념덩어리' 계획 하나 때문에 아쉬운 평가를 받아버렸지요.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종종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대충 생각한 것도 남들은 명쾌하게 이해해 주고 관대하게 받아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내가 3 정도로 생각해서 작성한 문장은 그 보고서를 읽는 이에게 3 이상 이해시킬 수 없습니다. 나에게 애매하면 읽는 사람에게도 애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정열심 대리는 교육을 수강한 인력들에게 실전 경험도 시켜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신규 프로젝트 참여' 였습니다. 좋은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문제는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옮겨버린 후 마침표를 찍어버렸다는데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구체화 되지 않은 '생각 덩어리'는 검토되고 정제되어야 하며, 그 작업을 하다보면 생각 덩어리 전체를 버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머릿속 개념을 그대로 보고서에 출력해버립니다. 그것은 조금 심하게 말하면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아무나 받아라' 하며 대충 차버리는 패스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이전에 '보고서의 생명은 디테일에 있고, 숫자에 있다' 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 부분에서도 보고서의 명료성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모든 문장들은 명쾌하게 설명되어야 하고, 관련된 질문들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가급적이면 별도의 질문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명쾌함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조금 더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동호회 행사 추진계획서 중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다고 합시다.


- 캠핑 전 구매 필요물품은 동호회 총무를 통해 확정 (목장갑, 숯)


 여러분은 이 문장을 어떻게 느끼시나요? 이에 대한 한줄평을 하자면 '대충 감은 오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현입니다. 캠핑 전 구매 필요물품을 확정해야 하고 그것이 동호회 총무를 통해 진행될거라고 하는데 괄호에는 목장갑과 숯이 이미 들어가 있습니다. 괄호 안 내용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목장갑과 숯이 필요한게 이미 확인되었다면 왜 구매 필요물품을 확정하는게 필요할까요? 그리고 필요물품은 동호회 총무가 알아서 확정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의견 취합이 필요한 것일까요?


 계획서를 작성한 동호회 임원에게 어떤 의도로 이 문장을 썼냐고 물었더니 아래와 같은 답을 했습니다.


 "원래 캠핑 가기 전에 총무님이 단체톡방에서 공동으로 구매가 필요한 물품들을 회원들에게 물어보거든요. 의견들을 받아보고 총무님이 구매할 물품들을 최종 결정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목장갑이나 숯은 꼭 필요할 것 같아서 예시로 넣은 겁니다."


 이런 취지라면 본문은 아래와 같이 좀 더 명확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 캠핑 전 구매 필요물품(목장갑, 숯 등)은 단체 메신저 방에서 동호회 총무 주관으로 의견 취합을 통해 확정


 머릿속 생각이 한 줄의 문장으로 옮겨지는 과정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보고를 받는 입장에서 보고서에 불명확한 표현이 있고 그것을 확인했더니 작성자가 별 생각없이 쓴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 보고서의 품질은 확 떨어져버립니다. 동시에 '다른 부분에도 이렇게 불명확한 부분들이 있나 살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올라오게 됩니다. 혹은 사안에 따라 이런 생각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애매한 표현들로 중요한 안건을 어물쩡 넘어가려고 하는구나' ( = 사기를 치려고 하는구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보고자료의 명료성을 높일 수 있을까요? 제 경험에 근거한 몇 가지 가이드를 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스스로에게 깐깐해지기를 연습하라.

 보고서를 쓰는 나는 보고를 받는 상사보다 결코 깐깐해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써 놓은 초안은 엄격하게, 매의 눈으로 자가검토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정도로만 써도 무슨 뜻인지 이해해 주겠지',

'이 용어는 이전 보고서에도 언급한 적 있으니 굳이 별도 설명하는 문장을 쓸 필요 없겠지'

'어차피 계획은 수정하라고 있는건데, 두리뭉실하게 써도 부장님도 감안하고 봐주시겠지'

 

 이처럼 가벼운 셀프 검증을 통과한 보고서는 실제 보고시 호된 리뷰를 당하게 됩니다. 저의 경우 이런 일들을 여러번 당하게 되니, 이제는 모호한 문장과 표현을 쓸 때 머릿속에 경고 신호가 자동적으로 울리는 것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대충 쓰고 싶은 유혹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 라고 넘어가게 되면, 보고서를 오픈하는 순간 (열이면 열) 상사의 의구심은 저의 애매한 표현에 쏠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정도 가지고도 설마 뭐라고 할까?' 라고 생각한 부분에서 가차없이 지적을 당합니다. 나에게 모호하면 '당연히' 다른 이들에게도 모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내 보고서상의 표현, 단어, 항목들에 대해 질문하는 연습을 하라

 1번과 같은 맥락에서 아래와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용어 선택은 적절한가? 전문용어나 약어라면 보고받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가?'


'내가 수립한 계획은 어느정도 구체화가 되어 있는 것인가? 5W 1H (What, When, Where, Why, Who, HOW)로 설명할 수 있는가? 확정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거기에 대한 언급(예 : ~는 현재 계획 수립중, ~는 내부검토 후 추진 등)도 해 놓았는가?'


'문장은 모순없이 잘 설명이 되었는가? 껄끄러운 질문을 피해가기 위해 애매한 부분을 남겨두지 않았는가?'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은 모두 내 보고서의 약점입니다. 스스로 질문해보는 작업들을 반복하게 되면 수정을 거듭할수록 명료성이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3. 작성하기 어려운 내용이라 하더라도 논리적으로 대응하려고 애쓰라

 사실 오늘 주제와 같은 이슈들은 쉽게 쓸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오늘 마트에서 장보기 계획'을 주제로 계획서를 쓰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지요. 하지만 '하반기 매출 확대를 위한 활동 계획' 같은 주제는 깊은 고민과 사전 토론없이는 작성하기 어렵습니다.

 때로는 보고서를 쓸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즉 충분한 내부검토, 부서간 협의 같은 일이 진행되지 못한 상태에서) "내일까지 계획 보고"라는 미션을 받고 키보드 앞에 앉아야 하는 괴로운 순간도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 하는 것이 회사생활입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뜬구름 잡는 내용들로 페이지를 채우다가 결국 호된 뒷감당을 하게 되는데요,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이 상황에서 계획서를 만들라는건 그냥 나보고 창작을 하라는 거잖아?" 맞는 말입니다만, 이 경우도 논리적으로 접근만 한다면 돌파구는 있습니다. 뜬구름 잡는 내용도

① 현재 내용이 하나의 안(案) 이라는 것을 명시해 주고

② 이것을 추진하게 되면 어떻게, 어느 부서와 협업해서 할 것인지

③ 그리고 어떤 일정으로 추진할 계획인지

④ 이것을 추진할 때 제약사항은 어떤 것들인지

등등을 명시해 주면 거짓없는 명확한 계획서가 됩니다. (사실 몹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방향으로 가야만 합니다) 논리적인 고민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승산은 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추후에 별도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간혹 "저는 현장부서에 있고, 우리 부서장님도 보고서 퀄리티에 그렇게 신경쓰지 않는 분이시라 상관없어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현장 부서는 그렇게 첨예한 문서 리뷰가 시행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모호한 표현은 가급적 점검하는 연습을 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추가했던 안건이 상위부서와 임원까지 올라가서 크게 다뤄지고 현장부서에 직접 상세내용 보고를 요청하는 나비효과와 같은 일들을 저는 종종 목격했습니다. 그제서야  "보고서에 실행계획 한 개만 쓰기는 좀 그래서 하나 더  넣은 거구요... 실제로는 그 건에 대해 아무 진행계획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될까요?" 이런 변명을 하기에는 뒷수습거리가 너무 커져버린 상태입니다. 잠시 편하기 위해 사용한 모호한 표현은 결국 내게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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