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던 어르신 한 분이 들려주신 말씀이 아직 기억난다. 그분께서 고등학생때 동네에 큰 홍수가 났다고 한다. 집이 다 떠내려가고 가족들 목숨만 간신히 건질 정도였는데, 그분에게 가장 마음아팠던 것은 어릴때부터 정성스레 모아놨던 사진 앨범들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후부터 그분은 사진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여행을 가도 굳이 사진을 남기려고 애쓰지 않는다. 소중한 추억을 잃어버린 상처가 적잖이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사진 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험들을 꽤 많이 했다. 가장 마음아픈 기억은 10년 전쯤 랜섬웨어 공격으로 인해 2010년까지의 파일들을 모두 잃어버렸던 사건이다. 가슴이 쓰라렸지만 어찌할 수가 없다. 그리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진을 촬영하는 영역에서도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보다 그렇지 못한 부분이 훨씬 많다. 카메라 조작법이나 구도잡는 법, 노출을 조절하는 법, 혹은 메모리카드나 배터리를 잊지 않고 챙기는 것은 사람의 지식이나 경험, 성실성으로 대처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갖춰져도 빛이나 기상상황과 같은 자연환경이 받쳐주지 않으면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들을 맞이하게 된다. 나도 이와같은 상황들을 크게 혹은 작게 경험해보며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잊지 못하는 몇 사건들이다.
1. 악천후를 무리하게 뚫으려 했다가
신입사원 때였다. 당시 부서 사진동호회가 있어서 한 달에 한 번은 퇴근후 출사를 나갔었다. 어느날, 동호회 리더님이 좀 먼 곳으로 가보자고 제안했다. 장소는 경북 청송에 있는 주산지였다. 주왕산 국립공원에 위치한 이곳은 깨끗한 저수지에 왕버들이 자라고 있는 곳으로, 계절마다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해준다. 서울에서 청송까지 가는 것은 쉽지않은 일이지만, 나도 인터넷에서 심심찮게 본 곳이라 가보겠다고 신청을 했다. 금요일 퇴근 후 동호회원 차량 2대로 이동해, 포항의 찜질방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새벽시간 출사지로 가는 일정이었다.
문제는 출발 이틀 전부터 주말 비 예보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뉴스를 보니 강수량도 만만치 않았다. 동호회원 몇 분들은 일정을 조정해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그러나 리더님은 단호했다.
"일정을 바꾸면 못 가게 될 가능성이 더 커. 나는 이번에 반드시 갈거야. 혼자 가게되어도 상관없어."
결국 회원 중 절반 정도는 신청을 취소했다. 남은 사람은 5명으로, 차량 1대로 출발을 하게 되었다. 나도 한참을 고민하다가 생각을 굳히고 신청을 했다.
'어떻게 되겠지. 날씨는 계속 바뀌니까 당일 의외로 쾌청할지 누가 알겠나. 주산지 같은 곳에 갈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뿐이다.'
그러나, 일기예보는 바뀌지 않았다. 금요일 교통체증을 뚫고 힘겹게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비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새벽이 되자, 장대비가 오기 시작했다. 주산지 입구에 주차를 하니 '이거 내려야 하나' 싶을 정도로 비가 많이 왔다. 우리는 행여 장비가 젖을까 한손으로 카메라 가방을 꼭 안고, 다른 한손으로 우산을 들고 주산지로 이동했다. 이미 바지는 다 젖었고, 구두 속은 물이 흥건하게 넘치고 있었다.
도착한 주산지의 모습은 과연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주 잠깐이지만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비 속에서 초보 사진사가 주산지 촬영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날씨가 조금만 좋았더라면 하는 속상함이 들었지만, 일기예보를 무시하고 참여 신청을 한 것은 엄연히 나였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결국 사진은 네 컷 정도밖에 찍지 못했고, 서둘러 차로 돌아와야 했다. 나름 의미있는 시도를 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노력 대비 참 허탈했다.결과적으로 셔터속도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사진 한 장만 남았다.
돌아오는 길에서는 사고까지 났다. 운전 가능한 두 분이 교대로 차를 몰았지만 피로감을 무시할 수 없었고, 고속도로에서 빗길에 차가 급정거를 하게 되자 미끄러져선 채로 여러바퀴를돌았다. 뒷자리에서 꾸벅꾸벅 졸던 나는 갑자기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끼며 이제 죽는구나 생각을 했다. 다행히 옆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는 없었고, 막차선 가드레일에 범퍼가 찌그러진 정도로만 끝이 났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모두 차 밖으로 나와 혼이 나간 것처럼 한참을 서 있었다.
2007, 주산지
이후로 나는 날씨에 대해 객기를 부리지 않았다. 악천후가 예상되면 일정을 바꾸거나 깨끗이 포기를 했다. 모든 것은 과유불급이다. 자연이 허락을 해주지 않는데 그것을 무리해서 뚫고 갈 필요는 없다. 물론 주산지를 갈 기회는 그 이후 다시 주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지금 이 한 목숨 보전하고 있는 것을 더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2. 천지가 나를 선택하다
2004년 백두산을 올라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는 내가 사진 취미를 갖기 전이어서 들고간 것은 작은 니콘 똑딱이 카메라 뿐이었다. 어쨌든 TV 애국가에서나 보던 백두산 천지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렘이 컸다. 백두산 입구에서 가이드분은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천지는 기상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올라가도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못 볼 수 있습니다. 보인다 싶은데 갑자기 안개가 덮어버릴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안보인다 싶은데 갑작스레 확 열릴 수도 있어요. 물론 못보고 내려가실 수도 있고요. 모처럼 오셔서 기대가 많으실텐데 절반은 마음을 내려놓으시라는 취지에서 말씀을 드립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천지는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별명이 붙여져 있더라. 일정부분까지 등반을 하고, 이후부터는 중국인 기사가 운행하는 택시를 타고 올라갔다. 택시기사는 수입을 위해 빠른 회전율을 유지해야 하므로 우리에게 30분의 시간만 허락해 주었다.
도착해서 본 천지의 모습은... 실망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욱한 안개만이 눈 앞을 가렸다. 나는 선택받지 못했는가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분의 '한 순간에 열릴 수도 있다'는 말을 믿어보았다. 그러나 15분이 흘러도 눈앞은 요지부동이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화장실이나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얼마나 바뀌었을지 모르겠지만 그곳의 화장실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싶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바깥에서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들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안개가 걷힌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뛰쳐나와보니 사실이었다. 백두산 천지를 꽁꽁 싸고 있던 장막은 빠른 속도로 걷히고 있었다. 활짝 열린 천지의 광경은 놀라웠다. 내 앞에 거대한 액자 그림이 펼쳐져있는 것 같았다. 당시 내가 DSLR같은 카메라를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지만 똑딱이 카메라로도 원없이 사진을 찍었다. 당시 내게 든 생각은 '천지가 나를 선택해줬구나'였다. 사실이었다. 자연 현상을 내 힘으로 어떻게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며칠을 안개 속에 꽁꽁 숨어있을 수도 있는 천지가 내게 자신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기쁨을, 다른 한편으로는 숙연함을 갖게 해 주었다.
감사하게도 5년 후 백두산을 한 번 더 찾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때는 처음부터 천지가 열려 있었다. 비록 5년전과 같이 깨끗한 풍경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그때는 DSLR을 갖고 간 터라 여유를 갖고 사진을 찍었다. 두 번 천지를 찾아 두 번 모두 선택받은 나 자신이 새삼 복되다고 생각하고 있다.
2009, 백두산 천지
3. 기다려준 토끼님
2010년초, 추위가 한창이던 늦은 오후였다. 당시 선유도 공원은 나의 단골 출사지였는데 운동 겸 한 바퀴를 돌고 있던 도중 정면에 무언가가 나를 주시하고 있음을 느꼈다. 무엇일까 저것은? 자세히 보니 토끼였다. 여기 토끼가 서식하고 있었구나! 그 녀석은 움찔거리거나 도망가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내 카메라에 물려있는 렌즈는 135mm였다.준망원이었지만 몇 발자국은 더 다가가야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청설모나 고양이 같은 경우는 카메라를 들어 올리는 순간, 혹은 자신이 인식하는 위험 거리를 침범하는 순간 재빨리 도망가버린다.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최대한 천천히 카메라를 들어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댔다. 사실 이 과정에서 토끼가 줄행랑을 쳐도 할 말은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 녀석은 다소곳이 앉아 신기한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숨을 죽이며 열 컷 정도를 찍었다. 따뜻한 김을 뱉어내며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그제야 토끼는 천천히 몸을 틀어 수풀 쪽으로 뛰어갔다. 마치 '찍을만큼 다 찍었느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2010, 선유도공원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정상을 우리에게 잠시 빌려줄 뿐이다."
인류 역사상 9번째로 히말라야 완등에 성공한 엄홍길 대장의 말이다. 그는 "산이 나를 받아주었기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지, 거부한다면 절대 올라갈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수많은 역경을 거쳐 체득한 산악인의 겸손은 내게 많은 울림을 준다. 사진의 영역도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풍경이나 야생을 촬영하는 이들에게는 '자연의 허락'이 필수적일정도로 많은 포션을 차지한다.
수많은 단체, 개인 출사를 경험해보며 느낀 것이 있다.자연이 허락해주지 않는 경우는분한 마음에 눈물을 흘려도 집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자포자기하던 순간에 기적같이 빛이 열리고 날씨가 개이는 경험도 했다. 그것은 선물과도 같이 주어졌다.
사진을 그저 취미로만 하는 아마추어가 너무 거창한 주제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어설프게나마 사진을 공부하며, 인생 수업도 함께 받아왔다. 자연이 허락해주지 않는 순간에 깨끗이 포기할 줄 아는 자세와, 자연이 허락한 순간을 감사히 받는 겸손의 마음가짐이 그것이다. 실제로 삶을 살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들을 경험할때마다, 사진을 통해 깨달은 것들이 좌절을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행운의 영역에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자연이 자신를 열어주는 그 찰나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담아낼 실력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공부하고 경험하는 사진 기술이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생각, 그것이 겸손의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연이 선뜻 내밀어주는 선물을 감사하게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는 것도 겸손의 한 부분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