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닐라라떼 Mar 18. 2024

뺄셈으로 배우는 사진

힘에서 노련함으로



연재를 하며 내가 사진생활 초기(약 20년 전) 촬영한 파일들을 훑어보게 되었다. '참 욕심 많았었네'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색감은 짙었고 컨트라스트는 높았다. 샤프니스도 사진이 깨어질 것마냥 날카로웠다. 프레임에 얼굴을 가득 채워 놓은 인물 사진도 많았다. 당시 지인들이 내가 찍어준 사진들을 부담스러워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사진은 늘 어려웠지만, 그때는 대체 어떻게 찍는게 좋은지 몰라 방향성 없이 이것저것 들이대는 시도만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사진을 가르쳐주던 선배가 내 사진을 보고 "드디어 사진에 힘을 뺄 줄 알게 됐구나"라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당시에 잘 몰랐다. 이렇게 해도 안되고 저렇게 해도 잘 안되어서 나름 여러 방법으로 찍어본 것인데, 잘했다는 말을 들으니 일단 기분은 좋았다. 그래서 힘을 뺀다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동일한 방향으로 보정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아직 '힘을 뺀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몰랐기에 오히려 색감과 밝기가 흐리멍텅하고 주제도 불분명한 결과물들이 나왔다.




하루는 사진 동호회 사이트를 둘러보다 한 분의 포트폴리오를 보게 되었다. 그분의 사진은 조금 과할 정도의 여백미를 보이면서도 편안한 색감을 전달해 주었다. 아득한 분위기에서 전달되는 애절한 느낌은 덤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살짝 눈물이 날 정도였다. 밝은 렌즈군을 가지고 최대개방으로 촬영하는 스타일은 내 성향과도 맞았다.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생활 4년만에 내가 지향할 방향을 찾은 것 같았다. 이후 다른 사람들이 찍은 사진들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분의 사진들을 무작정 모방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나를 모르고, 나도 그분의 사진밖에 아는 것이 없지만 이러한 '만남'은 너무나 소중했다. (실제로 그분의 사진들은 지금까지 내 사진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해 별도 주제로 글을 쓰고 싶지만 많은 고민끝에 이번 글에 언급만 하기로 했다)


2013, 광안리


이후 내 사진이 남이 보기에 더 나아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모방이라는 작업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사진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라는 것이었다. 예전에 구도를 잡을 때 '어떻게하면 더 많이 넣을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들이 이제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뺄 수 있을까'로 바뀌었다. 그렇게 하니 사진이 많이 단순해지고, 부각되어야 하는 주제만 드러날 수 있었다.


2009, 이화동


2022, 용인


색감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개개인의 스타일 차이이겠지만) 후보정을 할 때 높은 컨트라스트는 피하고 채도도 살짝 낮추는 방향으로 편집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메인 피사체는 선명하게 표현이 되도록 신경을 썼다. 지금은 많이 하지 않지만, 의도적으로 비네팅도 주어 감성적 효과를 높이려 했다.

보정할 때 뿐 아니라, 촬영하는 순간에도 뷰파인더가 그런 사진들을 남기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2009, 태안


2009, 이화동




밝은 단렌즈를 선호하는 내 스타일도 명확해졌다. 모든 경우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얕은 심도의 표현이 가능한 렌즈들이 유리했다. 줌렌즈, F값이 높은 렌즈들은 하나하나씩 처분하게 되었고 표현력과 색감에 강점이 있는 단렌즈 위주로 구성을 하게 되었다.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뺄셈의 사진, 즉 배경을 날리거나, 여백을 많이 만든다고 해서 배경과 여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보케의 형태와 색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도 중요했다. 인물사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얕은 심도(즉 아웃포커싱)로 사진을 찍는다 해서 피사체만 신경쓸 수는 없다. 인물 뒤 뭉개지는 배경으로 어떤 것들이 어떤 색깔로 배치되는지에 따라 결과물은 달라졌다. 환상적인 벚꽃길이나 단풍길에서는 이런 효과가 더욱 두드러졌다.


2009, 양재시민의 숲


2023, 용인


흑백 사진도 이런 표현에 도움을 주었다. 구도는 좋지만 색들이 너무 복잡할 때, 흑백 전환은 주제를 보다 명확히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나는 흑백사진을 많이 연습해보진 않아 이 부분에 부족함이 많다. 필름 카메라와 흑백 필름을 구입해서 한 때 연습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흑백사진을 의도하고 찍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대신 가끔 라이트룸이나 포토샵에서 사진들을 보정하기 전 흑백으로 꼭 한 번 전환은 해 본다. 둔한 사진감각이 작동한다는 생각이 들면 흑백전환으로 결과물을 완성한다.


2009, 이화동



2010, 우음도


아래의 사진은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내가 스스로 가장 만족해 하는 사진 중 하나다. 컬러 결과물로 보자면 아무것도 느끼기 힘든, 버려야 할 사진이었다. 빛도 그렇게 좋지 않았고 갯벌은 자잘한 쓰레기들로 정신없는 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흑백 전환을 통해 색 표현이 단순화되니 갯벌의 질감과 홀로 남겨진 고기잡이 배 한척이 정말 좋은 느낌을 주었다. 지금도 가끔 홀로 셀프 감상을 하는 사진이다.


2009, 영흥도





무엇이든 처음 배울때는 욕심과 긴장이 많은 것 같다. 내가 처음 통기타를 배웠을때 1주일에 기타줄 하나씩은 꼭 끊어먹었다. 당구를 배울 때도 '당구공 부서지겠다. 좀 살살 쳐라'는 말을 줄곧 들었다. 어떤 분야든 초보는 힘만으로 밀어붙이려 한다. 그러나 고수가 될수록 불필요한 힘이 빠지고 노련미가 생긴다. 평소에는 부드러우면서도 필요한 순간에 임팩트를 보인다. 나도 조금이나마 사진을 통해 이런 것들을 배운 것 같다.


사진가에게는 눈앞에 찍을 것들이 무한히 펼쳐져 있는 경우가 오히려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출사지에 가서 마치 부자가 된 마음으로 몇 백장의 사진을 담아오지만, 집에서 파일을 열어보면 정작 쓸만한 사진은 없는 경우가 많다. 좋은 피사체가 많이 보일수록 더 절제하고 고민하며 구도에서 과감히 제외하는 결정이 필요하다.


2015, 다대포


내가 소개한 스타일의 사진들이 반드시 좋은 사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사진들을 보시면 알겠지만 다른 고수분들과 비교해 내 사진은 명함조차 내밀 수 없는 수준임을 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20년 전 시작한 사진들을 시간 순서대로 찬찬히 훑어보며 '나도 조금씩은 어떠한 방향으로 성장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사진은 뺄셈이었다.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 중 정말 중요한 것들 외에는 구도에서, 내 욕심에서 하나씩 빼기 하는 작업이었다.


가끔씩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며, 깊은 심도로 안정되게 정돈된 풍경사진들을 볼 때면 나도 가슴이 뛴다. 나는 왜 저런 스타일의 사진은 연습하지 못했나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내 그 욕심도 내려놓는다. 사진을 업으로 삼고있지 않는 한, 나의 한계는 명확하고 내가 어설프게나마 갈고 닦은 하나의 스타일이 있음에 오히려 감사하며 산다. 이런 측면에서도 사진은 내게 뺄셈이다.


2010, 서울


이전 16화 정말 나쁜 기억만 있던 곳이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