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에게는 신혼이 없었다. 지금 아내를 볼 때마다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 이유 중 하나다. 결혼하기 전까지 내 회사생활은 몹시 여유로웠다. 바쁠 때도 오후 5시가 되면 칼같이 퇴근을 했다. 연애시절 아내는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결혼하면 가정에서 함께할 시간이 많아질 것을 기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혼 직전부터 거짓말처럼 일거리가 터져나왔다. 중요도가 굉장히 높은 프로젝트라서 거의 매일 야근을 했다. 자정에 퇴근해 집으로 돌아와 새벽 3시까지 결혼 준비를 했던 기억도 있다. 억수같이 비가 퍼붓던 6월, 피로에 찌든 채로 어떻게든 결혼식을 마쳤다. 힘겹고 바쁜 시작이었지만그래도 우리 부부는 작은 행복들을 누리기 위한노력을 했다. 피곤해도 주말에는 꼭 좋은 곳을 찾아갔다.
달콤한 10월 3일 개천절, 휴일 기회를 살려 소래 생태공원으로 드라이브를 했다. 당연히 카메라도 들고 갔다. 날씨가 너무 좋았기에 기대도 컸다. 교통이 좀 밀리긴 했지만 다행히 해가 떨어지기 전 도착을 했다. 이곳은 갯벌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염전들, 그리고 예쁘게 조성된 풍차 공원이 명물이었다.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공원 길을 걷던 도중 회사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무언가 불안한 예감을 갖고 받아보니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프로젝트 막바지 추가과제가 생겼으니 내일 출근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것이었다. 아연실색한 내 모습에 아내도 걱정을 많이 했고 휴일 나들이 분위기는 다 잡쳐버렸다. 이후 그곳에서 사진 몇 장을 찍긴 했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업무 걱정 뿐이었다.
실제로 다음날부터 죽음의 일정이 시작됐다. 고객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을 단시간에 완료하기를 요구했고 우리 팀은 죽기살기로 납기 준수에 매달렸다. 하룻밤을 새는 것은 보통이었다. 주말출근도 당연한 일이 되었다. 한 번은 토요일에 출근했다가 수요일 새벽에 퇴근한 적도 있었다. 팀원 모두가 정신적으로 한계에 다다르니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말이 거칠어졌다. 나도 한 번은 새벽 3시에 선배와 심하게 다투고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택시를 불러 집으로 와버렸다. 적막한 집안에 아내 홀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스탠드는 켜진 채였다. 아마 나를 기다리다 잠들었을것이다. 조심스럽게 옆에 누웠는데, 내가 온 것을 아내가 알고 깼다. 서러운 마음에 살짝 눈물이 났다.
"나는 개천절이 싫어. 소래생태공원도 싫어."
이불 속에서 나온 아내의 말이었다. 개천절은, 그리고 소래생태공원은 사실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장소를 기점으로 부부가 몇 달간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그곳에 대한 기억이 좋을 리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 끝나지 않는 터널은 없는 듯 하다.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던 프로젝트도 3개월 후에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었고, 그 이후 나는 다른 곳으로 부서를 옮겼다. 결혼전처럼 여유가 넘치던 여건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지만 신혼때처럼 비정상적인 강도의 업무도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이제 결혼 13년째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우리 부부는 많이 바빠졌지만 그래도 가끔 외출을 나가곤 한다. 다만 주말 혹은 휴일 전, 갈 곳에 대해 계획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소래생태공원은 늘 제외였다. 우리 집에서 멀기도 했지만, 아내는 그곳을 다시는 보고싶지도 않다고 했다. 아내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마찬가지긴 했다. 그곳을 찾아가면 비슷한 일들이 또 일어날 것 같은 지긋지긋한 느낌이 있는 것이다. 우리 부부가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아무튼 굳이 우리 발로 가고싶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오래도록 흘러버렸다.
며칠전 사진 폴더를 꺼내보며 우연히 그날의 사진들을 넘겨보았다. 편집을 미처 못한 사진까지 한 장 한 장 다 확인했다. 조금 놀랐다. '이곳은 참 좋은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곳에서 받은 전화 한 통 때문에 미처 감상하지 못했던 좋은 풍경들을 사진으로는 담아두었던 것이다. 석양에 비친 염전의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풍차가 있는 억새밭의 모습이 이렇게 좋았었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정말 젊었었구나....!!
2011, 소래생태공원
2011, 소래생태공원
2011, 소래생태공원
사람은 특정한 자극이나 사건을 겪게 되면 그것이 과장되고 부풀려진 채로 머릿속을 차지하게 된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즉, 그 사건과 관련된 모든 배경들이 한 묶음이 된 채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에게 있어 생이별이나 다름없었던 밤샘과 기다림의 기억은 개천절날 소래생태공원과 한 묶음으로 처리되어버렸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곳'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 날이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었음에도 우리는 힘겨운 시간에 눌려 그것을간과한 채 살아왔다.
사진은 이런 측면에서 고맙다. 사진은 나를 과거로 잠시 되돌아가게 한다. 부정적인 기억만 남아있던 시간들도, 실상 다시 보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음을 깨닫게 해 준다. 전화 한 통에 복잡한 마음을 가졌던 2011년 10월 3일을 다시 떠올려보니 나는 그날도 변함없이,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황금색 노을이 소래 공원을 비추자 나는 아내를 닥달해서 좋은 배경 앞에 서게 한 후,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삼각대를 세워놓고 타이머를 이용해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지금 파일을 열어보니 우리 두 사람이 정말 풋풋해 보인다. 아, 그날이여!
억울하게 신혼초 재앙의 원흉이 되어버린 개천절날 소래생태공원은, 그날 담아놓은 사진들을 통해 어느정도 오해를 푼 듯 하다. 이날 뿐 아니라 신혼 시절 즈음에 찍어놓은 사진들을 훑어보며 당시 우리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어떤 미래를 설계했는지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2011, 소래생태공원
이제 그곳을 다시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아내도 그렇지 않을까? 개천절은 아니지만 날이 따스해지면인천을 돌아볼 계획을 세워봐야겠다. 갯벌 체험도 할 수 있어서 아이들도 좋아할 것 같다. 최근블로그들을 검색해보니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바라건대 우리가 소래를 찾는 날도 12년 전처럼 좋은 날씨와 노을이 함께하면 좋겠다. (그날의 아쉬움들을 보상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날씨여 도와주길!)